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을 모아둔 빨래, 바닥 구석구석 나뒹구는 머리카락, 주말은 그런 것들과 시간을 보낸다. 여느 집에 사는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빨래를 널고 창문을 열어 차갑지만 깨끗한 공기가 집안으로 들어오게 신경 쓴다.
바닥을 치운다. 발에 밟히는, 걸리적거리는 것들이 없도록, 곧바로 침대에 올라가도 괜찮은 발바닥을 지니기 위해서.
해가 지면 월요일에 뭘 입을지 미리 옷방을 뒤적거린다. 단풍이 지기 전에 눈이 내린 올해의 겨울 이 몸에 익지 않는다.
긴 팔 니트를 주섬주섬 수납 주머니에서 꺼낸다. 또 퀴퀴한 냄새가 났다. 작년에 분명히 세탁을 마치고 고이 접어 보관한 옷인데 왜 어떤 옷에서는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피는지 모르겠다. 가난한 집의 곰팡이는 값비싼 섬유를 알아보고 들러붙어 좀먹는지도 모르겠다.
방금 막 세탁을 마친 세탁기에 니트를 두어 점 넣어 전원 버튼을 누른다. 내일 입지는 못할 것이다. 청소, 빨래, 그리고 또 빨래를 하려니 기운이 달린다. 빨래와 빨래 사이에 미쳐 세탁기에 넣지 못한 퀴퀴한 녀석을 하나 찾아 손빨래를 하느라 아픈 손목에는 애꿎은 나이 탓을 했다.
저녁밥을 먹어야겠다.
고심해서 고른 따뜻한 밥 한 끼를 주문하고, 지친 허리를 침대에 뉘어 한 끼를 기다렸다. 살얼음을 띄운 물회를 시키면 다 녹아 육수가 늘어지게 도착하는, 따끈한 피자의 치즈가 다 식어 굳어 도착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오늘은 덜 식은 밥을 기다려본다. 천 원을 아끼지 않으면 그만큼 더 따듯할지 모르니, 배달비도 아끼지 않는다. 여럿이 식당에 몰려가면 적당한 메뉴를 고르는 편이니, 혼자만의 식탁을 맞이하며 먹고 싶은 것을 온전히 나를 위해 고른다.
음식이 거의 다 도착했다는 알림과는 다르게 기사님은 다른 곳을 헤매고 있었다. 배달 기사에게 전화할 방법이 없는지, 이제 나는 나이가 든 디지털 시니어에 접어든 것인지, 기사님이 잘못 든 길을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다가 맞는 길을 찾아 들어오다 말고, 또 다른 길에서 잠시 헤맨 것을 답답하게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집 근처에 도착한 것을 보고 골목길을 마중 나가니 이미 언짢아 몇 마디를 쏟아부을 준비를 한 그가 보인다.
식어가는 밥을 받아 들고 몇 마디 듣는다. 잘잘못을 따질 일이라면 따져도 내가 따질 일인데, 이 사람은 왜 나를 탓하고 있는가? ‘밥이 얼마나 식었을까? 식었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진상 부리는 사람도 있다던데’
“아이, 진짜. 여기 길 하나밖에 없어요? 이렇게 하시면 안 돼요. 네비대로 왔는데 엉뚱한 길이 나오네. 봐봐요, 네비 찍고 오면 이 길이, 어디야, 여기가? 이렇게 하면 안 돼요. 네비대로 찍고 오지 말라고 써 놓으세요. 아니 내가 뭐라 하는 게 아니고.”
나는 기사님께 딱히 미안하지 않다. 주소는 제대로 입력되어 있고, 길을 못 찾은 건 그였지, 내가 무언가를 잘못하여 그가 길을 못 찾게 만든 게 아니지 않은가?
차에서, 오토바이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는 길이 늘상 미안했다. 없는 엘리베이터가 늘 맘에 걸렸다. 그런데 배달 기사가 길을 못 찾은 건, 이 집에 사는 내 탓이 아닌 것 같다. 열기를 잃은 보냉팩을 들고 골목길에 서서 타인의 짜증을 받아주고 있자니 골목길 들어오는 수고라도 덜어주고 싶었던 마음이 한심하기 그지없다.
“이봐요, 네비대로 찍으니까, 다른 길 안내가 나오잖아요. 이러면 길 못 찾아와요.” “다른 기사님들은 다 잘 찾아오시던데요?”
혼자 사는 여자의 집 주소까지 아는 낯선 이를 도발하지 않으려, 하고 싶은 말의 1%만 퉁명스레 내뱉었다.
“그 기사님들은 길을 잘 아는 기사님들이고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사과하면 안 된다-
해당 입력값은 회사에서 벌어먹고 사는 수년 동안 쌓였다. 잘못한 게 없는데 어물쩍 넘어가려 사과하면 되려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누구든 잘잘못을 따져야만 하는 사람은 ‘그 한 마디’ 잘못 뱉은 사람을 신나게 물어뜯는다. 상황을 신속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한 수 접겠다고 섣불리 ‘죄송합니다’를 시전 한다고 해서 모두가 ‘다음부터 그러지 마세요’ 하며 물러서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함부로 사과하는 건 다방면으로 불리하다.
회사에서 쌓인 그 누적값이 생뚱맞게 회사 밖에서 발동 걸렸다. 어디 한 번 따져볼까?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고작 ‘나는 실수한 게 없다’는 티끌만 한 결백을 위해서? 당신의 주장은 틀리고 내가 옳았다는 알량한 승리에 도취되기 위해서? 골목길을 손수 내려온 마음보다 더 한심하다.
“하여튼 간에, 내가 뭐라 하는 게 아니고.” “네, 알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음식처럼 식은 인사로 기사님을 돌려보낸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대문은 단단히 잠그고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다 확인한 후에야 현관문을 열었다.
솥밥의 열기는 수증기로 이미 식어 노른자가 밥알 위에서 따로 놀았다. 생선살도 관자도 미적지근하여 조금 비릿했다. 밥은 식어 미지근하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니, 기분 좋게 식사를 하려고 애쓴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 ‘아이고 그러셨어요? 너무 수고하셨어요. 네, 죄송합니다. 조심해서 가세요!’라는 말 몇 마디면 덜 식은 한 끼를 마주했을지도 모른다.
더부룩한 식사를 마치고도 그대로 식탁에 앉아 그 값을 입력해 준 사람들을 기억나는 대로 돌이켜 보았다.
다신 마주할 필요가 없어진 사람들, 여전히 마주해야 하는 불편한 수고스러움을 간직한 채 같은 공간에 하루 최소 8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 많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을 만나기 전의 나는 이제 없는 것 같았다. 별생각 없이 무심코 뱉은 말, 숨기지 못한 비난의 낯빛, 그런 무례들을 웃어넘겼으나 맘에 담아둔 내가 차곡차곡 쌓은 지식이 그들의 얼굴을 하고 누적값이 되어 나의 일부가 되었다.
어쩐지 속이 부글대는 것 같아 한 끼만으로 잔뜩 쌓이는 포장용기를 마당으로 치워버렸다.
‘안 먹고 말지, 배달은 왜 시켰을까?’
당분간 배달 음식은 시키지 않으려 어플을 지워버렸다.작은 토트백 대신 수납이 자유로운 백팩으로 내일의 소지품을 옮겼다.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짜장라면이나 한 팩 등에 지고 돌아올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