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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Dec 10. 2021

헤지는 것

한 권을 채우자

종이 끝이 헤지는 걸 좋아한다. 붙여놓은 마스킹 테이프의 끝이 살짝 떨어져 흐물 해졌다던가 메모지의 모서리가 닳아 뭉뚝해졌다던가 날개 없는 책의 끝부분이 미세하게 보풀이 일고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다던가. 스마트폰 메모 위젯을 사용하고 전자책을 구매하고 노트북으로 책을 만들지만 종이가 주는 아날로그 헤짐은 무언가 따듯한 느낌이다. 


새것이 반짝반짝 설레 설렘 한 느낌보다는 아끼고 닳아 시간이 느껴지는 게 그동안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 같아.


날개 없는, 표지 코팅이 없는 책을 좋아하는데 읽을 때 꼭 표지 모서리를 만지며 읽는다. 처음엔 뾰족하게 손가락 끝을 찔렀던 모서리가 책을 읽어갈수록 헤져서 뭉툭해질 때. 이 책과 조금 친해졌구나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집어 든 책의 모서리가 헤져 있을 때.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이 만큼의 시간을 함께 보냈구나. 그간 책이 나에게 준 기억을 떠올린다. 그렇게 생각하면 헤짐이 나에게 정보도 영감도 철학도 깊이도 준 것에 감사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모서리가 있다. 나는 너를 읽을 때도 모서리를 만지며 읽는다. 사람마다 날개의 유무와 코팅의 유무, 두께의 정도가 달라 모서리가 헤짐에는 시간의 차이가 있다. 너의 얼굴이 명확히 떠오르만큼 오래 만났어도 모서리가 빳빳한 코팅으로 뾰족한 경우도 있고 아직 너의 얼굴이 아닌 분위기만 기억하지만 두꺼운 표지에 코팅이 되어 있지 않아 모서리가 금방 헤지는 사람이 있다. 


적당히 헤진 그 느낌이 좋다. 서로에게 편해져 서로 적당히 헤진 모서리를 만지며 얘기를 나누는. 긴장이 풀어지고 적당히 유해진 분위기.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사람인양. 헤짐은 무언가 따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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