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조직문화 건축학 - 2. 보이지 않는 룰의 힘
2018년 한국으로 부임한 독일계 다국적 기업의 한 임원이 첫 팀 회의에서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회의 시간은 2시간으로 잡혀 있었는데, 정작 의미 있는 발언은 마지막 20분에만 나왔다. 앞의 1시간 40분 동안은 서로 눈치만 보며 애매한 이야기만 오갔다.
더 이상한 것은 회의가 끝난 후였다. 진짜 중요한 결정들은 복도에서, 화장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공식 회의는 단지 이미 정해진 것을 확인하는 의식에 불과했다.
그는 한국 직원에게 물었다. "왜 회의에서 진솔한 의견을 말하지 않나요?"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늘 그랬는데요."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룰"의 힘이다.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지만, 모든 구성원이 암묵적으로 따르는 규칙들. 이런 규칙들이 조직의 실제 작동 방식을 결정한다.
조직의 숨겨진 운영체제
모든 조직에는 두 가지 룰이 있다. 하나는 명시적 룰(Explicit Rules)이고, 다른 하나는 암묵적 룰(Implicit Rules)이다. 명시적 룰은 취업규칙, 업무 매뉴얼, 조직도 등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조직의 실제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암묵적 룰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룰들의 예를 보자.
회의 관련 룰
"중요한 결정은 회의 전에 미리 정해진다"
"상급자가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반대 의견은 회의 후 개별적으로 말한다"
"회의 시간은 늘 예정보다 길어진다"
소통 관련 룰
"나쁜 소식은 금요일 오후에 전한다"
"실제 의견은 이메일이 아닌 직접 말로 한다"
"상사에게는 문제보다 해결책을 먼저 제시한다"
"같은 이야기를 세 번 들으면 그때 진짜다"
성과 관련 룰
"눈에 띄는 성과가 진짜 성과다"
"실패는 개인 책임, 성공은 팀 성과다"
"바쁘게 보이는 것이 열심히 하는 것이다"
"야근하는 사람이 헌신적인 사람이다"
이런 룰들은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지만, 신입직원들은 몇 달 안에 자연스럽게 학습한다. 그리고 이 룰을 어기는 사람은 "눈치 없는 사람", "조직에 맞지 않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아마존의 "Day 1 룰"과 "Two Pizza 룰"
아마존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명시적으로 만든 "좋은 보이지 않는 룰"들이다. 창업자 제프 베조스는 의도적으로 건강한 암묵적 룰들을 만들어냈다.
Day 1 룰
아마존 본사 건물 이름이 "Day 1"이다. 여기에는 "우리는 여전히 첫날"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로 인해 생긴 보이지 않는 룰들.
"기존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완벽한 계획보다 빠른 실행이 낫다"
"실패는 혁신의 필수 과정이다"
"고객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본다"
Two Pizza 룰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을 피자 두 판으로 배불릴 수 있는 수(보통 6-8명)로 제한하는 룰이다. 이로 인해 생긴 보이지 않는 룰들:
"회의는 꼭 필요한 사람만 참석한다"
"의사결정은 빠르고 명확해야 한다"
"책임과 권한이 명확해야 한다"
"작은 팀이 큰 일을 한다"
이런 룰들 덕분에 아마존은 거대 기업이 되었음에도 스타트업의 민첩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 "Trust but Verify" 룰
워렌 버핏의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는 독특한 보이지 않는 룰로 유명하다. 수백 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거대 기업임에도 본사 직원은 단 25명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신뢰 기반 룰들
"CEO는 결과로만 평가받는다"
"성과가 좋으면 간섭하지 않는다"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자율에 맡긴다"
"숫자로 말하되, 숫자만 보지는 않는다"
검증 기반 룰들
"재무 수치는 철저히 모니터링한다"
"이상 징후가 보이면 즉시 개입한다"
"CEO 교체는 과감하고 신속하게 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판단한다"
이런 룰들 덕분에 버크셔 해서웨이는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대의 효율을 달성하고 있다. 각 자회사 CEO들은 자율성을 보장받는 대신 명확한 책임을 진다.
자가진단: 우리 조직의 보이지 않는 룰 찾기
당신의 조직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룰들이 있을까? 다음 질문들을 통해 찾아보자.
보이지 않는 룰 탐지 체크리스트
의사결정 관련
□ 중요한 결정이 어디서 실제로 이루어지는가?
□ 누구의 의견이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가?
□ 반대 의견을 제시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는가?
□ 결정 과정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소통 관련
□ 정말 중요한 정보는 어떤 경로로 전달되는가?
□ 나쁜 소식은 누가, 언제, 어떻게 전달하는가?
□ 공식 발표와 실제 상황이 다른 경우가 있는가?
□ 진짜 의견은 언제, 어디서 나오는가?
성과와 인정
□ 실제로 승진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 어떤 행동이 인정받고 어떤 행동이 무시되는가?
□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명시된 것과 다른가?
□ 노력과 결과 중 무엇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가?
시간과 우선순위
□ 정말 중요한 일과 바쁜 일이 다른가?
□ 시간 사용 패턴에서 드러나는 진짜 우선순위는?
□ 회의와 실무 중 어느 것이 더 중시되는가?
□ 장기 목표와 단기 실적 중 무엇이 우선인가?
관계와 네트워킹
□ 누구와 관계를 맺느냐가 성과보다 중요한가?
□ 공식적 조직도와 실제 영향력 구조가 다른가?
□ 정보 접근성에 차이가 있는가?
□ 소속감과 배제감을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의 답에서 나타나는 패턴이 바로 당신 조직의 보이지 않는 룰이다.
3M의 "15% 룰"과 "황금 단계 룰"
혁신 기업으로 유명한 3M에는 독특한 보이지 않는 룰들이 있다. 이 룰들이 3M을 100년 넘게 혁신 기업으로 만든 비결이다.
15% 룰
모든 연구개발 직원은 근무시간의 15%를 자신이 원하는 프로젝트에 사용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생긴 보이지 않는 룰들.
"승인받지 않은 일도 할 수 있다"
"실패해도 괜찮다, 다시 시도하면 된다"
"상사가 반대해도 계속 할 수 있다"
"결과보다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포스트잇도 이 15% 시간에서 나온 "실패작"이었다. 강력한 접착제를 만들려다가 약한 접착제가 나왔는데, 그것이 오히려 혁신적 제품이 되었다.
황금 단계 룰
신제품 개발 과정에서 각 단계마다 "킬러 질문"을 하는 룰이다.
1단계: "고객이 정말 원하는 것인가?"
2단계: "기술적으로 가능한가?"
3단계: "수익성이 있는가?"
4단계: "3M다운 제품인가?"
이 과정에서 생긴 보이지 않는 룰들
"고객 가치가 없으면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안 된다"
"기술적 완벽함보다 고객 문제 해결이 우선이다"
"단기 수익보다 장기 가치를 본다"
"3M의 정체성에 맞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리츠칼튼의 "Ladies and Gentlemen" 룰
호텔업계의 전설 리츠칼튼에는 직원들을 "Ladies and Gentlemen"으로 부르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이것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강력한 보이지 않는 룰을 만들어낸다.
상호 존중 룰들
"모든 직원은 귀족처럼 대우받아야 한다"
"계급과 상관없이 서로를 존중한다"
"고객보다 먼저 직원을 챙긴다"
"문제가 생기면 함께 해결한다"
서비스 Excellence 룰들
"불가능한 일은 없다, 방법만 찾으면 된다"
"고객의 불편은 즉시 해결한다"
"매뉴얼보다 고객 감동이 우선이다"
"한 번의 경험으로 평생 고객을 만든다"
실제로 리츠칼튼 직원들은 고객 문제 해결을 위해 하루 2,000달러까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이런 신뢰와 권한 위임이 세계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만들어낸다.
보이지 않는 룰을 바꾸는 5가지 전략
조직의 보이지 않는 룰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다음 전략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1. 현재 룰의 가시화
보이지 않는 룰들을 명시적으로 적어보기
직원 인터뷰를 통해 암묵적 규칙 발굴
"신입직원이 빨리 배우는 것들" 목록 만들기
공식 정책과 실제 행동의 차이점 분석
2. 리더의 의도적 룰 깨기
기존 룰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모습 보여주기
새로운 행동 패턴을 일관되게 반복하기
룰을 깬 직원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변화하는 이유와 목적을 명확히 설명하기
3. 새로운 룰의 의도적 창조
원하는 행동을 유도하는 시스템 설계
성공 사례를 의도적으로 만들고 전파하기
새로운 룰을 따르는 사람들 인정하고 보상하기
스토리텔링을 통해 새로운 룰의 가치 전달
4. 환경과 시스템 변화
물리적 공간을 새로운 룰에 맞게 조정
프로세스와 절차를 새로운 룰에 정렬
IT 시스템과 도구를 새로운 방식에 맞게 변경
측정 지표와 평가 기준 변경
5. 지속적 강화와 피드백
새로운 룰의 정착도 정기적 점검
역행하는 행동에 대한 즉각적 피드백
성공 사례 지속적 발굴과 공유
룰의 진화와 개선을 위한 지속적 대화
자라(ZARA)의 "빠른 패션" 룰
스페인의 패션 브랜드 자라는 "빠른 패션(Fast Fashion)"이라는 새로운 게임 룰을 만들어 패션업계를 혁신했다. 이들의 보이지 않는 룰들을 보자.
속도 관련 룰들
"완벽한 계획보다 빠른 실행이 낫다"
"2주 안에 새로운 디자인이 매장에 나와야 한다"
"실패하면 즉시 중단하고 다음 시도를 한다"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의사결정 룰들
"현장의 목소리가 본사보다 중요하다"
"데이터보다 직감이 빠르다"
"소량 다품종이 대량 소품종보다 안전하다"
"재고는 기회비용이다"
이런 룰들 덕분에 자라는 기존 패션업계의 6개월 주기를 2주로 단축시켰고, 연간 매출 280억 유로의 글로벌 브랜드가 되었다.
룰의 힘을 제대로 활용하기
보이지 않는 룰은 양날의 검이다. 잘 활용하면 조직을 혁신과 성장으로 이끌지만, 잘못 방치하면 조직을 정체와 퇴보로 몰고 간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룰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의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좋은 룰은 강화하고, 나쁜 룰은 바꾸고, 새로운 룰은 창조해야 한다.
당신의 조직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룰들이 있는가? 그 룰들이 조직의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 바로 룰을 바꿀 때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영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강력하다. 이 힘을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조직이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