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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녀 Dec 03. 2017

고상한 취미라도 강요하지 말라

[영화식사 008] 사랑을 위하여Dying young, 1991

넘쳐도 모자른 사랑에도 서로를 강요하지 않는 담백함이 필요할 때. 영화식사 여덟번째 레시피, 닭가슴살 야채구이 샐러드

"진추하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현수(권상우)가 은주(한가인)와 동네 빵집에 앉았을 때 진추하가 부른 'One summer night'이 들리자 현수가 중얼거린다. 은주는 그 말을 듣지 못했지만 현수는 굳이 지금 나오는 노래가 뭔지 은주에게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서로 어색한 와중에 현수가 조심스럽게 이끌어가는 대화가 재미있다.


"저번에 보니까 음악 좋아하는 것 같던데. 라디오 무슨 프로 많이 들어요?"

"음...서금옥의 <이브의 연가>요."

"어! 나도 그거 듣는데."

"저 거기 엽서도 몇 번 보내봤어요. 근데 한 번도 안 틀어주더라구요."


라디오 청취에 도가 튼 현수는 은주에게 엽서가 뽑히는 방법 등을 알려주고 이 빵집 만남은 두 사람이 좀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은주가 라디오에 취미가 없었다면 이날 만남은 어떻게 기억됐을까.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취미가 같으면 좋겠"다는 어느 노랫말처럼, 사랑을 시작할 때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취미가 있는지의 여부는 생각보다 꽤 중요할지도 모른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시한부 연인을 그린 영화 <사랑을 위하여>는 병약한 생활이 만성이 된 소심한 빅터(캠벨 스코트)가 자유분방한 성격의 간병인 힐러리(줄리아 로버츠)를 만나 점점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내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 영화의 장면은 따로 있다.


오랜 투병으로 예민한 성격인 빅터는 간병인 힐러리에게도 서툰 화법을 구사한다. 그가 나름대로 힐러리와 소통하고자 시도한 것 중 하나가 명화 보여주기다. 그는 힐러리를 자신의 암실로 초대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클림트의 작품들을 보여주며 그림의 배경과 가치 등을 하나하나 설명한다. 하지만 빅터가 가장 열정적으로 떠드는 그 시간이 힐러리에겐 가장 지루한 시간이다. 결국 힐러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성질을 내버리고 빅터는 당황한다.


클림트의 ‘키스’가 얼마나 아름답고 뜨거운 감정을 그리고 있는지 힐러리는 알고 싶지 않다. 또한 빅터가 왜 클림트를 가장 좋아하는지도 알고 싶지 않다. 나의 취미를 누군가에게 강요해본 적 있는가? 가까운 형제 혹은 친구, 아니면 애인에게라도. 빅터처럼 고상하진 않아도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를 누군가가 함께 좋아해주기를 강요한 적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거부당했을 때의 씁쓸함도 느낀 적이 있다면 이 영화에서 억지로 클림트 작품을 봐야했던 힐러리를 눈 여겨 봐야 한다. 서로 맞지 않는 취미를 강요하는 일은 관심없는 화제를 들어주는 상대방에게도 지루한 시간이고, 그런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며 얘기하는 입장에서도 참 긴장되고 서운할 수밖에 없어서다.

때때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애인에게 들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가 그 음악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충동이 들 때마다, 힐러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생각한다. 설령 고상한 취미일지라도 강요하지 말자고.


<영화식사> 여덟번째 레시피,

닭가슴살 야채구이 샐러드.

파프리카, 방울토마토, 양배추 등 기호에 맞는 야채에 살짝 간을 한 후 볶거나 굽는다.

따로 삶아 간한 체로 구운 닭가슴살과 함께 기름에 둘러 볶은 후 로즈마리를 얹으면(생략가능)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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