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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Dec 20. 2021

하얀 외출

한 권을 채우자

조금 멀지만 항상 가보고 싶었던 곳. 연이 닿지 않는다는 핑계로 미뤄왔던 곳. 오늘 가야겠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즉흥적으로 생각했다. 어제 눈이 꽤 많이 내렸으니 길에 눈이 쌓여있겠지. 한밤에 또 한 번 내렸으니 아직 치우지 않은 곳이 있다면 걷기 번거롭겠지. 하지만 어떡해. 가고 싶은걸. 그럼 가야지.


오랜만에 대중교통 나들이였다. 오래써 배터리가 빨리 닿는 핸드폰이 조금 불안했지만 근처에서 헤매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요즘 꽂힌 릴러말즈 전곡 셔플을 켜놓고 지하철에 앉았다. 자랑할 만큼의 노이즈 캔슬링이 뛰어난 이어폰 덕분에 잘못된 방향으로 탄 줄도 모르고. 양 옆자리의 패딩에 끼여 멍 때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분명 한강을 지났어야 했는데 왜 안 지났지, 왜 여기서 내려서 세운상가를 가야 할 것 같지. 아, 여기 을지로네. 잘못 탔네. 지하철을 너무 당당하게 몸이 기억하는 루트로 타부렸네.


도착할 수 있는 노선 경로는 다양했지만 최소한의 시간으로 도착하고 싶었는데. 한참을 땅 밑을 헤매다 처음 잘못탄 지하철이 나비효과가 되었는지 1시간이나 예정시간보다 늦게 도착역에 닿았다. 성능 좋은 이어폰에서 릴러말즈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네- 노래가 들렸다. 노래를 들으며 드디어 지상으로 나와보니 깨끗하고 순수한, 아직 치워지지 않은 새하얀 공터의 눈이 반겼다. 눈을 사박사박 밟으며 자박자박 걸어 곳으로 향했다.


테이블이 생각보다 많았고 사람도 가득했다. 한 자리가 타이밍 좋게 비어 가방을 내려놓고 음료를 주문할 수 있었다. 음료를 주문하는 곳 옆에서 이곳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깨끗하고 순수한 친구를 마주쳤다. 그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하얀 친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선가. 때가 탄 내 모습을 보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너가 보는 세상은 너처럼 깨끗하지 않단다. 나처럼 이상한 사람이 널리고 널렸지. 내가 맛보기를 보여줄 테니 잘 새겨두었다가 험난한 세상 화이팅 하며 살아가렴. 자세를 삐뚤게 고쳐 앉아 사박사박한 말을 하며 자박자박한 반응을 보였다.


순수한 친구는 내 말 한마디 행동 한 부분에 첫인상(멀쩡해 보이는)과 다른 괴리감에 당황해하면서도 잘 웃어주었다. 그리고 살짝 이상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첫인상의 정중한 모습을 믿고 싶었는지 그에 맞는 반듯한 그림을 그려줬다. 그림을 사이에 두고 테이블에서 마주한 초면이었다. 초면에 무례해서 죄송했어요. 하지만 다음번에는 초면이 아닐 테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원래의 자리로 이동하고 나서도 그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와의 대화가 들렸다. 그들은 대화 내내 웃음을 띄었고 귀엽게 투닥투닥했으며 기운이 무해했다. 정말. 무해했다. 어쩜 그리 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 이상한 나도 영향을 받아 한 구석이 하얘졌다. 집에서 두 시간을 조금 넘게 벗어나 하얀 기분을 만나러 왔다. 순수한 친구는 나로 인해 세상의 이상한 부분을 하나 알아가고 나는 그 친구로 인해 세상의 하얌을 한번 환기했으니 나름 좋은 외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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