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녀 Dec 03. 2018

돈이 많다면 친절한 사람들만 만나고 싶다

소비의 일기 1. 카카오 블랙

밤 열한시. 적막한 사무실에 남아 늦게까지 일을 한다. 더 이상 배가 고프지도, 졸립지도 않고 그저 머릿속이 텅 빈 것 같다. 눈꼬리가 빳빳하다. 열 두 시간 넘게 모니터만 바라봤는데, 다시 출근해서 이 모니터와 마주하기까지 열 두 시간도 남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일했는데도 어째서 산적한 업무는 사라질 생각을 안할까. 이제 틀렸다는 기분이 든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압력을 살짝 낮추기만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모니터를 끄고 사무실을 나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카카오T 어플을 켠다. 회사에서 대신 내주는 야근 교통비를 믿고 자신있게 블랙 택시를 잡는다. 월드컵 시즌 때를 빼고 블랙 택시를 이 시간에 못잡아 본 적은 한번도 없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택시가 근처에 도착한다. 꽤 어둑시근한 밤인데도 매끄러운 검은색을 뽐내며 눈 앞으로 다가오는 택시와 눈이 마주친다. 행선지는 이미 어플에 등록했으니 기사님에게 하는 첫마디는 “안녕하세요”가 전부다. 그 인사를 끝으로 내릴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편하다. 차종은 잘 모르지만 일반 택시와는 달리 좌석이 편한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 원하지 않으면 기사님이 굳이 얘기를 건네지 않는다. 할 말이 없는 건 물론이고 피곤해서 맞장구조차 칠 기분이 아닐 때, 그럼에도 나는 택시를 탔을 때 “조용히 가고 싶어요”라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면 어떨 땐 내가 동의하지 않는 기사님의 정치나 사회에 대한 장광설까지 듣게 되지만 그럴 때조차 나는 속없이 웃을 뿐 내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 길어봤자 삼십분, 곧 헤어질 인연에 굳이 낯을 붉힐 필요가 있을까 싶고. 또 그렇게 됐을 때 택시비를 계산하는 순간까지 치러야 할 어색함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다. 단지 택시를 탔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감정을 소모했을 때 나중에 찾아올 허무함과 자책감도 감당할 수 없다.

게다가 일반 택시를 타기 전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거나 감당해야 할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기사님이 불친절한 사람일 수도 있고, 끼어드는 차가 있으면 단 둘이 있는 공간에서 벌컥 욕지거리를 하는 성정일 수도 있고 길을 돌아가거나 가는 길이 어렵다며 툴툴 대면서도 네비게이션은 켜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걱정이 카카오 블랙을 선택하면 사라진다. 서비스 자체가 일반 택시에서 겪을 불편함을 지양하는 것이 모토일 수도 있지만 그런 모토조차 결국 일반 택시요금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지불한다는 걸 전제로 하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차로 삼십분 거리를 가는 데 삼, 사만원을 내야만 누릴 수 있는 이 배려는 너무 단순하기에 편리하면서도 어쩐지 서글프다. 일반적인 수준 이상의 금액을 지불할 수 있는 공간에서의 친절과 배려는 나같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동경하거나 냉소하려는 건 아니지만, 가끔 이렇게 몸과 마음을 편하게 싣고 택시를 탈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다. 돈이 많다면 나도 친절한 사람들만 만나고 싶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