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식사 003] 39계단The 39 steps, 1935
종종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이 아니라 잠깐 스치는 조연보다 못한 역할에 감정을 이입하는 습관이 있다. 괴수영화에서 단지 몇 초만에 죽는 무장요원에 감정이입을 하거나, <로마의 휴일>(1953)에서 앤 공주(오드리 햅번)와 잠깐 춤을 춘 이발사에게 관심을 갖는 식이다. 주인공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고 행복하게 영화 뒤로 퇴장하겠지만, 이런 역할들은 대개 한 두 컷에서만 존재할 뿐 완결성이 없는 캐릭터다.
만약 저 영화 속 세계가 실재한다면 내가 주인공일 리 없다는 일종의 염세적인 확신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가운데 있기 보다는 그 주변부를 맴도는 평범한 누군가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특히 스릴러나 액션물일 수록 주인공을 돕는 선한 조연이 나오면 벌써부터 마음이 불안해진다. 장르 특성상 주인공을 둘러싼 상황이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선한 조연은 대개 주인공을 고립시키거나 긴장을 극대화하기 위해 희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대표작 중 하나인 <39계단>에서 누명을 쓰고 지명수배 된 해니(도널드 로버트)는 요원들에게 쫓기던 와중에 한 시골 농가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농가의 주인은 해니의 도시적인 차림새와 어딘지 불안한 표정을 의심하지만, 농부의 아내는 거칠고 권위적인 남편과 달리 신사적인 해니에게 호감을 갖는다. 해니를 잡으러 온 요원들이 농가까지 오자 아내는 해니가 몰래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해니가 뒷문으로 도망친 뒤 이를 눈치 챈 남편은 아내의 뺨을 때리고, 남편의 손찌검에 무너지며 그녀는 장면전환과 함께 영원히 극에서 퇴장한다.
영화 <39계단>의 스텝롤이 올라갈 때까지 내가 기다리던 건 해니가 모든 오해에서 벗어나 음모의 전말을 밝히는 장면이 아니었다. 정말 궁금했던 이야기는 그게 아니라 농부 아내의 뒷일이었다. 해니가 농가에서 도망친 후 그 아내는 어떻게 됐을까. 도시를 동경하며 해니를 도와준 그녀는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빠져나왔을까. 아니면 여전히 권위에 눌려 순종하며 지루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까. 혹시 해코지라도 당한 건 아닌지. 퇴장할 때 상황이 워낙 최악이었으니 걱정이 되는데, 놀랍게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가 끝나고도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개 이런 캐릭터가 그렇듯 그녀는 관객이 궁금한 이야기의 본론이 아니다. 영화가 부여한 그녀의 인생에 좀 더 긴 희로애락이 존재했다면 애초에 주인공이 되었지, 이름도 없는 ‘농부 아내’가 아니었다. 이런 캐릭터를 만나면 영화가 좋은 결말로 끝나도 한동안 찝찝하다. 인생이 한 편의 영화와 같다면, 아마 나 역시 주인공이 아니라 그 주변을 맴도는 평범한 누군가 중 한 명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