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생활 밖에 있는 것들
싫어하는 사람과 50평짜리 대궐에서 사느니, 20평짜리 집에서 혼자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에 사람들은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네 평 짜리 단칸방이라도 그게 나을까?
20평짜리 신축 아파트가 아니라 샤워할 공간도 제대로 없는 오래된 집에 살게 되더라도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물론 이혼한다고 별안간 거지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싱글맘이란 단어는 얼마나 불길한가. ‘이혼’과 ‘미래에 대한 불안’은 서로 아귀가 잘 맞는다. 이혼을 선택하면 내 삶이 얼마나 달라질지 가늠할 수 없고, 불확실성은 끝없이 팽창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
지금이 너무 힘들다고? 지금 감당하고 있는 무거움과 앞으로 감당해야 할 무거움 사이에 뭐가 더 힘들까?
자유를 원한다고? 그 대신 스스로 져야 할 책임은 질 수 있겠어?
이런 질문들에 답하려면 혼자서 살아도 가난하지 않겠다고, 내가 책임지겠다는 악다구니를 내야만 한다. 독한 마음을 품지 않으면 무기력이 나를 덮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결혼의 지속이든, 이혼이든 일단 선택을 하고 나면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 누려야 한다. 누군가는 ‘자기 분수에 맞게 살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나답게 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중요한 건 자기 삶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겠지. 돌아보면 결혼 생활을 유지하겠다고 선택해 놓고 이혼을 꿈꾸는 일이 가장 고된 일이다. 결혼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래도 배우자가 가진 강점과 의미가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며 감사하며 사는 것이 행복 아니겠나. 하지만 나의 행복이 이혼에 있다고 선택하고 나면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내다보게 된다. 결혼 밖의 삶에는 무엇이 있는가?
1) 명절은 정말 빨간색 날로 돌아갔다. 국경일, 나라가 정해준 쉬는 날이었다. 주말이면 아이는 아빠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주말에도 육아와 가사노동을 쉴 수 없던 40대 여성이 어느 날부터 토요일 오후 소파에 누워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넷플릭스를 보다가 낮잠을 자도 괜찮은 것인지 불안하고 허전하면서도 달콤했다.
2) 운 좋게도 일이 자리를 잡아가며 나와 아이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여행을 갈까? 내가 가고 싶은 나라라면 어디든지 괜찮았다. 아이도 초등학생이 되어 함께 여행 다니며 업어주지 않아도 될 나이 아닌가. 결혼 후 아주 오랫동안 나의 여행은 육아 전담자로서의 여행이었고, 시댁 식구들과의 가족 여행이었다. 이제 여행의 의미가 달라졌다. ‘자유 여행’은 20대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여행 중에 문뜩 생각했다. 지금부터 나는 어느 도시에 살아도 되는구나. 내가 살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그리고는 아이와 함께 뉴질랜드에 살기 위해 1년 반에 걸쳐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했다.
3) 가족을 위해 요리하지 않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요리하다니. 분명 내 돈 주고, 내가 요리해서 먹는데도 이렇게 내가 먹고 싶은 걸 다 먹고살아도 괜찮은 건가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돌아보니 나는 그럴싸한 식탁을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된장찌개를 끓이고 생선을 구웠다. (그러지 않을 땐 반항하듯 기름진 배달음식을 시켰다.)
대신 이미 씻고 썰어 포장이 된 루꼴라와 치커리가 들어 있는 샐러드 야채에 마늘과 함께 구운 방울토마토와 치즈를 넣고 상큼한 드레싱을 만들어 바삭한 통밀빵과 함께 먹었다. 아이를 위해 따로 김치볶음밥을 해주더라도 내 입에는 내가 먹고 싶은 재료들이 끼니마다 들어갔다. 분명 호사였다. 식재료를 알아갈수록 장 보는 일은 쇼핑이 되었고, 돈의 가치가 다르게 느껴졌다.
여전히 가끔 이를 꽉 깨문다.
아이를 대학까지 보내고, 나의 노후를 대비하는 일을 스스로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몸에 힘이 들어간다. 두려워하던 운전도 배워야 했다. 6개월에 걸쳐 천천히 걸음마하듯이 스스로를 달래 가며 배웠다. 전에 배우자가 대신해주어 미룰 수 있던 일이었지만 이제 내가 못하면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까 피할 수 없었다. 친정 식구들도 근처에 없었기 때문에 일하다가도 육아의 변수들이 등장하면 혼자서 대응하고 조율했다.
가끔은 망망대해에 둥둥 떠있는 기분에 시달려야 했다. 내 성격이 너무 모나서, 여자로서 부족해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때도 아주 가끔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날엔 저녁밥을 먹고 혼자 동네 공터에서 달음박질이라도 쳐야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는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날엔 기대하고 실망할 일이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더 괜찮은 아내, 며느리가 되어야 할 것 같은 부담에 시달리지 않고 사는 것에 감사했다.
이런 날들이 이혼 후의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