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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zy Sep 06. 2022

일기 _ 황정은

책으로 생각하기

결혼을 하고 주말이면 양가 부모님이 갑자기 들이닥치시고 그렇게 시간이  가버리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어서 무언가 계획을 하고 어디론가 나가야   같은 조바심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집에서는  빼고  집돌이 집순이기도 하고 코로나 이후로 예상에 없는 방문이 줄어드니 집에 있는 시간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에는 하루는  쉬고 하루는 집안 정리를 열심히 했다. 창가에 책상  개를 나란히 놓고 무언가를 하는게 좋아 보여서 조금 무리해서 책상을 놓았더니 서랍 하나는  열리지도 않고 새벽에 조용히 일어나서 뭐라도 끄적이고 싶지만 잠자고 있는 사람을 두고 우다다다 타이프를 치기도  그래서 결국 책상을 나란히 놓는걸 포기하고 정리를 했다. 그러다 언젠가 사놓은   뭉치를 발견하였다. 웬만해서는  사놓고서는 까먹는 일이 없는데 정말 바쁠 때였는지 완전히 잊어버린 책들이었다. 그렇게 읽게  #황정은 #일기


황정은 작가의 디디의 우산을 읽고 같은 시대를 살면서 같은 일을 겪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글로 잘 표현할 수 있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이로웠다. ‘일기’는 소설에 비하면 짧은 글이지만 잔상이 전혀 짧지 않고 한 단락마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었다. 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들은 다 다르게 반응하겠지만 나는 아주 짧고 큰소리로 호들갑스럽게 소식을 전한다면 황정은 작가의 글은 세세하게 글자로 그린 점묘화 같다. 차분하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깊다. 광장에서의 이야기나 세월호에서 이야기나 마음 한 번 아프게 스쳐 지나간 일들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게 해준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는 일에 대한 의미, 작가의 역할을 깨닫게 해주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읽었다. 마지막 챕터를 읽기 전까지.


“남자아이들이 주도하는 모험에서 여자아이들은 만져지고 꿰뚫린다. 남자아이들의 호기심을 충족하기로 마음먹고 모험을 행 할때, 가장 가까이 있는 여자아이가 대상이 된다. 남자아이들은 '어린아이다운' 호기심을 충족하고 '모험'을 완성하지만 여자아이들은 남에게 말하지 못할 수치로 그 일을 기억에 남긴다. 일곱 살에 겪은 일을 마흔이 넘어서도 잊지 못한다.”

일기, '흔' _ 황정은 2021


어릴 때 적당히 예쁘장했던 나는 어디서든 귀염을 받았는데 사촌오빠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들은 셋이 있었는데 다 친절하고 나와 내 동생을 잘 챙겨주었다. 당시 일 년에 제사가 13번이 있어서 엄마가 아침부터 혹은 전날부터 큰집으로 가서 제사음식을 하면 그 사이에 우리는 오빠들이랑 놀았다. 큰집에는 드래곤볼이나 북두신권 슬램덩크 같이 그 당시에 유행하던 만화책이 시리즈로 있었고 놀게 많았다. 집에서는 늘 잔소리 폭탄을 던지던 엄마도 큰집에 가면 일하느라 바빠서 우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 큰집에 가는 게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적당히 크고 오빠 한 명도 적당히 크면서 적당한 스킨쉽이 적당하지 않게 되었다. 병원놀이를 한다면서 눕혀 놓고 짓누르거나 간지럼을 태우면서 점점 정도를 넘어섰는데 이불을 뒤집어 쓴 놀던 때와 자고 있던 그날 밤에 입안으로 따뜻한게 들어왔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따뜻한 손길은 좋았는데 무서웠고 하면 안 될 짓을 한 거 같아 아무에게도 말을못했지만 그날 이후로는 큰집에서 자는걸 꺼려하게 되었다.


그 기억은 꽤 제법 오래 날 괴롭히는데 "사랑받는다는 것"과 "호기심으로 만져보는 것" 의 경계에서 늘 혼란스러웠고 대부분은 후자였다. 그럼에도 관계가 중요했던 나는 투쟁적이지도 못하고 적당히 맞추고 적당히 그러려니하며 살았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큰일은 안 당했지만 침묵의 비겁함은 안다. 문제가 생길까봐 무서웠고 관계가 끊길가봐 모르는 척 했다. 그 상황도 내 마음도. 상처받을 상황에서 내가 지켜야 할 건 나 자신이었는데 내가 날 버려둔거다.


마음가짐을 좀 바꿔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시점에, 시작한 정리였고 그래서 발견한 책이 이 책이어서 좋았다. 작가님의 흔은 옅어졌다고는 하지만 가끔 마음의 생채기가 훅하고 돋아날 때가 있다. 상처는 그런 거 같다. 옅어진다고 해서 없어지지는 않는. 그래도 괜찮다. 그게 널 가릴 수는 없으니까. 책의 글을 빌어 나도 이야기한다.


"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일기 #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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