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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M삼min Apr 15. 2024

9만 원씨의 냉소

레몬 스퀴저 그리고 초코파이

 "어머, 되게 오랜만이다!"

어제 볼 땐 쓸모가 없었는지 그냥 가버리더니 오늘은 내 쓸모가 기억났는지 아는 척이다. 저것은 꼭  필요할 때만 인사를 건네고 말을 건다. 저것만 보면 은 도금을 거쳐 바스락 거리는 종이에 잘 쌓여져 선물 상자에 기어 들어간 레몬 스퀴저가 떠오른다.

 이제 회사에는 나를 비운 부캐를 보내기로 했으니 억지로 타인의 좋은 면을 상기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냥 9만 원치의 일을 하니, 9만 원 밖의 일은 거추장스럽게 할 필요가 없어졌다.

 곧 바빠질 일정에 대해 묻더니 한숨을 쉬며 제 몸 바빠질 것을 걱정한다.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줬으니 자리를 뜬다. 냉소는 아무런 힘이 없으니 타인에게 친절하라고들 하던데, 어떤 이에게는 냉소가 딱 맞는 코스요리 같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차린 냉소의 맡김 차림을 저 레몬 스퀴저 같은 한 입, 한 모금 씹어 삼키는 걸 구경하고 싶다. 나에게는 생각보다 냉소가 잘 어울렸다. 나를 텅 비웠더니 나는 거울이 되었다. 받은 것을 다시 비추어 보여주는 용도의 나를 아주 잘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나를 갈아서 돌아가는 회사는 없다. 나를 갈아서 사심을 채우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일생을 조금 더 중요한 일을 하며 보내면 좋겠지만, 회사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니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나?


 중요하지 않은 일에 최선을 다했던 나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이었던가? 내 이름도 모르는 중역들이 겉치레의 인사를 던졌던 것뿐이다.

 "땡큐 미스 킴"

 레몬 스퀴저에 은 도금이 벗겨졌을 때는 한두 번 내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때 이 레몬 스퀴저를 구해다 준 사람이 누구였더라?'  미스터 알 마몬이 미스터 타헤르에게, 그리고 미스터 타헤르는 아부 사우드에게, 아부 사우드는 아부 무스타파에게 물어물어 추적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한 밤중에 걸려오는 국제 전화는 어쩌면 마이 디어 미스 킴, 네가 그때처럼 그 레몬 스퀴저를 DHL로 받아서 도금을 하고 이쁘게 포장해서 다시 보내 줄 수는 없을까? 따위의 멀리서 걸려온 제안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의도의 높은 층에 위치한 어느 식당, 나는 그 식당에 다시는 가지 못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갈 생각이 없다. 이게 다 그 식당에서 내놓은 최고급 은 도금을 거친 레몬 스퀴저 때문이다.


 "디스 이즈 쏘 나이스"

 미스터 타헤르가 식사를 하다 말고 레몬 스퀴저를 관찰했다. 연어 스테이크에 곁들일 레몬 조각을 짜낼 식기는 하나같이 은 도금을 해서 빛났다. 반짝거리는 걸 좋아하는 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사무실에 돌아오더니 무스타파가 날 불렀다. 나를 앉히더니 가족의 안부를 묻는다. 마치 저기 저 드넓은 영지 귀족 공작이 저택의 사용인을 구슬리는 모양새로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는지 묻더니 본론을 꺼냈다.

 "레몬 스퀴져가 얼마인지 알아 봐 줄 수 있겠나? 우리나라에서도 높은 사람들은 식기에 은 도금을 해서 쓰기도 한다네, 자네가 그걸 몇십 개쯤 사다가 은 도금이 되는 곳을 알아내서 처리해 줬으면 하는군"

 이러려고 비싼 밥을 먹였구나, 귀족 나리들이란!

 "네, 알겠습니다"

 레몬 스퀴저는 개당 몇 천 원, 문제는 경기도에 위치한 도금 공장이 적은 수의 식기는 도금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 뭘 몇 개나 하신다고요?"

 일일이 공장을 하나씩 다 수소문해서 전화를 건다. 레몬 스퀴저 스무 개를 은 도금 해 주실 수 있나요?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마지막 대사는 허락되지 않아서 할 수가 없었다.

 장인들은 당황했다. 누가 도대체 무엇하러 도금 공장에 전화를 걸어 레몬 짜는 손가락 두 개 만한 거 스무 개를 도금해 달라고 하는지, 기가 찬 모양이다.

 "한 번 공장 돌리는 게 비싸요! 수량이 적어도 팔백 개는 되어야지 해 줍니다"

 경기도에 위치한 열두세 개의 도금 공장이 모두 그랬다. 한 삼일 내내 수첩에 공장 리스트를 쓰고 빨간 줄을 긋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걸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미스터 타헤르는 은 도금한 레몬 스퀴저가 맘에 들었다. 그가 잘 보이고 싶은 미스터 알 마몬도 분명히 맘에 들어하고 있다. 10개는 그가 고 10개는 미스터 알 마몬에게 주고 싶다. 단지 그뿐이다.

 "저, 공작님.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집사를 집사라 부를 수가 없다. 공작의 집사가 명백하지만 그래도 그를 공작님이라고 불러야 목이 달아나지 않는다. 집사의 눈썹이 벌써부터 여덟 팔자를 그리며 뭉개졌다.

 "무슨 일이지?"

다 눈치 깠으면서 저 지랄이다.

 "공작님과 높으신 분이 가지고 싶어 하는 레몬 스퀴저를 은 도금 하기 위해선 1회 도금 비용 2천만 원이 들어갑니다. 주로 공장은 여러 식당과 협약을 맺어 일정한 주기에 물건을 거두어 한 번에 작업한다고 합니다. 레몬 스퀴저 20개만 따로 도금해 줄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럼 다른 공장을 알아봐 줘! 한국에는 아주아주 많은 회사와 공장이 있지 않겠나?"  

씨발놈아, 네이버에 나온 서울 근교 공장은 다 알아봤다!

 "서울 근교 15개의 공장에 모두 확인했습니다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오!"

 집사가 굉장히 곤란한 모양이다. 이미 미스터 타헤르에게 너를 위한 깜짝 선물이 있다고 설레발을 쳐뒀는데, 저 쓸모없는 사용인년이 일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다. 당장 저년을 채찍으로 때리고 싶지만, 집사는 아직 그 사용인이 필요하다.

 "방법을 찾아봐!"

 집사는 일단 사용인을 닦달하는 것으로 일단락 마무리 짓는다. 그리고 또 다른 사용인을 비밀스레 불러 저 몹쓸 사용인년이 망쳐놓은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재건하는 또 다른 계획을 세운다. 사용인 '미스 킴'은 드디어 이 말 같지도 않은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다.

 2차적으로 임무를 맡은 다른 사용인은 이미 선례를 전해 들어 움직일 생각이 없다. 그냥 며칠 이리저리 전화하는 척을 하곤 같은 대답을 내놓으면 그만이었다.

 조용한 며칠이 흐르고 집사가 다시 미스 킴을 불렀다.

 "그 식당에 연락해서, 우리가 특별히 주문하고 값을 쳐줄 테니, 다음번 도금 일정에 우리 레몬 스퀴저를 가져가라고 해"

 사용인은 고급스러운 귀족 나리들의 안목걸맞는 그까짓 은 도금을 입힌 레몬 스퀴저를 얻기 위해 이제는 식당에서 팔지 않는 것을 팔아달라고 애원해야 한다.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어쩜 저렇게 자유분방할까?  

 제 입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니 사용인들이 아쉬운 소릴 하든 말든 상관없다. 어차피 아쉬운 소리 귀찮은 일 대신하라고 고용한 것들이다. 깎이는 것은 제 체면이 아니다. 어차피 아랫것들이야 체면이랄 게 없지 않은가!


 여의도의 어느 높은 빌딩 최상층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  은 도금을 입힌 스무 개의 레몬 스퀴저가 바스락 거리는 유산지에 쌓여있다. 검은 상자에 예쁘게 담겨 리본을 달아 정성스레 포장까지 했다. 식당의 지배인은 팔 필요가 없는 제 재산을 팔았다. 파는 품목이 아니기에 물건은 최고급 특등 한우세트로 값을 치렀다.

 598,000원, 법인카드 결제.

 레몬 스쿼저를 받아 들고 감사와 죄송함에 머리를 숙였다. 다시는 이 식당에 오지 않아야지. 나는 이미 값어치를 따지지 못할 정도로 초라해져 다시는 여기에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 앞으로 다시는 띄고 싶지 않다.  

 가는 길에 잡은  택시는 또 왜 이리 낡아 차 안 가득 찌든 담배 냄새가 나는지, 멀미가 날 지경이다. 오늘의 나 같은 차를 타고 값을 치른다. 꼭 내 주제를 은 것들이 종일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목이 빠져라 나만 기다린 집사가 행복한 모습으로 레몬 스퀴저 하나를 조심스레 풀어본다.

 "걔네들이 새 거 보낸  맞지? 확인했지?"

 안 되는 걸 구해다 주니 이젠 새 걸 샀느냐고 묻는다. 어차피 이 레몬 스퀴저는 권력자에게 머리를 조아릴 한 인간의 손에 들릴 장식 같은 거다. 빈 손 부끄럽지 말라고 들려주는 것, 고작 그것뿐이었다.

 

 몇 시간의 공백으로 밀린 사무를 정리하고 뒤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쌀국수 한 그릇 8천 원이 아까워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 먹는다. 하루 종일 비운 머릿속 같은 허기를 채우자 옆 자리의 노신자가 정중하게 물었다.

 "왜,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여기서 드시나요?"

 밥 한 끼 사 먹을 정도로 차고 넘치는 인간이 아니라는 말 대신 거짓말을  했다.

 "바빠서, 간단히 먹으려고요"

 노신사는 '아, 그렇군요' 하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나를 만났으니, 선물을 드려야지"

 노신사가 초코파이 하나를 건네며 자리를 떴다.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뜨거운 국물 따위로 녹지 않는 냉소를 머금고 집으로 향했다.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평온하게 집에 들어서 오늘 뒤집어쓴 냉소를 잠시 내려놓고 멀쩡하게 내일을 준비한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초코파이를 꺼내 따뜻한 우유와 함께 한 입 깨문다. 타인이 베푼 친절로 무너진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뜨겁게 넘어가는 한 입에 다시 일어설 채비를 한다.

 한 없이 무해한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재건에 필요한 온기를 가져갈 수 있도록, 소박하고 따뜻한 한상을 차릴 것을 기억한다.


 냉소는 무가치하며 아무런 힘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텅 빈 부캐 9만 원씨는 레몬 스퀴저만큼의 목적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냉소로 차려진 한상을 차려 주기로 한다. 한 입, 한 모금 모래알을 씹는 것 같은 불편한 서걱거림을 삼키느라 진저리 치게 두는 것, 나는 분명히 그렇게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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