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식사 005 ] 인사이드 르윈Inside Llewyn Davis
최영미 시인이 한 호텔에 장기투숙을 하는 대신 투숙비로 시 낭송회 및 홍보 등을 제안했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공개적으로 올렸다가 많은 비난 세례를 받았다. 그 제안이 참 황당하다는 생각을 했다가, 어느 날 인터넷 뉴스에서 어떤 시인이 굶어죽었다는 기사를 보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지하 단칸방에서 굶어 죽은 어느 작가의 단신 보도가 스쳐 지나간 점도 한몫했다.
시인을 비판하는 다양한 관점 중 어느 것은 유효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돈벌이가 쉬운 줄 아느냐는 말엔 숨이 턱 막혔다. 그 거친 문장에선 임금을 받으려면 몸과 시간을 노동에 투신하는 것도 모자라 어쩌면 자아까지 바쳐야 할 것 같은 비장함이 느껴졌다.
임금노동이 삶의 윤리로 자리 잡은 세상에서 화폐 단위로 환산하기 어려운 노동은 긍지를 얻지 못한다. 영화 <인사이드 르윈>에서 르윈이 오디션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나선 여정은 보는 사람마저 피로해질 지경인데, 그 고단한 과정 끝에 혼신을 다해 부른 노래는 결국 탈락하고 르윈이 투여한 모든 육체적, 정신적 고생담은 화폐 환산에 실패한다. 그래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예술가로서의 긍지를 느꼈다는 낭만이라도 건져줄 법하건만, 그조차 허락해주지 않는 영화에 나는 르윈처럼 섭섭할 뿐이었다.
르윈이 재능이 없다거나. 덜 노력하고 덜 타협해서 그의 노래가 화폐 가치를 얻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는 걸까. 그를 위로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단지 르윈이 사는 세상이 모든 종류의 절실함과 성실함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든다. 르윈이 실제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전 애인이 희생해가며 만들어준 무대. 혹은 전 애인의 연인이 소개해준 자리인데, 이 모든 것은 르윈의 자존심을 괴롭힐뿐더러 그 자존심은 전혀 돈이 되지 않는다.
뭔가를 포기하거나 반대로 투신해야 보상이 돌아온다는 신화는 화폐 환산이 가능한 세계에 복무했을 때의 가능성일 뿐, 애초에 개인의 열정이나 간절함의 크기는 전제 조건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인사이드 르윈>은 그런 세상에 사는 르윈의 내면(Inside Llewyn)이 겪는 여정을 보여준다.
또 다시 최영미 시인을 생각한다. 가상공간의 팔로워가 많다는 이유로, 미디어에 노출됐다는 이유만으로도 돈이 되는 세상에서 최영미 시인이 자신의 낭송회로 호텔 투숙비를 교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이유는 뭘까. 유명세도 돈이 되는 세상이지만 여성과 약자를 혐오하고 동물을 학대하며 유명해진 콘텐츠가 돈이 되기에 타당하다고 믿고 싶지 않다. 적어도 그런 성실함보다는 어느 예술가의 자존심이 돈이 되는 세상이 낫다는 생각, 누군가도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