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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 Jan 12. 2024

ADHD 인간, 결국 회사에서 잘리다 (2)

#2. ADHD의 회사생활 일대기

#2. ADHD의 회사생활 일대기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건 24살, 갓 대학을 졸업했을 때였다.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에 빨리 취업을 해야 했고, 운 좋게도 나는 졸업하자마자 서울의 한 곳에 취업하게 되었다. 막 취업을 했을 때만 해도 ‘집으로부터 벗어난 나, 그렇게 철부지 같던 막내딸도 이젠 어엿한 사회 구성원이라는 사실, 드디어 나도 돈을 벌 수 있다‘와 같은 생각들로 설레기만 했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그런 생각들의 유효기간은 약 한 달뿐이다. 첫 직장은 여러모로 악명 높은 곳이었는데, 나 역시 그 속에서 활활 불태워지며 하얗게 잿더미가 되어갔다. 욕을 먹고 폭언을 듣고, 가끔은 날아오는 물건에 맞았지만, 그게 잘못된 것인지도 모를 만큼 어린 나이였다.  


' 언젠가 일에 적응하면, 실수가 줄어들면, 저기 저 날아다니는 선배처럼 나도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야' 하고 생각하며 매일 출근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입사 후 1년이 지났음에도 나는 동기들과 비교해서 여전히 실수 투성이었고, 상사들은 '아무리 가르쳐도 일이 늘지 않는 멍청이'를 타깃으로 잡고 안주처럼 씹었다. 모두가 날 비난하는 그곳에서 나는 서서히 부서져갔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땐 모아둔 돈도 없었지만 당장 서울역에서 노숙을 해도 여기보단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주 추운 겨울날, 결국 나는 그곳을 박차고 나왔다. 근무일 1년을 겨우 채운 시점이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겉옷을 비집고 들어오던 그날의 느낌이 생생하다. 그 날, 집에 오는 길 내내 나는 많이 울었다.


 첫 직장을 퇴사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퇴사의 주된 이유가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믿었다. 이 또한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그 당시에는 스스로의 업무 생활을 돌아보고 내 문제점을 알아차리기에는 심적 여유와 스킬이 부족했었다. 그래서 개인에 대한 성찰 없이 무조건 회사 잘못! 이라고 나를 다독였고, 내가 가진 문제를 발견하기에는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약 두 달 후 모아놓은 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울의 어마어마한 물가와 월세는 사회초년생 백수에게는 거대한 해일처럼 두려운 것이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구직사이트를 뒤지고, 몇 배는 후려쳐진 월급이라도 날 써주는 곳만 있다면 들어가고자 애썼다. 결국 어느 한 곳에서 나를 받아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두 번째 직장은 업무강도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실수할 일도 적고 분위기도 매우 조용한 편이라 정신적으로 가장 편안(?) 했지만, 그런 곳은 역시나 월급이 아주 소박하다. 그리고 전 직장에서의 타격을 다 털어내지도 못한 채 입사했기 때문에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좀 편해지니 숨어있던 질병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면역력이 바닥이 되어 생긴 온 갖 염증으로 잔병치레를 하느라 꽤 긴 시간을 고생했다.

겨우 건강을 회복하고, 무난한 일들을 해내고, 그에 따른 귀여운 월급을 받으며 1년쯤 일 했을 때, 텅 비어버린 잔고를 보며 난 또 한 번 이직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매일 밤 인스타그램에는 이제 일에 익숙해진 전 회사 동기들이 또래보다 많은 월급을 받으며 여유를 부리는 모습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를 한평생 괴롭혀 온 가난도 자꾸 나를 부추겼다.

'평생 이렇게 너희 부모님처럼  전전긍긍하며 살고 싶어?'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데, 돈이라도 많이 모아놔야지.'


결국 나는 또 한 번 이력서를 작성하고, 구직사이트를 샅샅이 뒤지게 된다.






그리고 현 직장, 아니 이제 전 직장인가.

 나의 세 번째 직장에 입사하게 된다. 이전 회사들과 다른 직무였고, 외국계 회사라 수평적인 분위기였던 이곳은 내게 별천지였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멋진 서울 직장인'의 삶을 드디어 내가 살게 되는구나! 하며 행복한 상상에 빠졌다. 업무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처음이니까'를 믿으며 주어진 것을 해낸 지 어언 1년, 회사에서도 내가 적응했다고 생각했는지 이제 고강도의 업무를 쥐여주기 시작했다. 입사 1년 차가 해내기엔 어려운 업무가 맞았지만, 단순히 그런 문제는 아니었다.

 일을 하면서 스스로도 느낄 만큼 스케줄링이 안되고, 디테일한 부분이 무너지고, 마감기한을 제대로 못 맞추는 일이 반복되었다. 업무 일지를 쓰긴 쓰는데 쓰다 말았다 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써야 할지 감을 못 잡았다. 일정을 자꾸 까먹고, 반복된 실수를 했다.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그 해 연말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게 되었다.


그때였다. 처음으로 어쩌면 '문제는 나에게 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성인 ADHD가 한창 매스컴에서 화두였다. 유명인들이 스스로 ADHD를 앓고 있음을 고백했고, 정신과 전문의들이 이에 대해 설명하는 콘텐츠들이 많아졌다. 내게는 그저 주의 산만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병이었다. 하지만 우연이 그 병의 증상을 모아놓은 체크리스트 보게 되었는데, 세상에, 누가 여기 나를 그대로 옮겨놓았나요? 완전 나, 그 자체였다.

점집에 가서 무당이 내 고민을 한 번에 알아맞힐 때 이런 느낌일까?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리고 그 길로 바로 정신과를 예약했다.


병원을 가서 진료를 받으니 역시나,

땅땅땅. 의사 선생님은 온화한 얼굴로 '당신은 ADHD가 맞습니다'라는 진단을 아주 명확히 내려주셨다.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까지 직장생활(더불어 학교생활까지도) 동안 내가 실수하고 자책하고 비난받던 순간들. 그리고 그 모든 좌절, 불안, 우울, 스트레스의 원인이 사실 정신병이었다니. 내가 평생동안 해 오던 고민들이 이렇게 한 단어로 정리될 수 있는 무엇이었다니. 그리고 어쩌면 평생 이것 때문에 약을 먹으며 살 수도 있다니.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당혹감, 신기함, 두려움, 불안 등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그래도 약을 먹으면 이제 혼나지 않는 <정상인>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잠시 했었던 걸 보면, 나는 지금껏 너무도  '일을 잘 해내는 사람' 으로 살고 싶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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