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식사 007 ] 프랑켄위니Frankenweenie, 2012
"그 영화에서 동물 죽어?"
누구나 꺼리는 영화가 있다. 피가 나오는 영화, 우울한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내 경우 동물이 죽는 영화는 되도록 보지 않는 편이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동물이 죽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스트레스를 견뎌야 한다면 사양하고 싶다. 어디까지나 허구인 걸 알면서도 그냥 그 장면만큼은 스크린으로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기대하던 영화가 개봉하면 가장 먼저 따지는 일은 '동물이 죽는가?'다. 그 영화가 잔인한지 혹은 재미있는지 묻는 사람은 많아도 동물이 죽는 장면이 나오는지 물어보는 사람은 적은지라 거의 알 수 없는 상태로 영화를 봐야 한다. 적어도 영화에선 동물이 학대받지 않고 행복하고 당당하게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마치 헐리웃 블록버스터에서 아이들은 죽지 않듯이.
요즘 '펫로스 증후군'이란 단어가 심심찮게 들린다. 키우던 반려동물이 죽은 후 주인이 겪는 정신적 고통으로, 우울증과 대인기피, 슬픔 등에 시달리는 현상이다. 우리나라에 반려동물 붐이 2000년대 초반쯤 흥했으니 그때부터 기르기 시작했다고 하면 대개의 반려동물 수명 상 지금이 노화와 죽음을 맞이할 시기다. 이에 따라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사람들의 슬픔이 펫로스 증후군이란 말로 조명되고 있다. 심하면 자살에 이를 정도라니, 그 고통의 총량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은 반려동물을 떠나보낼 수 없는 심정을 그려낸 팀버튼 감독의 <프랑켄위니>(2012)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메리 셀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적절히 오마주했다. 과학을 좋아하고, 그보다 자신의 애견 스파키를 더 사랑하는 소년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어느 날 사고로 스파키를 잃는다. 크나 큰 우울과 슬픔의 나날을 보내던 빅터는 과학실험에서 영감을 얻어 스파키의 시체에 전기충격을 가해 스파키를 되살린다. 다시 살아난 스파키는 비록 심하게 움직이면 꼬리가 떨어지거나 물을 마셔도 몸에 난 구멍으로 물이 새어나오는 등 정상적인 개와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여전히 빅터를 사랑하는 애견이다. 하지만 빅터가 죽은 동물을 살려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학급 친구들이 과학대회 우승을 위해 빅터의 실험일지를 모방하게 되고, 이로 인해 마을은 큰 위험에 빠진다.
팀 버튼 세계의 매력 중 하나는 아이들의 욕망이 결코 어른만큼이나 순수하지 않다는 걸 일관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는 로알드 달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찰리와 초콜릿 공장>(2005)에서도 반복된다. 아이들은 이미 어른들의 욕망을 체화했거나, 선천적으로 잔인하고 폭력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 물론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이 무능력자들이다.
그럼에도 빅터의 마음은 이러한 욕망의 소용돌이에서 멀찍이 물러나 있다. 빅터가 스파키를 다시 살려낸 이유는 과학대회에서 상을 받기 위해서도, 실험에 대한 흥미 때문도 아니다. 단지 스파키가 보고 싶어서다. 스파키를 잃었을 때 슬퍼하는 빅터에게 그의 부모가 "스파키는 네 마음 깊은 곳에 영원히 사는 거란다"고 말하자 빅터는 "그냥 스파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이미 이승에서의 삶을 다 한 생명을 주인의 욕심으로 다시 불러내는 게 과연 천륜적으로 옳은 것인가를 묻는 일은 의미가 없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할 수만 있다면 옆에서 그 체온을 느끼고 싶은 게 가족의 마음이니까.
팀 버튼이 본인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프랑켄위니>에서, 결국 떠난 이는 떠나보내야 한다는 동화적 교훈을 거부한 이유는 그가 빅터의 심정을 누구보다 절절히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직은 보낼 수 없어. 기회가 된다면 몇 번이라도. 적어도 영화 속에서만큼은 빅터와 스파키의 영원한 삶을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