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불어도 좋다 下

세상이 선택한 장미, 천경자

by easy young
황금의 비.jpg 황금의 비, 1982, chunkyungja.org



남편이라고 하기도 괘씸한 두번째 남자 김남중은 물론 화백의 마음 속 몇십년을 차지한 남자이지만, 세상이 본인을 어떠한 시련속으로 몰아 넣어도 담담하고 당당하게 본인의 재능을 펼쳤던 그녀에게는 참 못난 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본인이 원하면 거침없이 찾아오는 그와 사랑을 나눴고 본부인의 존재를 거부하지도 않았으며 수감생활 뒷바라지를 자쳐하였습니다. 지고지순형의 여인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던 그녀는 도대체 왜 이런 긴 시간을 한 남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을까요?


물론 그녀도 이 과정이 수월했던것은 아닙니다. 타고난 예술가적 감성에 가장이자 어머니로서의 책임감, 생활의 굴곡 등 안그래도 안쓰럽게 바쁜 그녀의 삶의 남편은 끓는 물에 투하되는 기름통이었습니다. 화가이자 교수로, 또한 수필가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가던 시기, 그녀의 우울함은 극도로 치달았고 당시 그녀의 작품은 그녀의 심리상태를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자살의 미.jpg 자살의 미, 1968, chunkyungja.org




자신의 인생을 블랜더로 갈아버리고 싶었을 만큼 괴로웠던 시기는 그녀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끌었고 이후 삼십여년간의 스케치 여행이 시작됩니다. 잘 알려진대로 타히티, 유럽, 인도, 아프리카 등을 탐험하며 화가 천경자의 작품은 말 그대로 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녀의 그림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여인과 꽃입니다. 그녀는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온 그녀 자신과 다른 여인들을 화폭에 담아내며 그들의 인생을 달랬습니다. 전 세계 모든 남자들의 연인이었지만 본인은 동성애자였던 그레타 가르보를 모델로 한 청춘의 문(1968)이나 마를린 몬로의 미소 뒤 불행한 인생을 투영한 작품 팬지(1973) 등에서, 또 다수의 자화상 및 여인들의 모습에서 그녀는 인생의 고독함과 괴로움을 아름다움과 함께 그렸습니다. 슬픔이나 고통도 느끼지 못할 만큼 평탄한 인생을 사느니 아름답지만 처절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삶의 가치를 더욱 높게 평가한 것입니다.


청춘의 문.jpg 청춘의 문, 1968


만약 여인 천경자의 삶이 조금 더 평탄했다면, 우리는 화백 천경자를 얻지 못했을까요? 당연한 반기를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천재성을 발휘할 방법을 찾아 우리를 감동시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녀는 어떠한 불행이던 본인의 운명으로 받아드리며 함께할 방법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겼으며, 그 어떠한 시련도 그녀의 정체성을 변색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몇십년 동안 이어진 김남중과의 관계는 순종적 수용이 아니라 그녀의 운명이 가져다 준 사랑이었고 그녀는 그 운명을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예술가로서 느낄 수 밖에 없었던 목마름을 축이기 위해 떠났던 세계 여행은 자연스럽게 관계를 정리합니다. 천경자가 몇년의 고통 후 "당신과는 이제 안되겠다"라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물론이고 그당시 관념으로도 이해하기 힘들었던 해바라기 천경자의 사랑은 김남중이라는 남자를 향한 것이 아닌 본인의 가치를 불타오르게 하는 대상입니다.


내슬픈전설의22페이지.jpg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 chunkyungja.org


그녀의 아픈 과거의 상처를 대변했던 뱀을 화관으로 쓰고 있는 그녀의 자화상은 그녀의 슬픈 전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그녀의 눈은 너무나도 초연합니다. 이 눈빛은 어떠한 시련이 다가와도 그것을 본인의 삶의 일부로 받아드리며 본인의 운명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의 삶의 태도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한국 여자로 태어나 당연히 안고 살아야 하는 한으로 이해하기 쉬운 그녀의 작품들은 인생의 굴곡 때문에 하루를 괴로워 하며 잠 못이루는 우리에게 외칩니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지만 나를 만지는 타인 뿐만 아니라 나의 가지를 쑤셔대고 있는 가시들과 함께 태어난 장미와 같은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

어디서 일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들.

그 위에 人生 이 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믿는 신(神)은 한 인간이 어느 만큼이나 열렬하게

자기 삶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존재하기도 하고,

그운명의 문은 열리리라고 믿는다.



천경자, 자유로운 여자 (집현전,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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