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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M삼min Jun 10. 2024

9만 원씨, 감정의 쓰레기통

가장 낮을수록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기 쉽다.

 아침부터 꼭 받아야 하는 서류가 있다며 상사가 회사 퀵을 불러 달란다. 전화번호 하나만 주기에 퀵 배송 기사가 도착할 주소를 물었다. 주소, 그리고 해당 회사의 임원을 대신해서 서류를 전달할 직원의 번호를 받았다. 퀵 업체에 연락해서 주소, 서류를 받을 장소, 서류를 전달할 사람의 번호와 이름을 상세히 전달했다.

 보통 이렇게 하면 똥 밟을 일은 없다. 전달받은 주소가 잘못되었거나 퀵 기사가 제 때 도착하지 않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너무 걱정할 일이 아니다. 다들 자기 자리에서 맡은 일을 잘 수행하고 있으니까.

 크고 작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지만 하나라도 제 일을 하지 않으면 언제나 불똥이 튀는 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 그러니까 여기 이 피라미드에선 9만 원씨가 되겠다.

 

 아침부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울리기에 냉큼 받았더니, 화가 잔뜩 난 퀵 배송 기사님이 다그친다.

 “여보세요, 아니 지금 이미 장소에 도착했는데 서류 준다는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지금 10분 넘게 기다리고 있어요!”

 서류를 전달할 A 임원이 부재중일 경우 알려준 직원 B의 연락처가 잘못된 것일까?

 “네, 기사님 그럼 A 씨에게 한 번 전화해 보시겠어요?”
전화번호를 불러주려는 참이었다.

 “아, 진짜. 여보세요! 내가 A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요?”

 그래, 애초부터 업체에 전화번호를 하나만 전달한 내 탓이다. 일분일초를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이 시간 맞춰 도착했는데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기껏 해결하라고 전화했더니 또 다른 번호로 전화를 하란다. 짜증스러운 상황을 만든 모양이다.
 “제가 통화하고 서류 전달받으실 수 있게 조치해 드릴게요. 그러면 될까요?”
 “네, 빨리 좀 해주세요. 여기서 10분 넘게 기다렸어요!”

 기사님의 목소리가 한 층 누그러졌다. 직원 B에게 연락하니 기사님이 왜 화가 났는지 알 것 같다. 직원 B는 마치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지시받지 않았고 심지어 임원 A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됐나, 직접 임원 A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받지 않는다.  

 퀵 비는 회사가 부담할 테니, 그냥 돌아오시라고 전달을 해야 하나, 이 똥을 어떻게 치워 수습할 것인지 궁리 중에 고맙게도 직원 B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 혹시 AAB 님이 아니라 AAA 님 말씀 이실까요?”

 직원 B는 나와 통화 중에 임원 AAA를 직원 포털에서 검색까지 했었다. 그런 사람은 자신과 전혀 연관이 없는 다른 부서 사람이라고 한 참이었는데, AAB라고 착각했을 줄이야!
 임원 A 씨가 아직 전달하지 않은 모양이다. 직원 B가 누군가에게 지시받는 게 수화기 너머로 흘러 들어온다. 그러니까, 이제 이 서류를 왜 누구에게 전달해야 하는지가 성립된 것이다.

 잔뜩 움츠러든 직원 B가 기사님께 서류를 전달하겠다고 하곤 전화를 끊었다. 직원 B도 퀵 배송 기사님의 감정의 쓰레기통 노릇을 하게 될지 모른다. 나는 일면식도 없는 타인이 악다구니를 쓰고는 전화를 뚝 끊어 버렸을 때 '왜 나한테 지랄이야'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는데 직원 B는 뭐라고 하고 이 일을 넘겨 버릴까? 변죽 좋게 웃으면서 기사님을 달랬을까? 아니면 이보세요, 여보세요를 외쳐대는 기사님과 한 바탕 기싸움을 했을까?

 별 것도 아닌 일에 궁시렁거리며 한 마디하고 넘어가는 것, 보통은 그렇게 지나쳐 가는 일이지만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땐 울분이 토악질을 해댄다. 사실 그러니까 이 별것도 아닌 일에서 누구의 실수를 따질 필요도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실수는 임원 A에게 있고 나와 직원 B는 거기에 대해 오목조목 따져 앞으론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할 권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걸 자각하는 순간, 손가락으로 감히 가리킬 수 없는 타인의 실수로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전락한 나에게 부화가 치민다.

 “기사님, 담당하시는 분이 바로 내려가서 서류 전달해 주실 거예요.”

 “네.”
 기사님은 아직도 쉬이 화가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언제까지 이따구로 살래?’

 나 또한 나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다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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