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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Dec 24. 2021

잇 더 피치

한 권을 채우자

비염 덕분에 향에 관심 없이 살았다. 샴푸나 바디로션, 섬유유연제를 살 때도 향이 우선순위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살면서 한 번씩 찾아온다는 향수병이 이번 연도에 왔다. 향수병에 걸리면 어떻게든 한 병을 사긴 하는데 금세 흥미를 잃어버려 큰 병을 사긴 아깝단 말이지. 예전부터 복숭아 향을 좋아하긴 해서 이번에도 복숭아 향수부터 리스트업에 들어갔다. 이리저리 검색해보니 복숭아가 주는 이미지는 사랑스럽고 발그레한 게 강해서인지 대부분 대학교 신입생들에게 어울릴법한, 뿌리면 향수가 아닌 하트가 나올 것 같은 제품이 많았다. 머릿속에 하트를 뿜어대며 다니는 나를 상상해봤다. "오.. 너무 안 어울리는데."


이 나이쯤 되면 자신만의 향이 생긴다고들 하던데. 사랑스럽고 보듬어주고 싶고 발그레한 이미지는 아무리 내면의 깊은 어린아이 같은 구석을 꺼낸다고 해도 안 어울렸다. 꺼내면서부터 내 손발이 없어질 터였다. 하지만 복숭아 향을 놓긴 싫었다. 크면서 키보다 고집이 더 커버려서.


으른의 복숭아 향을 찾으려고 꽤 많은 사이트를 돌아다녔다. 보면 볼수록 미궁이었다. 애초에 맡아야 하는 종목을 보려고 했음 안됐는데. 보면 볼수록 향 노트보단 향수의 외형 그리고 라벨에 눈이 갔다. 인간은 이다지도 시각에 약한 동물이었던지. 결국 라벨에 마음이 빼앗겨 하나 주문해버리고 말았다.


약간 짧뚱한 원통형에 주둥이까지 어깨가 사선으로 예쁘게 뻗어있고 뻗은 사선을 마무리하듯 까만 뚜껑이 툭 닫혀있다. 라벨은 무슨 향을 품었든 너에게 스며들게 하겠다는 사선 물결 모양으로 깎여 있으며 향수 번호가 적혀 있다. 흑백으로 된 파도가 라벨 끝부분에 살짝 프린트되어 있는데 어떤 향을 담고 있을지 상상되게 하지 않아 더 궁금해진다. 라벨 위로 작게 잇 더 피치가 적혀 있다.


뿌리지 않은 상태에서 주둥이를 킁킁대면 흙이 살짝 묻어있는 나무 냄새가 난다. 이게 무슨 복숭아 향이야 하며 뿌려보면 딱 상큼한 복숭아 속살의 냄새가 스친다. 바닐라빈이 섞여있는 듯 부드럽고 달달한 향이 지나면 따듯한 벽난로의 냄새가 난다. 시간이 지나면 상큼하고 부드럽고 따듯한 향이 된다.


지금의 내 향은 잇 더 피치인 걸로. 올해의 향수병은 성공인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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