그림보다 위대했던 그녀, 김향안
20세기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를 검색해 보면 수많은 작품과 함께 그의 아내 김향안이 떠오른다.
잘 알려졌듯이 그녀는 김환기와 결혼하기 전 요절한 작가 이상의 아내였다. 한국 근대사를 대표하는 두 천재의 뮤즈로 유명한 김향안.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었던 걸까.
우선 뮤즈의 뜻부터 다시 한번 살펴보고 가자.
뮤즈 : 춤과 노래·음악·연극·문학에 능하고,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예술의 여신으로 또한 지나간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학문의 여신이기도 하다.
당대 최고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었으니 뮤즈는 맞기는 하는데, 단순히 타고 난 매력만으로 이 괴팍하고 까다로운, 잘생긴 고집쟁이들을 움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특별함은 무엇일까.
1. 강한 생활력
일제강점기 시절 대학교육까지 받은 엘리트 신여성 김향안은 이상과의 4개월이라는 짧은 결혼 생활 후 가난한 화가 김환기를 만나게 된다. 이혼과 빚더미, 늙은 노모와 딸 셋까지 딸린 정말 총체적 난국인 이 남자를 망설임 없이 택한다. 친정 식구들에 반대에도 내가 낳아야만 자식인가 라는 멋진 한마디와 함께 이름까지 개명하고 인연을 끊어버린다. 예술밖에 모르는 남편 대신 땔나무를 도끼질하고 피난생활에 굶주리는 가족들을 위해 쌀을 구해오고 새벽에 물을 길어오기도 한다. 그 와중에 글을 기고하며 가정 경제를 이끌어 간다.
2. 진정한 페미니스트
아직 화가가 물을 만나기 전, 갑자기 늘어난 가족들의 끼니를 걱정하던 피난시절에 그녀는 반성한다. 나는 내 힘으로 내 아이들을 길러 낼 아무런 실력도 없는, 오직 남편에게 기생하는 생활 무능력자라고. "내가 아무리 남편에게 새로운 세대를 선언하고 자유와 동권을 주장해 본다 해도 실제로 나의 두뇌적인 실력, 경제적인 실력이 대변하지 못한다면 나는 남편의 큰 소리에 대항할 도리가 없지 않냐"라고 말이다. 향후 파리와 뉴욕에서 생활하며 선진국 여성들과 우리들도 별반 다르지 않음을 시사한다. 서양은 오히려 여성을 너무 우대하여 재능이 실력 이상으로 찬양되는 폐단과 상식적인 여성관이 품기에는 뛰어난 여성들에 대한 불편함이 선진 사회에도 존재함을 깨달았다. 한국 전통 사회의 사회적 구조나 기조가 변화되고 있는 과도기에서 그녀는 후배 여성들에게 당부한다. 부디 낡은 세대들의 경우처럼 여성이라는 핸디캡 대신 두뇌적인 실력으로 당당히 등장하라고.
3.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
뛰어났던 문필가였던 그녀는 스쳐가는 바람과 기억, 느낌들을 놓치지 않고 글로 기록했다. 젊은 시절 기록해놨던 수첩들이 모두 화재로 소멸되고 난 후,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집 대신 그녀의 역사를 되찾으러 갈 만큼 인생의 조각들을 중요시했다. 파리의 거리를 거닐며 그녀는 부디 서둘지 말고, 비굴한 생각 말고, 초초하지 말고 선악에 매섭고 일체 감상을 버리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으며 생일날 아침 일기장에 "열심히 일을 할 것, 좋은 생각만을 하리라"고 남기기도 했다.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열심히 놀겠다는 다짐을 하며.
4. 미(美)에 대한 남다른 식견
그녀는 가난한 피난 생활에서도 우리의 소반과 놋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였으며 하다 못해 식량이 넉넉지 못했던 때 든든한 반찬이 되어준 호박의 색감을 찬양하기도 했다. 우리의 향토와 가장 어울리는 흰색과 한복은 물론이고 핸드백, 손수건 등 다양한 아이템들을 다양한 각도로 해석하는 남다른 눈을 가졌다. 세느강과 센트럴 파크는 물론이고 성북동의 돌담이나 혜화동 골목길에도 그녀만의 스토리를 입혀 글로 풀어냈다. 사소한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낸 그녀의 예술적 재능은 몇 년 간의 고뇌 끝에 탄생한 환기미술관을 방문해 보면 단번에 느낄 수 있다.
5. 국가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한국 근대사의 아픔을 겪고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난 두 부부의 나라 사랑은 남달랐다. 그녀는 우리 민족의 기구한 운명을 늘 생각하였으며 되풀이되지 말아야 될 역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선진국에서 찾아낸다. 마담 꼬레엔느라는 이름을 자랑스러워하며 우리만이 가져온 보배들을 가꿔서 다른 민족 속에서 당당히 살아갈 날들을 꿈꿨다. 세느강을 바라보며 다리와 유람선이 더해진 한강을 상상하며 아름답게 확장된 서울과 국가의 번영에 대하여 늘 소망했다. 환기미술관을 설립하고 전시회를 기획하며 전 세계에 산재해 있던 작품들을 서울로 보내며 "작품들이 제 나라로 돌아갔으니 그다음의 역사는 민족의 운명과 같이할 것"으로 믿었다.
6. 사업의 달인
대학교수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김환기에게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길을 터준 사람은 김향안이다. 새로운 곳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앞에 정 그렇게 무서우면 내가 먼저 가볼게라며 쿨하게 파리로 홀로 떠난다. 그녀 역시 두려웠겠지만 한국이나 동양권 안에서 소모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재목을 알아본 식견이 그녀를 용감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파리와 뉴욕에서 활동하며 필요한 네트워크를 만들고 전시회를 기획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하는데 화가의 재능만큼이나 큰 역할을 한것은 그녀의 행동력이다. 사후에도 환기미술관 설립을 비롯하여 다양한 추모전과 기획전들을 기획하였으며 남편과 그의 작품들을 "WHANKI"로 브랜딩 하여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고가에 낙찰되고 있는 지금은 김향안의 탁월한 안목과 수완 없이는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7. 내조의 여왕
김향안의 내조는 특히 그 시대상이 반영된 전통적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 안 그래도 가난에 힘들었던 젊은 시절, 미술과 술만 좋아하는 무책임한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작품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방을 치워주기도 하고 매일 밤 1차로 밖에서 취해 돌아온 남편에게 술상을 다시 차려주며 수다를 들어준다. 아직 영글지 않은 화가가 모든 것을 쏟아내고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어느 정도 성공한 후에는 끊임없이 가정의 책임을 깨우쳐 주며 가정 경제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고 적절할 때 바가지를 긁기도 했다고 한다. 기분을 맞춰주는 예술가 아내의 임무를 다하며 한도 끝도 없는 예술가의 기분에 대한 적절한 견제를 함으로 남편이자 화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8. 한국 미술 발전의 조력자
오랜 기간을 파리와 뉴욕에서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함께 생활하며 이미 글로벌해진 그녀의 눈높이와 미술에 대한 애정과 존경은 한국 미술계에 적지 않은 발전을 가져왔다. 그녀는 환기재단을 통해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였으며 그 흐름은 사후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또한 그녀는 환기미술관을 준공하고 작품들을 고국으로 불러 모아 한국 근대 미술의 역사의 일부를 서울 한복판에 재현하였다. 또한 까다롭게 기획하고 진행한 회고전을 통하여 대중들이 미술을 만나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예술을 대하는 자세를 전파하는데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9. 타고난 로맨티시스트
김환기와 김향안이 주고받은 편지들을 보면 "뽀뽀 세 번"과 같은 언제 느껴봤는지 기억도 안나는 사랑의 향기들이 잔뜩 묻어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들의 사랑은 아름답고 깊었다. 김향한은 1974년 김환기와 사별한 후 30년이라는 다소 긴 시간을 그를 추억하며 살았다. 아니, 함께 했다는 표현이 더욱 맞을 것 같다. 김환기의 제사뿐만 아니라 매년 생일과 결혼기념일을 특별한 날로 만들었으며 작품들을 새롭게 손보고 선보이며 그와 함께 했다. 사망 후 몇 달간은 "너는 정말 죽은 것일까. 인생이 거짓말 같다"며 슬픔 속에서만 지냈지만 그와 함께 살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갔으며 지금도 나란히 손을 잡은 듯 뉴욕 근교 묘지에 함께 하고 있다. 그들이 처음 결혼했을 때 삼았던 모토가 곱게 살 자였던 것처럼, 아름답게 사랑하였다. 그들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났을까. 다시 만났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그들은 늘 함께했다.
부암동 주택가 뒤편에 자리 잡은 환기미술관은 정말로 아름다운 건축물이고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작품들은 앞으로 역사가 흐르며 더욱더 큰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김향안은 김환기의 뮤즈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을 때로는 비바람에 보호하기도 하고 창 사이로 스며드는 빛과 함께 더욱 빛나게 하는 미술관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사람은 뜻대로 살아지지는 않지만 친구가 있어서 얘기를 주고받으며 죽어갈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던 그녀의 바람대로 이 공간이 계속 따뜻하게 숨쉬길 바란다.
참고 문헌 : 월하의 마음. 김향안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