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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녀 Oct 28. 2017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영화식사 002] 무뢰한The shameless, (2014)

  <무뢰한>을 보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이 생각났다. 하류인생의 판타지가 조악하지 않고 미학적으로 펼쳐지기 때문인데, 특히 전도연이 연기한 창녀와 성녀 사이의 묘한 긴장은 김기덕 영화에서 자주 본 그것과 닮아 있다. 슬픈 사연을 가진 채 모진 폭력을 그대로 받아내며 아름다운 얼굴로 찌들어 있는 대중문화 속 성노동자는 과연 남자들의 판타지를 충족하고도 남는다. 여기에 그녀를 사랑하고 만 형사 정재곤(김남길)의 존재 역시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그렇다. <무뢰한>이라는 영화의 전반적인 서사와 인물들은 영화 속 도시에 떠도는 공기처럼 부유한다. 작위적인 대사와 한껏 취한 연기들이 <무뢰한>이 분위기로 읽는 영화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남녀 주인공의 사랑까지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신형철의 저서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그가 사랑에 대해 쓴 몇 가지 문장이 인상적인데, <무뢰한> 속 남녀 주인공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좋은 참고가 될 것 같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마음산책, p.26)

김혜경(전도연)과 정재곤은 극중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와 몸짓을 통해 이들이 적어도 사랑과 비슷한 감정을 싹틔우고, 또 그 감정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형철의 해석을 따르면 김혜경과 정재곤이 느끼는 사랑은 결핍에서 비롯된다. 정재곤은 박준길(박성웅)의 행방을 알기 위해 김혜경에게 접근한 과정에서 김혜경의 결핍을 인식하고, 정재곤이 형사인 줄 모르는 김혜경은 단지 전 부인과 이혼한 사실과 몸에 난 무수한 상처를 근거로 정재곤에게서 자신과 동일한 결핍을 느낀다. 이 둘의 관계가 처음부터 애정이 아니라 동지의식으로 시작되는 것도 서로에게서 ‘없음’을 알아본 동질감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정재곤이 형사의 신분을 드러내면서 이 둘의 관계는 갑자기 계급으로 전환된다. 박준길이 죽은 후 김혜경은 마약 중독자의 수발을 들며 이전보다 더 추락하는 반면, 정재곤은 형사로 돌아와 그런 마약 중독자를 거칠게 연행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그런 와중에 겁에 질린 김혜경에게 자신의 신분을 장황하게 소개하며 이러한 계급 차이를 더욱 확실하게 각인 시킨다. 김혜경이 정재곤에게 느꼈던 ‘없음’이 사실상 ‘없음’이 아니었을 때 김혜경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그녀의 다음 행동에서 그 심정을 추측할 수 있다.


좋은 평론가의 문장을 자꾸 내 비루한 글에 끌고 오는 게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신형철은 다음 페이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이것은 장승리의 두 번째 시집 『무표정』(문예중앙,2012)에 수록돼 있는 시 「말」의 한 구절인데, 나는 이 한 문장 속에 담겨 있는 고통을 자주 생각한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마음산책, p.27)

  “나랑 같이 살면 안 될까.”라고 말하다 “그걸 믿냐?”고 한 정재곤에게, 마지막으로 김혜경이 절규하면서 속으로 외치던 말은 이게 아니었을까.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차라리 흔하디흔한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아 <무뢰한>은 더욱 고통스러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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