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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H May 17. 2019

'찰랑'거리는 와인 한 잔

NO.1 - 평범한 듯 평범치 않은 순례지, '만월'

에디터 & 포토그래퍼 - Ringo



나에게 와인이란 샴페인과 모스카토 다스티와 같은 달달한 스파클링 와인이 전부였던 시절이 있다. 레드와인의 풍미가 어떻고, 화이트 와인의 산도가 어떻다는 둥의 이야기들이 도무지 나의 것일 수 없었던 날들이다. 그러던 내가 친구를 따라, 애인을 따라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어느새 가장 좋아하는 술은 “와인”이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살이는 이사의 연속이라고 할 만큼 짧은 기간에 몇 번의 이사를 다녀야 했는데, 그렇게 이사를 하고 나면 꼭 동네의 와인바를 찾아 찬찬히 순례하곤 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나면 마치 여기를 찾아 먼 길을 돌아온 이처럼 드나들었다.



고로 요즘의 순례지는 ‘만월’이다. 사당역 10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왼편 골목으로 꽤 들어가야 보이는 이 곳은 번화가를 다 지나고서야 제 모습을 볼 수 있는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해 있다. 다소 헤맬 수 있는 위치임에도 자꾸 오게 되는 이유는 마치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공간의 평화로움에 끌린 탓이리라.

쉬폰 커튼이 주는 섬세함과 포근함이 낮에는 카페, 저녁에는 와인바가 되는 이 곳을 둘러싸고 있고 해가 지고 나면 곳곳에 켜둔 초들로 인해 특유의 분위기는 극대화된다. 밖으로는 무수히 많은 빈 와인병들이 나란히 가게 앞을 지키고, 안으로는 자그마한 듯 답답하지 않은 공간에 놓인 2인용 나무 테이블과 6인용 화이트 테이블이 서로 가까운 듯 거리를 두고 놓여 있다.

메뉴판에는 적당히 다양한 와인들이 꽤나 저렴한 가격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곁들일 수 있는 음식까지도 주인장의 정성과 푸짐한 정도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아주 대단하지는 않지만 이 정도로 모든 것이 중간 이상의 정도를 가지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어쩌면 누군가는 평범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그저 적당하다.




평범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말이 있다. 이를 얻기 위해 갖은 애를 쓰던 과거를 떠올린다. 적당한 교우 관계, 소위 평균이라고 말하는 학벌, 졸업에 이은 취업과 이에 따른 적정 수입, 적절한 타이밍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사람과의 연애, 모나지 않은 대화를 위한 일정한 수준의 상식까지. 이런 것들을 새삼 나열하다 보니 평범은 더 이상 평범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어느 것 하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고, 지금도 또 앞으로도 이루었다 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만월’에 대해 위에 언급했던 것들은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다. 모든 면에서 평균 수준을 갖춘 와인바가 조용한 주택가에 있기란 쉽지 않고, 이러한 조건들로 와인을 편안하게 만나기 또한 쉽지 않다. 사실 평범하다는 말처럼 판타지에 가까운 표현이 있을까? 평범한 것 역시 개인의 개성이 담기지 않은 것이 없다. 은은하게 실내를 감싸는 초의 온기와 적당히 식욕을 돋게 하는 고소하고 짭조름한 안주 냄새, 찰랑이는 잔들이 여기저기서 부딪히는 소리들 모두 결코 평범하지 않다. 주인의 애정과 방문하는 이들의 성실한 출석이 어우러져 지금의 이곳을 존재하도록 한다.  



오늘의 와인은 ‘블랙베레’. 안주는 ‘샐러드를 곁들인 독일식 소시지’. 입 안을 치고 들어오는 달콤한 체리와 블랙베리의 향, 그 뒤에 몰려오는 다소 묵직한 과실 향을 느낄 수 있는 프랑스 랑그독 지방의 와인이었다. 달콤하면서 묵직한, 그러면서도 그르나슈와 쉬라의 가벼움이 공존하는 맛을 가진 블랙베레는 분명 맛있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만은 않은 이 공간에서 만난 우리들의 첫 찰랑.


※ Information

가게명: 만월

주소: 서울 동작구 동작대로 3길 44 만월

운영시간: 매일 11:00~01:00 일요일 휴무 (주인장 마음대로 열고 닫는다)

인스타그램: /cafe_fullmoon

주차여부: 불가


                                                                                                                                                Ringo.



※ 위의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매거진 랑', 그리고 산하 에디터에게 전적으로 있음을 안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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