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가오는 것들>을 보고
*이 글은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끝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존재한다. 괴로운 일의 끝이야 반가운 일이겠지만, 좋았던 것의 끝은 슬프다. 이 영화는 괴롭기도 하고 좋기도 한 '일상의 끝'을 말한다.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짧은 시기 동안 어머니와 남편을 잃는다. 두 사람 모두 나탈리의 일상에 깊이 관여하는 사람이었다. 일상은 긴장이 배제된 상태다. 극적인 일의 끝남보다 일상의 끝이 더 파괴적인 이유다.
나탈리가 끝남을 겪게 되는 극의 초중반은 대부분 낮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일상이 주로 이뤄지는 시간이 낮인 것처럼 일상의 파괴 역시 낮에 이뤄진다. 낮이란 배경은 끝남의 비극적인 상황과 대조되면서 끝남의 고통을 배가시킨다. 그러나 나탈리는 이 고통을 피할 수 없다. 끝남은 찾아가는 게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다가가는 것들'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다가오는 것들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 걸까.
영화는 '견디는 방법'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알면서 말해주지 않는 것이 아니다. 견디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무수히 많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를 콕 집어 뚜렷한 처방을 내릴 순 없다. 명확한 답을 주는 대신 영화는 끝남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거나 피할 수 없는 '다가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하나의 끝남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끝남이 다가온다. 제자 파비앵(로만 코리카)과의 관계는 그렇게 또 하나의 끝남으로 나탈리에게 다가온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나탈리의 전 남편 하인츠(앙드레 마르콩)는 함께 살던 집의 열쇠를 주인공에게 돌려준다. 하인츠가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나탈리에게 고백한 이후 1년 만의 일이다. 어떤 끝남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일상의 끝남일수록 더욱 그렇다. 새로운 일상이 상실한 일상의 빈자리를 메울 때까지 끝남은 끝난 게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끝이 있는 것처럼, 끝남 역시 그 끝이 있다. 그것이 반드시 어떤 것의 시작일 필요도 없다고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끝남은 끝나는 것에 그 의미가 있으므로.
(2016.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