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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형 May 12. 2021

그대가 없는 그대의 세상

독서를 좋아하던 사람



우리는 당신의 바쁜 일과를 고려해 자주 집에서 만났습니다. 노트북에 시선을 빼앗긴 당신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터라, 언제부터인가 저는 당신을 만날 때면 가방에 책을 챙겨 다니기 시작했죠. 그렇게 몇 권의 책을 읽었을까요? 언젠가 한 번은 지루함을 이겨가며 겨우 한 권의 책을 완독하고 나서 괜한 투정을 부렸지요. 이제는 읽을 책도 없다면서. 그때 당신은 방 안의 서재를 가리키며 이것들도 읽어보라고 장난스레 말했습니다. 책은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을 더욱 넓혀 줄 거라면 서 그렇게 환하게 웃어 보였죠.



 당신의 책장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제일 먼저 집어 들었습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로 기억합니다. 당시 경제 서적만 읽어가던 저에게 소설이라는 장르는 생소하고 낯설었지만, 이전에 미처 몰랐던 몰입감을 가지고 빠져들었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도,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도 모두 당신의 집에서 읽어 내려가다가, 가끔 데이트를 하기 위해 나설 때면 미처 읽지 못한 부분들이 궁금해 제 가방에 넣어두고 빌려가기를 반복했죠.



 우리 이별했을 때, 당신이 남긴 모든 흔적들을 마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앙코르 와트 문양의 작은 열쇠고리도, 신발장에 놓은 검은 나이키 운동화도, 보테가 베네타의 지갑도, 무엇보다  미처 돌려주지 책 몇 권이 어렵게 삭혀두고 묻어두었던 그리움을 마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받을 때는 늘 고마워하고, 함께 할 때 늘 즐거워했던 당신의 흔적들을 힘겹게 받아들이며 참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덧 당신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또한 더 이상 당신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우리 함께 걸었던 길도 당신을 떠올리지 않고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의 소설 코너에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책을 보고는 문득 당신 생각이 났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 책을 몇 번이고 들춰보다가 마침내 계산대의 점원에게 건넸습니다. 이렇게 제 서재에는 당신이 보던 책 한 권이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제 더는 애타는 마음으로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저에겐 모든 그리움을 소진하고 고마움만 남았습니다.



 정말이지 당신이 열어준 세상을, 당신 없이 살아가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 혹시 우연히 마주친다면 안부 대신 요즘은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물어볼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지내시겠죠?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여전히 당신이 남겨놓은 흔적들을 소중히 안고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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