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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M삼min Nov 01. 2024

남은 것으로, 남은 사람들이 살아간다.

계절이 바뀌면 비로소 아쉬운, 낡고 편했던 것

 십 년 전에 백화점 세일 코너에서 득템 한 부츠를 몇 해 잘 신다가,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부츠가 유행하며 잘 신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지하철에 앉아 빤히 신발을 쳐다보는 이 앞에서 부끄럽다가도, 찬찬히 살펴보면 아직 비 오는 겨울에 막 신기 좋은, 아직은 버리기 아까운 낡고 편한 온전한 내 것이었다.

 에이 두어 번만 더 신고 버려야지, 어차피 비 오는 날 막 신으려면 적당히 낡은 게 낫지 않나, 하다가 결국 버리지 못하고 이 9평 반까지 싸들고 왔다. 그리고 긴 장마를 버티며  녀석은 여기저기 또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버릴까?'

여기까지 가져온 게 아까워 유분 크림으로 쓱쓱 부츠를 닦았다. 금방 없어진다. 통풍 잘 되는 곳에서 잘 건조시켜 올 가을 겨울에 신자.

 '아뿔싸'


 하루 왕복 40분이 넘도록 언덕과 비탈진 길을 오르내리느라 종아리가 두꺼워졌다. 지퍼가 올라가지 않는다. 숨통이 꽉 막힌 종아리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인지, 이  부츠가 이제 그만 보내달라고 한숨을 쉬는 것인지, 여기에 몸을 맞춰 하루를 보내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다.

 '살 빼고 신을까? 누구 줄까?'

 내 눈에 아직은 괜찮은 것도 요즘 사람들의 눈에는 지지리도 궁상맞은 것이다. 이제 나처럼 닳고 닳을 때까지 물건을 쓰는 사람들을 찾기도 힘들다. 내가 가진 물건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니 이건 나에게만 쓸모가 있다.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저기 저 시베리아에 사는 발이 시린 예까타리나도 '거지세요?'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버린다. 정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이 진작에 알려준 것이다.



 나는 왜인지 물건의 쓰임을 다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데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래서 꾸역꾸역 이고 지고 살았다. 곰팡이가 피는 것도 모르고 여기저기 쌓아놓고 지냈다.

 다 갖다 버릴까, 있는 것 중 자주 쓰는 것만 남기고 모조리 처분할까? 나중에 요긴하게 쓸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은 너무도 무모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집에 사는 동안 내 종아리 사이즈는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버리자!

한 번 세탁에 보풀이 다 일은 낡은 후드티도 버리자, 목이 죄니까.

 이제 지구상에서 낡디 낡은 무언가를 버리는데 한참을 고민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구멍 나고 목이 늘어난 부들부들한 반팔 티셔츠는 여름철 잠옷으로 티 없이 맞춤하다. 그래도 누군가 본다면 아마 한 마디쯤은 했을 것이다.

 다 갖다 버린다는 마음으로 한 껏 정리를 한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을 보내고 새 계절을 맞이하면 늘 후회한다.

 '도대체 이딴 건 왜 안 버리고 멀쩡한 그걸 버렸지?"

 어쩌면 이제는 이런 후회를 하는 사람도 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종량제 봉투 20리터를 가득 채웠다. 몇 주간 모은 생활 쓰레기, 여름부터 냉동실을 차지한 자두 씨앗, 이젠 과감히 버리기로 한 부츠와 후드티를 차곡차곡 쌓아 여몄다. 출근길에 미리 골목 어귀에 내다 놓았다. 오늘 저녁쯤엔 새 부츠도 올 것이다.


 

 점심 예약이 어려운 식당에 상사가 늦게라도 대기 없이 중요한 손님과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대신 줄을 서 있었다. 희망퇴직 하지 않은 나를 괴롭히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려 해, 연신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새로 나온 부츠를 구경했다. 그냥 돈 받고 나가서 이 부츠나 하나 지를걸 그랬나? 꾸준히 아침이면 일어나 수용소 같은 회사에 나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 나를 위해 하나쯤 선물해 줄 걸 그랬다.

 30여분 기다리니 느긋이 아무렇지도 않은 상사가 손님과 함께 내려왔다. 줄을 비켜서며 애써 넉살 좋은 소리를 늘어놓고 자리를 떠났다. 내가 대기줄에서 벗어날 때 유난히 조용했던 뒷사람을 쳐다없었다.

 그때 봐둔 부츠의 모조품을 샀다.



  집에 돌아오니 종량제 봉투가 아직 골목 어귀에 있다. 도로 가져가서 부츠만 빼고 다시 내다 놓을까? 막상 수거해 가지 않은 봉투를 보고 흔들린다.

 대문 앞에 놓인 택배 박스를 뜯어 새 신을 들여다보고 신어 본다. 육만 원 대 부츠가 소가죽일리 없지만, 소가죽이라고 언급된 제품 상세설명과는 거리가 먼, 가짜 가죽의 냄새가 풍긴다. 부츠는 조잡하고 한 해나 제대로 신을는지 모르겠다. 밑 창이 닳기도 전에 하필이면 눈에 잘 띄는 부분  합성가죽이 벗겨져 신지 못하게 될 생김새다.

 '종량제 봉투 도로 가져올까?'


 터덜 터덜 계단을 오르는 무거운 발소리가 울렸다. 부스럭부스럭, 부츠를 수거해 간다.

 나는 또 늦었다.



 용기 있는 결단을 보여준 옛 동료들이 잘 지내는지 카카오톡을 들여다보았다.

바닷가에서, 낯선 곳에서, 그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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