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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승주 Dec 25. 2023

"못 가면 또 어떻고"

가수 권나무 공연에서 발견한 거리두기

권나무라는 가수가 있다. 인디씬에서는 꽤 유명하고 포크 음악으로 제법 인정도 많이 받은 아티스트지만, 소위 이야기하는 대중적인 가수는 아니다. 그래도 난 그가 좋다. 정직한 목소리, 진중한 가사, 본인의 작업에 대한 태도. 수년 전 큰 누나를 통해 처음 권나무를 소개 받은 나는 단숨에 그의 창작물에 매료되었다. 


남자가 남자 가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치고는 제법 열렬했다. 그게 어느 정도였는지 설명해 보자면,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멜론에는 '아티스트와의 온도'라는 개념이 있다(이젠 멜론을 쓰지 않아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특정 가수의 음악을 얼마나 열심히 듣는지를 기준으로 이용자의 순위를 1도부터 100도까지 매긴 것이었는데, 한동안 나는 1도 자리를 지켰다. 전국에서 멜론을 통해 권나무의 음악을 들은 사람 중엔 내가 가장 열심히 들은 것이다. 당시 나의 플레이리스트에는 비틀즈도 있었고, 콜드플레이도 있었고, 김광석도 있었고, 킹스오브컨비니언스나 데미안 라이스 같은 가수들도 있었지만, 나는 권나무의 음악을 가장 열심히 들었다. 당시 내겐 권나무가 락스타였다.


그러다가 나도 스타트업을 시작하며 제법 오랫동안 음악과 멀어져 지냈다. 공연도 다니지 않았고, 기타를 치지도 않았고, 온전히 음악만 감상하는 시간을 따로 할애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문득 권나무의 노래를 듣게 되었고, 또 문득 '그는 잘 지내는가' 궁금하여 인스타그램에 검색하게 되었고, 우연히 이주 뒤 공연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홀린듯이 공연을 예매했다. 묻지도 않고 여자친구의 티켓도 함께 예매했다. 여자친구는 권나무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들으면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공연 당일 여자친구의 손을 이끌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공연은 참 좋았다. 권나무는 크게 바뀐 게 없는 것 같았다. 이쯤되면 노래를 하는 방식이나 그 무드에 변화를 주거나, 또 어떤 측면에서는 타협을 할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과거와 같이 노래하고 있었다. 그러다 공연 중 권나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자신은 참 행복하다고. 연말에 자신의 공연을 찾아주어 고맙다고. 언젠가 더 큰 공연장에서 또 만나자고. 라스베가스 '스피어'에서 만나려면 각자 비행기 값은 모으고 있어야 할 것 같다고. 한 10년이면 가지 않겠냐. 잠시 침묵을 유지한 후 이어서 내뱉은 그의 말이 내 마음을 울렸다. "못 가면 또 어떻고."


이 얼마나 성숙한 삶의 태도인가. 나와 우리 팀은 끊임없이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파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생각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일 뿐이니 그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고. 고통은 피할 수 없겠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라고.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명료하게 하고 그것에 전념하는 것이 중요하며, 결과와 무관하게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가치. 그 해방감. 프로이트부터 수많은 석학들까지, 사람의 마음을 탐구한 학자들이 발견한 한 가지 진리는 '생각과 거리두고 가치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권나무가 내뱉은 "못 가면 또 어떻고"라는 말은 현실 순응 또는 체념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명료하게 한 후 그것에 전념하고 있었다. 모르지만 그 또한 창작의 과정에서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겠는가.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도 있었을 것이고, 모멸감을 느낀 적도 있었을 것이고, 기대보다 저조한 반응에 스스로를 의심하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삶에서 그런 고통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생각과 거리를 두고 자신이 원하는 바에 전념하며 그만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괴로워하진 않기로 선택하면서. 그런 그는 정말로 행복해보였다.


항상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말이 하나 있다. "오죽하면..."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의사인 한 교수님께서 환자를 보며 종종 썼던 말이다. 여러 의미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말이다. 2024년엔 하나의 말을 더 간직하며 살아가고자 한다. 체념이나 포기가 아닌 자신의 가치에 전념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내뱉을 수 있는 말.


"못 하면 또 어떻고"






권나무, 화분

https://youtu.be/uppFqw1_j9I?si=sxe8Xv7YOc7GC7G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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