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ADHD를 진단받다.
천하의 게으르고 실수투성이에 모자란 놈 이 ADHD라는 이름을 얻는다는 건 꽤나 멋진 일이다.
더 이상 스스로를 욕하지 않아도 될 변명거리가 생겼으니 말이다. 사실 변명이 아니라 그게 진짜인데.
ADHD를 스스로 의심하고 인터넷에서 진단기준 등 관련 정보를 찾아본 후 병원에 들렀다. 긴장을 머금고 들어선 진료실에는 젊은 의사 선생님이 날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색하게 자리에 앉은 후, 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의 이야기를 이 난생처음 보는 남자에게 모두 늘어놓게 된다.
정신과에 가 본 환자들이라면 모두 자신의 초진날을 기억할 것이다. 그냥 내 이야기일 뿐인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눈물이 그렇게 난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의 책상에는 항상 환자의 눈물을 위한 휴지가 준비되어 있다. 눈물을 꾹꾹 참아가며 내 이야기를 했다. 처음 보는 그는 내 이야기를 경청하며 들어주었다. '그동안 힘드셨겠어요'라는 말 한마디에 와장창 무너졌다.
어릴 적부터 덤벙거리고 칠칠맞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세 자매 중 막내인데, 엄마가 학교 가기 전 세 딸의 머리를 묶어주면 나만 집에 올 때 산발이 되어있었다. 엄마는 내게 비싼 우산은 절대 사주지 않았다. 하나의 우산을 이틀 이상 사용해 본 적이 없이 무조건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산뿐 아니라 소지품을 잃어버리는 것은 일상 다반사. 여기저기 부딪히고 넘어지고. 항상 온몸에 알 수 없는 멍이 몇 개씩 있는 게 당연했다. 이 외에도 청소를 한번 시작하면 끝내지 못하고 옛날 앨범이나 만화책을 뒤적거리고 있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던가, 방이 항상 지저분했다던가, 모든 시험문제와 방학숙제는 단 한 번도 벼락치기를 안 한 적이 없던 것이 나였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고, 나 말고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정리 잘하고 차분한 애들은 그냥 성격이 그런 거고 나는 좀 털털하니까 이런 건가 보다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엄마도 나의 칠칠맞음을 이해해 준 점도 있었다. 공부를 잘한다는 건 나의 자부심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별 노력 없이 좋은 점수를 맞았고 남들보다 생각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학문의 수준이 올라가고 개인의 노력이 필수로 수반되는 고등학교에서는 현저하게 성적이 떨어졌다. 계속 앉아서 끈기 있게 공부를 해야 하는데, 배운 지식들을 연결해서 적용시켜야 하는데, 공부 계획을 체계적으로 짜고 시험기간 전까지 끝내야 하는데 나는 그게 어려웠다. 사실 그때는 뭐가 어려웠는지도 모른 채로 힘들어하며 3년을 보냈고, 그 공부 잘한다던 막내딸은 지방의 별 볼일 없는 대학에 진학했다.
성인 ADHD는 소위 '걸리는' 것이 아니다. 증상들을 어릴 때는 발견 못하고 성인기가 되어 발견할 수는 있어도, 소아청소년기에는 ADHD가 없다가 성인기에 ADHD가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ADHD는 12살 이전에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기본으로 본다.
- ADHD의 진단 기준 중
그 때문에 대학에서는 자존감이 많이 낮아져 있었다. 원하는 전공도 아니었고, 공부에 관심도 없어서 아르바이트와 술로 대학 생활을 보냈다. 그중 특이한 건 내가 하고 싶은 교양 과목은 누구보다 열심히 한다던지, 쓸데없는 PPT 제작에 꽂혀서 경영학과보다 더 멋진 PPT를 만든다던지 (우리 과는 PPT를 잘 만들 필요가 전혀 없는 과였다), 아침에는 도저히 일어나지 못해서 아침 수업은 매번 지각한다던지 하는 특징들이 있었다.
하지만 책임이 수반되지 않는 학생 시절에는 스스로가 ADHD 인 것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특히 과잉행동형 ADHD 가 아닌 나처럼 집중력 저하만 있는 조용한 ADHD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진짜 게임은 ADHD인이 취업을 하고 밥벌이를 한 그다음부터이다.
회사생활을 하며 내가 느낀 ADHD 증상들은 아래와 같았다. 그리고 이는 인터넷에도 이미 많이 나와 있는 증상들이다. 이 증상들을 내가 겪었던 실제 경험에 비추어 적어보았다.
업무에 오랫동안 집중하기가 힘들다.
ex) A라는 업무를 열심히 하고 있다가 갑자기 B라는 메일이 도착했다. 앗 B라는 메일 도착! 무슨 내용이지? 하며 B를 본다. B는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업무다. B를 열심히 해서 끝낸다. 갑자기 C업무가 생각난다. 아 맞다. C업무 해야 하는데. C업무를 한다. C업무를 하다가 관련된 가이드라인을 찾아본다. 읽다가 D에 대해서 내가 제대로 업무를 하고 있는지 걱정된다. D 업무를 열어본다. A 업무는..? 마감기한이 지난 후 상대에게서 왜 안 내놓냐는 메일을 받고 나서 알게 된다.
* 노력이 필요한 일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ex) 내가 오늘 마쳐야 하는 일은 A, B이다. 이것들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한 시간 이상 집중해야 하는 일이므로 굉장한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아 하기 싫어.. 그래도 해야 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온다. C 업무를 다음 주 수요일까지 해달라는 요청. C부터 우선 하자. C를 하고, D를 하고, F를 했는데도 A, B는 도저히 할 엄두가 안 난다. 머릿속에서는 A, B를 오늘까지 안 하면 벌어질 일에 대한 모든 상황이 펼쳐진다. 계속 고민한다. A, B를 오늘 꼭 해야 하나, 안 하면 어떻게 되나,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지금 시작해도 다 못 끝내지 않을까.
결국 A, B를 하지 못하거나, 기한을 늘려달라는 메일을 쓰게 된다.
* 약속이나 해야 할 일을 잘 잊어버린다.
ex) A 업무를 위한 출장을 한 달 안으로 꼭 나가야 한다. 출장지에 전화를 해서 담당자에게 해당 일에 방문이 가능하냐고 물어본다. 어랏. 근데 그날은 안되고 다음에 다시 전화 주면 알려주겠다고 한다. 그렇군.. 다른 일들을 열심히 하다가 시간이 지난다. 이미 머릿속에서 A 출장은 잊힌 지 오래다. 그러다 일주일 전, 또는 하루 전, 아니면 이미 시간이 지난 후 문득 A 출장 건이 생각난다. 이럴 수가. 망했다.
* 세부적인 면에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
ex) 회사 내에서 E 업무를 하는 절차가 변경되었다는 메일이 왔다. 나는 분명 그 메일을 읽고 인지했다고 생각한다. 추후 E 업무를 할 때 그때 읽은 메일에 따라서 절차를 수행한다. 그리고 그다음 날 팀장에게 연락이 온다. - E 업무 절차 변경되었다는 메일 못 봤어요? - 아뇨.. 저 봤는데, 변경된 대로 적용했는데요. - 근데 왜 이렇게 되어있죠? 아뿔싸. 메일 하단에 있는 굵은 글씨를 미처 못 읽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너무 많은 순간에 ADHD의 증상들은 업무 중 나를 괴롭힌다.
아마 일반인들이 성인 ADHD 증상을 검색한다면, 회사에서 일 더럽게 못하던 어떤 동료가 떠오를 수 도 있다. 부끄럽게도 그게 바로 나였다. 나는 ADHD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항상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동료, 노력해도 인정받을 수 없는 직원, 실수투성이에 신뢰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내가 속한 집단에서 매 번 최악의 인물이 된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이렇게 자주 비난을 받은 사람은 결국 스스로를 끝없이 자책하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미 찢어질 대로 찢어진 마음에 결정타를 내리는 한 방은 언제나 나 자신이 했던 모진 말 들이었다.
그런데 내 잘못인 줄로만 알았던 모든 것들이, ADHD라는 이름으로 불린단다.
내가 게으르고 칠칠맞고 모자라서가 아니라, ADHD라는 병 때문에 원래 해도 안 되는 것이란다.
그래서 많은 ADHD인들이 자신이 ADHD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얻는 충격과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 내가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이 있었던 거였구나. 하며 그동안의 처절했던 삶에 대한 위안도 받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대로이다. ADHD 임을 알았고, 내가 남들보다 부족한 이유도 이해했지만, 그동안 나조차도 알 수 없던 나의 행동들의 원인도 알게 되었지만, 그저 나에게는 ADHD라는 영어 이름이 하나 생겼을 뿐 세상은 내가 ADHD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너그럽게 받아주지 않는다.
ADHD를 몰랐던 때의 실수 투성이인 나와
ADHD를 알게 된 후에도 실수 투성이인 내가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