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식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녀 Mar 05. 2016

내가 당신을 본다는 것

[ 영화식사 001] '캐롤' Carol, 2016


테레즈는 기차 안에서 왜 울었을까.


처음 캐롤의 초대를 받았던 그 날 남편의 방문으로 인해 예민해진 캐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기차 안에서 테레즈는 왈칵 눈물을 터뜨린다. 테레즈는 왜 울었을까.


그녀가 기대했던 만남이 예상치 못한 일로 엉망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어색하고 불편했던 마음이 서운함으로 번지고 뜻밖에 외로움을 느껴 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후 테레즈는 캐롤의 다시 만나자는 제안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인다. 그녀가 첫 만남에 실망하고 외로웠다면 왜 캐롤을 다시 만나려했을까. 어쩌면 그녀가 운 이유는 그게 다가 아닐 수도 있다.  


내가 당신을 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치의 가감도 없이, 나의 의지로 변형하거나 조율하는 협상의 과정도 없이 당신 그 자체를 받아들인다는 건 고통을 동반한다. 처음 백화점 계산대에서 만난 고상하고 여유롭던 모습과 달리 남편과 함께 있을 때 캐롤은 신경질적이고 복잡한 사람이었다. 테레즈는 이런 캐롤의 맨 몸을 그대로 가슴에 받아들인다. 기대했던 규격에 맞지 않아도, 그녀가 그토록 진저리치는 과거의 내력을 다 알 수 없어도 테레즈는 이미 자신이 캐롤에게 끌리고 있음을 받아들인다.


고되지만 숭고한 의식을 치른 그녀는 이제 눈물을 흘린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 당신을 나의 연인으로서 가슴에 집어넣을 때 당신은 마네킹 거푸집처럼 틀에 맞는 사람이 아니다. 내 몸에 금이 갈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의 시작은 때때로 고통스럽다.



영화 이론에서 ‘응시’는 종종 관객의 눈을 대리한 캐릭터의 시선으로서 피사체를 타자화하는 기능을 하지만 <캐롤>에서 테레즈의 응시는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을 가까이 끌어당긴다. 테레즈는 캐롤을 바라본다. 마치 각막에 차분하게 내려앉듯 캐롤을 그녀의 시선에 밀착시킨다. 이러한 ‘응시’를 상징하는 테레즈의 카메라는 자꾸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가려는 캐롤을 붙들어 맨다.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은 캐롤이었지만 그녀가 번민하고 도망치는 와중에도 끝까지 그녀를 놓지 않은 테레즈의 마음을 이러한 응시가 대신 보여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후반부에 들어서면 테레즈의 시선을 좀 더 집요하게 좇아야 한다. 친구들의 파티에 도착한 테레즈는 한명, 한명을 바라본다. 다른 여자와 춤을 추는 전 애인과 눈이 마주친다. 아무런 여운도 남지 않는다. 뒤를 돌아 한때 가까웠던, 어쩌면 잘 될 가능성이 있던 남자를 바라본다. 그는 다른 여자와 영화를 보느라 테레즈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다시 뒤를 돌아 나온다. 슬그머니 시선이 마주친 여자와 대화를 해 본다. 그조차 만족하지 못했다는 듯 테레즈는 주저 없이 건물을 빠져나온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 캐롤을 담기 위해.



호텔에 도착한 테레즈가 캐롤에게 다가가기까지. 제발 캐롤이 그녀를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이 어디 테레즈 뿐이었을까. 우리는 테레즈가 캐롤을 만나 무슨 말을 할지, 어떤 대답을 내릴지 알 수 없는데도 두 사람이 마침내 서로 마주보기를 바란다. 사랑을 다룬 영화임에도 <캐롤>이 사랑의 시작과 끝을 굳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두 사람이 마주 봤을 때 언제든지 사랑이 따뜻한 불을 지피리란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캐롤이 테레즈를 발견했을 때 영화는 끝난다. 그 후의 일은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나는 이제 당신을 바라본다. 내가 바라보는 행위가 사랑이며 눈앞에 선 사람이 사랑하는 자임을 알게 되는 순간은 얼마나 가슴 벅찬 기쁨을 주는가. 그 사람이 나를 볼 때까지 기다리는 그 떨림을 이 세상 말로 표현해야만 하기에 괴롭기까지 한, <캐롤>은 그런 영화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상한 취미라도 강요하지 말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