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이를 지나쳐 간다. 아쉽다. 빠이에서 며칠 지낼 생각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길에서 허비했으므로, 그저 풍요로운 치앙마이로 돌아간다. 나는 라오스로 이동하기 전 며칠을 치앙마이에서 보냈다. 풍요롭다. 치앙마이는 풍요롭다. 며칠 동안 쉬지도 먹지도 못한 내 육신과, 허기진 배를 채우기 딱 좋은 장소이다. 아무 생각 없이 나는 며칠만 먹고, 자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치앙마이 터미널에 버스가 멈췄다. 오후 3시를 훌쩍 넘겼다.
빨간 썽태우를 붙잡고 흥정을 시도했다. 님만해민까지 50바트. 나쁘지 않으니 일단 타고 본다. 현금부터 뽑고, 멋진 숙소를 잡을 것이다.
님만해민의 예쁘다는 거리와 카페, 그 주변의 멋진 숙소에 잔뜩 들떠 도착하자마자 ATM부터 찾았다. 드디어 손에 현금이 들어왔다. 드디어, 단백질도 보충할 수 있다. 당장 제대로 된 식당에 가서 밥부터 먹어야겠다. 힘을 보충하고 멋진 숙소를 찾아 이 골목 저 골목 누벼야 할 테니까.
현금 지급기 화면에 내 모습이 비쳤다. 거울을 본지 아주 오래되었다. 얼굴엔 기름이 흐르고 머리는 찰지게 달라붙었다. 그런데도 왜인지 옆머리는 사자처럼 휘날리고 있다. 전혀 친구 삼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겉모습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즐비한 식당엔 왜인지 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근처를 걷다가 국수나 볶음밥을 파는 노점이 나오면 일단 뭐든지 사 먹기로 하고 큰 도로를 따라 길을 걸었다. 예쁜 맥시 드레스를 색색깔로 차려입은 새하얀 여자들이 지나가며 나를 힐끔 보더니 저들끼리 떠들었다.
-혼자 왔나 봐-
응, 나 혼자 왔고 밥도 혼자 먹고 이따가 맥주도 혼자 마실 거야 이것들아.
쪽수가 밀리니, 그냥 못 알아들은 척 가던 길을 간다. 생각보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신기해하는 사람들도 아직 많다. 나쁜 뜻은 없었을 것이다.
큰 길가에 영업 중인지 아닌지 손님이 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식당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았다.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들이 꽤나 경계의 눈으로 띠껍게 바라본다. 나한테 냄새나나? 식탁에 놓인 메뉴판을 펼쳤다. 메뉴판이 전부 한자다. 이거 원 뭘 먹어야 하나, 고민하는 게 보이는지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사진을 가리켰다.
어묵이 들어있는 라면으로 보이는 국수 사진을 가리키며 얼마냐고 물었다.
-쌈씹 밧-
삼십은 태국어로도 삼십이다. 천 원. 역시 치앙마이는 풍요롭다. 한 그릇 달라고 하자 주인장이 곧바로 키친으로 나누어 놓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조금 기다리자 금방 뜨끈뜨끈한 라면이 한 그릇 나온다. 어묵이 아니라 아주 얇은 피로 빚은 중국식 만두였다. 국물을 한 술 뜨자 달짝지근하면서도 짭쪼름한 태국 국수 특유의 국물 맛이 진하게 퍼진다. 또 한 술 떴다. 땀이 호로록 떨어진다. 만두를 집어 든다. 속은 새우맛이다. 이러니 치앙마이를 안 좋아할래야 안 좋아할 수가 없다. 면발을 집었다. 꼬들꼬들한 탄력이 잡힌다. 꾸덕한 땀 덩어리가 되어 한 그릇을 홀라당 비운다. 맘 같아서는 한 그릇 더 먹고 싶지만 아니다. 씻고 나와서 두 번째 저녁을 먹자. Chang도 마시자.
국숫집을 나와 게스트하우스가 즐비한 골목을 기웃거렸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마당이 예쁜 게스트 하우스들이 늘어섰다. 몇 걸음 걸을 때마다 예쁘게 차려입고 사진 찍는 사람들을 기다려 주거나 돌아가야 했다.
여긴 내가 누울 자리가 아닌가. 거대한 고급 호텔, 아기자기하지만 호텔만큼 비싼 게스트 하우스. 이 골목 저 골목 이제 슬슬 배낭이 무겁다 싶을 때까지 싸돌아 다녔으나 마땅한 숙소를 찾을 수 없었다. 왜인지 언제나 너무 화려하고 너무 깨끗한 곳은 싫다. 내가 더럽히는 게 미안한 맘이 들어 불편하다. 마당에 예쁜 라탄 그네가 있는 작고 적당히 낡은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가 가격을 물었다. 하루 숙박비 1100 바트, 3만 5천 원 정도.
-미안, 나한텐 비싸다-
라고 말하고 아기자기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카페 같은 게스트 하우스를 나왔다.
며칠간 라오스에서의 생활방식이 아직도 남은 것이다. 좋은 숙소에 가서 푹 쉬겠다더니, 그 정도 숙박비는 좀 아까웠던 모양이다. 적정선은 2만 원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른 골목의 숙소를 찾아 모퉁이를 돌았다.
찰칵.
아까 본 형형색색의 맥시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들이 카페 앞 빨간 돼지 장식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까는 없었던 챙이 큰 밀짚모자를 쓰고 있다. 나는 땀을 줄줄 흘리고 있으며 빨래하다가 이염된 코끼리 바지에, 신발은 끈이 떨어지기 일보직전이다. 발바닥은 하얀 타일이 깔린 샤워장에 들여놓기 민망할 정도로 시커멀 것이다. 그런데 그녀들은 땀 한 방울 흘리지도 않고 냄새도 좋다. 나도 여행 중 며칠은 저런 모습이면 좋았을걸.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가 아무거나 하나 시킨 뒤 와이파이를 켰다. 해가 지기 전에 숙소부터 찾아야 한다. 호텔 예약 사이트 몇 개를 뒤지며 이것저것 가격을 알아보다 시킨 아이스크림을 다 비웠다. 에어컨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흘린 땀은 도로 쏙 들어가고, 옷까지 바짝 말랐다. 남은 아이스크림 1/3을 비울 땐 기침이 났다. 또 다른 형형색색의 고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들이 우르르 가게로 들어왔다. 둘은 주문을 하러 가고 나머지 둘은 옆 테이블에 앉아 예쁜 조명 아래 열심히 방긋방긋 미소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그 사진들을 보다가 어둠이 내리깔린 그녀들의 옆 테이블에, 이상한 동양 여자가 심령사진처럼 찍혀있어 라며 사진을 지우는 일이 발생할 것만 같다.
배낭을 둘러 매고 밖으로 나갔다. 지나가던 썽태우 두 대를 놓치고 세 번째에 겨우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