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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M삼min May 27. 2024

9만 원씨와 달동네 팅커벨

요정은 이제 믿지 않는데, 믿는 자에게 가심이 어떠실지?

 일요일에 이사 후 처음으로 비가 내렸다.

집도 나도 다 떠내려갈 것 같은 굉음에 비해 강수량은 현저히 적다. 속은 기분이 들어 닫으려던 창을 계속 열어 두었다.

 고약하게도 구멍 난 방충망에 두루마리 휴지를 돌돌 말아 끼워 두었다. 임대인이든 전에 살던 세입자든 지독하다고 혀를 끌끌 찼다. 퇴근길에 다 있는 가게에 들러 방충망 스티커를 사 올 것이다. 이 지독함은 나와 어울리지 않으니, 당신들이나 실컷 짊어지고 사시오!

 

 창고방 창 위로 난 슬레이트 지붕에 얇디얇고 맥아리 하나 없는 빗줄기가 내리는데 두둥두둥 천장이 무너질 것 만 같다. 무너지진 않을 것이니 Keith Jarrett을 틀어 협업을 시켜본다. 나쁘지 않았다.

 그래, 어차피 발망치도 아니고 리드미컬 한 빗소리는 이렇게 즐기면 된다. 키스 자렛도 한 때는 이런 빗소리를 들으며 젊은 날을 지내왔을지도 모른다.

 비가 내리니 분리수거는 모아서 마당에 놓았다가 월요일 출근길에 내다 놓아야겠다. 이번에는 제때 맞추어 수거해 가면 좋으련만. 이번 주에는 수거일 3일을 기다려 안 가져가면 구청에 민원을 넣을 생각이다.

 몸집을 키운 불안이 조금 사그라든 모양이다. 이제 여러 가지 감각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동네 지하수에 피부는 물갈이 중이다. 턱, 인중 제대로 자리를 잡은 뾰루지에 여드름 스티커를 붙이고 이들도 적응하길 기다린다. 시간이 조금 걸릴 모양이다.

 먹다 남긴 와인 한 잔을 따라 기분을 내려는데, 보이지 않던 검은 점이 찍힌 침실 벽이 수상쩍다.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내깔려둔 안경을 쓰고 방에 들어가니, 지난 토요일 방에서 한 마리 포획했던 콩 벌레가 또다시 샛노란 마크라메 옆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일주일에 한 마리씩 모습을 드러낼 생각인가? 신축 오피스텔 거주 6년 동안 내가 너무 나약해진 모양이다. 씨부럴을 외치며 두루마리 휴지를 말아 녀석을 잡았다. 한 마리는 괜찮다. 하지만 이 녀석이 이 온 집구석에 한 마리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도대체 가족은 어쩌고 어디로 들어왔단 말인가? 매트리스를 구석구석 살폈다. 아무리 강인한 나라도 자다가 봉변을 겪고 싶진 않다.

 이봐요, 다리 많은 요정님, 그래도 우리 내외 좀 하고 지냅시다! 내 전세금에 한 푼도 보태지 않았으면서 이렇게 주말마다 나타나는 건 좀 민폐가 아닌가 싶다.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벌레를 포획한 생생한 감각을 마비시킨 뒤, 어제 먹은 맥주 캔을 마당에 내다 놓으려고 빗줄기가 내리는 마당으로 나섰다. 비가 들이치지 않는 구석에 모아둔 분리수거 봉투를 건드리자 비를 피하던 달동네 팅커벨 한 쌍이 나에게 날아왔다.

 더 퍼킹퍽을 외치며 털기 춤을 췄다. 창피하고 자시고 알 바 아니다. 난생 첨 보는 달동네 팅커벨은 가로 5센티 몸통에 양 옆으로 짧은 날개가 달려 있다. 제 몸뚱이가 민들레 홀씨인 양 우아하게 날아왔지만 내 몸에 붙는 이상 달동네 팅커벨은 나와 함께 할 수 없다.

 이발한 지 한참 지나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털까지 미친 듯이 흔들어 재빨리 현관문 안으로 도망쳤다. 집으로 들어와 화장실에서 옷을 탈탈 털고 씻는다. 왜인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근지러워 씻을 수밖에 없었다.

 요정은 어린이들의 믿음을 먹고 살아가는 게 아니었던가? 나는 마흔이 넘은 어른이라 요정을 더 이상 믿지 않는데, 이렇게 나타나면 곤란하다. 저기 어디 넘치는 방역비용을 감당할 큰 저택에서 자라나는 새싹에게 가서 지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비 오는 주말에 쫓아낸 달동네 팅커벨은 안타깝게도 요정에 대한 믿음이 없는 어른 여성과 월요일 아침 분리수거 내다 놓는 길에 또다시 맞닥뜨려 버켄스탁 슬리퍼 형벌로 생을 마감했다. 아무래도 이렇게나 믿음이 없어서 요정과 함께 모험을 떠날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월요일 퇴근길 다 있는 가게에 들러 방충망 테이프를 사 왔다. 잘 읽어보고 테두리에만 접착력이 있는 녀석을 사 왔어야 하는데 전체 면에 접착테이프가 붙은 걸 사 왔다. 일단 저 구멍 난 방충망의 콧구멍에 틀어박힌 두루마리 휴지나 제거하자. 남이 남긴 지독함을 한 수저 덜어낸다.

 구멍 난 곳 보다 넉넉하게 방충망 테이프를 잘라 붙였다. 꼼꼼하게 매만져 떨어지지 않게 잘 붙인다. 이제 저 접착면은 콩 벌레 끈끈이 혹은 달동네 팅커벨 끈끈이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잘라낸 남은 방충망 테이프를 직사각형으로 잘라 창틀 물구멍에 몇 군데 붙였다. 아, 이건 물 투과가 되지 않는 재질이다.  

 아휴, 나년.

물 구멍은 도로 떼어낸다. 나머지는 주말에 꼼꼼하게 작업할 생각이다. 월요일의 관리소장에게는 30분 이상 업무를 주지 않을 것이다.


 이사 후 혼자 손 볼 곳을 하나씩 수리하며 다짐한다.

 다음에는 내 소유의 집에서 하나씩 고쳐 나가는 일상을 보낼 수 있길, 그 욕심이 내가 살아온 날들에 비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비해 너무 과한 것이 아니길.



p.s 냉장고를 향해 기어가던 두 번째 지네를 만나 살충제를 도포하고 수분 후 살충제를 피해 기어 나온 놈을 두루마리 휴지로 잡았다. 주택에 이사 온 나를 후회하며 Keith Jarrett의 take me back을 들으며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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