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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Dec 13. 2021

버리는 거 잘해요

한 권을 채우자

그날 발생한 쓰레기는 그날 다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요리를 할 때도 설거지나 기타 정리를 다 하고 먹는 게 속 편하고 택배가 와도 테이프를 제거하고 박스를 내어놓고 뽁뽁이를 버리고 내용물을 확인해야 속편 하다. 한번 삘 받은 날은 집을 다 뒤집어엎고 반년 이상 안 쓴 것들은 다 내어 버린다. 옷 정리도 마찬가지. 이번 연도에 한 번도 입지 않았다면 옷 수거함으로 직행한다. 오랜 자취러의 이삿짐 줄이기 습관이다.


그렇게 서울에 10년을 넘게 살아 그런가. 버리는 게 습관이 되어 그런가. 자고 나면 어제의 감정기억도 버려버린다. 아무리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자고 나면 꿈에 버리는지, 일어나면서 배게에 버리는지, 감정이 옅어지거나 기억이 이미 사라져 있다. 어제 상사에게 무진장 혼났어도 오늘 가서 헤헤거릴 수 있는 이유다. 좋은 감정기억은 오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잠은 모든 감정기억 앞에 공평했다. 


뇌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고(앞선 에피소드에선..). 어떤 사건이 벌어져도 크게 관심이 없고 흘려보낸다. 애초에 각인될 기억이 흐릿하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크게 감정이 동요하지 않고 그러려니 한다. 애초에 남을 감정이 흐릿하다. 요리를 할 때 기름을 얼마나 넣었는지 기억이 애매하듯 택배 내용물에 뽁뽁이가 몇 바퀴 둘러져 있었는지 기억이 애매하듯 그렇다. 있었다는 사실만 남고 그 안에서의 내 생각이나 느낌은 흘러버린다. 책장에 꽂혀 있는 모든 책을 다 기억하는 건 책이 나에게 온 사실을 기억하는 거다. 너가 어제 했던 재미없는 드립은 재미없는 게 사실이란 걸 기억하는 거다. 그니까 그만해.


뇌의 용량에는 한계가 있어서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옛 정보는 저 어딘가로 밀려나서 사라질 수도 있다던데 마음의 용량도 한계가 있어서 새로운 감정이 들어오면 옛 정보는 밀려나서 사라지는 걸까. 아니면 용량 자체가 엄청 작은 건 아닐까? 어떤 사람은 감정기억 박스가 커서 많은 걸 담아둘 수 있는 것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박스는 너무 작아서 조금도 담을 공간이 없어 다 넘쳐 흘려버리는 건 아닐까.


기존에 남아있던 감정기억이 너무 단단히 박스 안에 자리 잡아 다른 정보가 들어갈 빈틈이 없나 보다. 오래 쓰지 않으면 버려야 하는데 쓰지 않은 적이 없어 버리지 않았나 보다. 그만큼 내가 속이 좁고 여유가 없는 사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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