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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Mar 22. 2022

0. 편협한 책 취향

조금만 솔직한 독립출판 편집자의 글

0. 습관처럼 일을 벌이고 있었다. 책 4권과 워크숍 2건과 기사 2건과 프로젝트 1건을 아주 게으르게.


1. 여름쯤에 내면 좋겠다 싶어 준비하던 책은 너무 잘 만든 아카이빙 책을 만나 현타를 씨게 맞았다. 맞다. 내가 생각한 건 무조건 남이 먼저 생각한 거라고 인지하고 있으면서. 그래도 어찌어찌 기획서를 오늘 마무리했다. 저 책이 천 사포라면 내가 만들 책은 종이 사포 정도로 결이 다르니까 괜찮아라고 독려하면서. 예시 안까지 뚝딱이며 만들 예정이었다.


2. 앞으로 벌일 일은 프로젝트 1건을 제외하면 전부 독립출판과 관련된 일이다.


3. 그중에는 실용서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 워크숍을 준비하다가, 이걸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면 조금 더 도움을 줄 수 있겠다 싶었다. 내 경험을 정리하는 느낌도 있었고. 분명 선한 마음에서 시작된 실용서다.


4. '솔직히 말해서'를 안 좋아하는데. 강한 감정에 강한 욕설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듯이 '솔직히 말해서' 이외에 붙일 말이 없다. 저 선한 마음은 오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5. 운전에 자신감이 붙었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사고가 나기 전에 잠시 차에서 내려야겠다.


6. 종이 사포 책 기획서에 아주 너무 자랑스럽게 자신을 '독립출판 덕후'라고 칭했다. 이건 이번해에 생긴 흑역사다. 매해 무지함에서 오는 흑역사를 갱신하고 있다. 물론 읽어본 책이 많다. 내가 책을 읽는 속도보다 세상에 책이 나오는 속도가 더 빠른 게 문제가 아니었다. 편협한 취향에서 오는 문제였다. "요즘은 책을 굿즈 정도로 생각해서 쉽게 쉽게 내는 거 같아요."에 사람의 생각은 다양하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했는데. 뒤돌고 보니 내가 굿즈 사듯이 책을 골라서 사모은 게 아닐까 부끄러워졌다. "책 안을 보지도 않고 그냥 사요?" 했던 한 작가님의 말이 (저 뜻은 아니었겠지만) 마음에 남아 있었는데, 왜 계속 남아있을까 싶더니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책의 역사나 본질을 따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취향에 맞는 책을 사모으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이 편협한 책 취향으로 과연 덕후라고 칭하며 독립출판에 대해 설명할 자격이 있을까의 부끄러움이다. 


제목에 겁먹고 보지 않았던 책이 있다. 꽤 인기가 있어 여러 책방에서 판매했고 품절되었다. 우연히 다른 정보를 찾다가 리뷰를 보게 되었는데 제목과 다르게 내용은 무섭지 않았다. 그 책을 다시 만나면 사기로 결심했다. 덕후의 오만했음에 반성에 반성에 반성을 하며.


7. 실용서 제목을 '조금만 솔직한'이라고 짓길 잘했다. '크게 솔직한'이었으면 이 글 못썼다.


8. 실용서에는 도움이 되는 정보를 담으려고 했다. 목차를 짰고 어떤 내용을 넣을지 대충 줄거리를 써 놓은 상태다. 하지만 편협한 취향으로 겪은 편협한 경험으로는 줄거리에 살을 붙여도 허울만 좋은 글이 될 거다.


9. 적재적소에 유머를 섞는 사람이 부럽다. 그저 부럽기만 했는데 그 사람의 머릿속에 얼마나 방대한 정보량이 있으면 센스가 튀어나올까가 생각 든다. 센스는 타고나는 것이라 여겼는데 똑똑해야 있는 거였다. 똑똑하려면 많이 알아야 하고 잘 이해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주변의 센스쟁이가 몇 떠오른다. 이 똑똑한 사람들. 앞으로 저랑 더 친해져 주세요.


10. 습관처럼 벌여놓은 일을 잠시 멈추고 정비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똑똑한 사람에게 센스를 배우고 편협한 취향을 살살 때려치고 오만했던 마음을 고쳐먹어야겠다. 부끄러움을 기획서를 쓰기 전 남겨놓는 것은 한 책에서 읽었듯 '궤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방향'을 잡기 위해서다.


11. 예전엔 초고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초고가 부끄럽다. 조금만 부끄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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