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당신의 관계는 반보
벌써 다음 달이면 아빠의 첫 번째 기일이다. 큰 딸인 나와 43살 차이가 나는 나이가 많았던, 아빠라는 호칭보다는 아버지가 자연스러운 우리 가족의 묵직한 중심은 작년 6월 영면에 드셨다. 구순에 가까운 나이었으니 사실 평균보다는 더 사셨지만 뭐 자식입장에서는 호상이란 없는 듯하다.
당연히 장례식 때는 바빠서 정신없고 그 이후는 실감이 나지 않다가 몇 달 뒤 혹은 몇 년 뒤 갑자기 현실로 다가올 거라는 주변의 조언처럼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아빠의 부재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일 때문에 깊은 우울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요즘 아빠가 곁에 없으심에 더욱 마음이 무겁다. 딸들과 나이차이가 꽤 많았던 관계로 70세까지 은퇴도 못하신 것도 있지만 아빠는 그 이상으로 자기 일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했다. 본인의 목표를 달성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오를 수 있는 곧 제일 높은 곳에 꽤 빨리 올라 그 자리를 오래 지켰다. 시대는 변했지만 70세까지 남의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그 자리를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현재 나와 차이가 크지 않은 53세에 아빠는 혼자가 되셨다. 배우자 내조가 필수였던 보수적인 당시 시대상에 공직에 있었던 그는 그 자리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눈치를 덜 볼 수 있는 공기업으로 이동한 그는 그 이후로 20년이 가까운 세월을 보내며 최선을 다했다. 엄마 사망당시 너무나도 어렸던 내 동생과 나는 친척들이 있는 동네로 이사를 갔고 그는 2주에 한 번씩 우리를 보러 왔다. 당시에는 우리 아빠가 어느 공기업 다닌다라는 개념만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지금 임원리크루터로 일해보니 보통 노력과 수고가 필요한 일이 아니다. 지금도 일부 그렇겠지만 주말마저 반납해야 하는 임원이 격주 주말 딸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서울과 부산을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그가 몸담고 있는 공기업은 90년대는 정권교체로 많은 부침이 있었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버텼다. 적어도 그 분야의 행정과 운영에서는 가장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로 인정받기 위해, 대체자가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그는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했을까. 사회에서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타고난 예민한 성격과는 다르게 둥글하게 살려고 노력했을까. 그 와중에 철없는 딸은 아빠랑 말이 안 통한다 유학 간다 돈 달라 아빠 밉다 등등 의미 없는 얘기들을 쏟아냈던가.
2000년 초반 그는 드디어 은퇴를 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가 마지막 몸담았던 곳은 기존 직장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가 집에 있는 모습이 어색했던 사회초년생 나는 그즈음에 헤드헌팅 시장에 뛰어들었다. 나의 부모에게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이해를 완벽하게 못하는 상황이 답답하기도 하고, 왜 나의 꿈을 몰라보냐는 원망도 함께 섞인 탓에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내가 돈을 벌어오는 것을 신기해했다.
그 후 20년이 지난 작년까지, 그는 나의 직업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노년을 보낸 요양병원에서도 아직 너 점심 먹을 돈은 있냐고 걱정했던 나의 아빠, 나의 아버지. 지금 그가 곁에 있다면 내가 당신만큼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 이렇게 힘든 건지 솔직히 답해달라고 물어보고 싶다. 버티기 힘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그 전날 새벽까지 술을 잔뜩 먹고 들어와도 아침 6시면 일어나서 매일 출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지. 정말 일을 사랑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지 아니면 책임감 때문에 그랬는지도.
그의 질문은 항상 같을 것 같다.
네가 하는 일이 헤드 헌타라 그랬지?
회사가 왜 너한테 돈을 준다 그랬지?
너 점심 먹을 만큼 돈은 벌고 있나?
그의 답도 항상 같을 것 같다.
아빠의 인생은 항상 반보(半步)였다.
다 나아가지도 움츠리지도 않고
다 욕심부리지 않고 다 포기하지도 않고
일과 나 사이에 적절한 보폭이 무엇인지 항상 살피다 보니 시간이 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