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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Dec 16. 2021

인생 대화

한 권을 채우자

손님이 찾아왔다. 오랜만의 손님이 반가워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 보니 서 있던 손님이 자연스레 내 앞에 앉았다. 아직 대학생이라는 손님은 예술적인 재능이 많아 진로를 고민하고 있어 보였다. 디자인학교를 다니고 있고 하필 졸업작품이 책 제작이라니, 디자인과를 다녔다 책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마음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졸작 준비도 준비인데 정작 졸업하고 나서의 진로가 캄캄하다고 했다. 재능도 많은데 무엇이 문제냐고 하니 제작이 아닌 기획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현재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지만 뭔가 가닥이 잡히지 않아서 막막하다고. "아." 순간적으로 저 모든 마음이 이해 갔다. 10년 전 내 마음과 너무 똑같았다. 


친구 따라 강남 간, 친구 따라 미대 입시를 한 나는 미술에 재능 없이 운 좋게 턱걸이로 디자인과를 다니게 되었고 재능러들과 노력러들에 치여서 방황을 많이 했더랬다. 방황하는 나를 더 혼란스럽게 한 건 이 나라 디자인계는 썩었다면서도 퇴근 없이 일하는 선배들과 자신의 것을 만들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동기들이었다. 애초에 디자인 감각에 소질이 없던 나는 혼란에 휩쓸려 일찌감치 디자인의 길을 접었고 다른 방향을 모색했다. (그래도 디자인은 설계인만큼 배워두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름 실용적인 학문이다.) 그때 뭐해먹고살지를 처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배운건 도둑질이고 도둑질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도둑질 말고 다른 걸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만약 그때의 내가 지금 앞에 앉아있다면 어떤 말을 해줬을까? 앉은 손님에게 내 사회경험을 짧게 들려주었다. 정말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면 다양한 경험을 해보면 좋고 뭘 좋아하는지 모르면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게 좋다고. 시간을 조금만 쪼개면 하나의 일을 꾸준히 하면서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그러다가 정말로 내가 하고픈 것이 생기면 그때 정착해도 좋다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생각이니 주변에 상의할 교수님이나 어른, 선배 혹은 입사하고 싶은 곳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얘기해보면 좋겠다고. 디자인은 배워두면 실용적이더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부모님의 지원은 최대한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받으라고 했다. 손님은 반쯤 조언이고 반쯤 농담인 나의 말을 비닐봉지에 책과 함께 넣어갔다. 


거리두기가 살짝 완화된 김에 오랜만에 동네모임이 있었다. 스물다섯의 격투기 강사를 한다는 친구는 나더러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멋있다고 했다. "굉장히 멋있고 지적이시고 차분하시고 어쨌든 멋있으세요." 자신도 얼른 어른이 되어 멋있어지고 싶다고. 스무 살 방황하던 시절 스물다섯의 형들이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놨는데 스물다섯이 된 본인은 스무 살의 방황하는 청년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직 자신은 어렸을 때 만났던 그런 멋진 형이 못된다고. 그러니 얼른 서른, 서른다섯이 되어 그런 형이 되고 싶다고.


"야, 일 년 차이가 엄청 크지 않냐?" 고3 때 방송과 친구가 말했다. "우리가 만났던 선배들은 막 엄청 어른이고 뭐든 상담하면 척척이고 그랬는데, 후배는 진짜 너무 꼬꼬마 같아." "뭐, 선배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래서, 후배가 상담하면 넌 뭐라고 할 건데?" "몰라? 일단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겠지?" "넌 안 하잖아."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너에게 조언을 해줄 자격이 생기는 게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먼저 해봤다면 나이와 상관없이 조언해줄 수 있는 거 아닐까. 내가 겪었던 장단점을 일러줄 수 있는 거고 겪으며 생각했던 점을 공유할 수 있는 거고. 나이를 먹는다고 모르는 분야의 경험이 생기는 게 아니고 없던 철이 드는 건 아닌데. 조언을 듣고 싶다면 솔직하게 다가가면 되고 조언을 하고 싶다면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괜히 부끄러워 덜 오픈하면 조언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괜히 있어 보이려 말을 고르다 보면 할 수 있는 조언도 못하게 된다. 조언이란 말이 어렵다면 그냥 우리 대화하는 걸로. 인생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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