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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형 May 12. 2021

다행이야

인도에서 만난 중국 여인


미국인 아저씨는 모든 게 능숙했어요. 해마다 이 거리를 방문한다고 말한 그는 이 곳의 법도, 그 법을 위반하는 것에도 아주 능숙했습니다. 그런 그를 따라 몰래 길거리에서 술을 마시며 담배를 폈습니다. 길거리에서 술을 마시는 게 불법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술잔을 몇 번이고 나눈 뒤에 그가 설명하였음으로, 저는 그의 경험을 믿고 따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쎄이, 너 저기 경찰 부스가 왜 생겼는지 알아?”

“관광객이 많은 곳은 늘 위험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음... 2년 전에 저기서 일본 여자 하나가 성폭행을 당했어. 그리고 그 자리에 경찰 부스를 만든 거야.”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악명 높은 인도라는 사실을 다시 실감했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여정에는 그 어떤 위협도 없었으니 날이 갈수록 저는 이 평화로움에 익숙해진 지 오래. 미국 아저씨의 발언은 다시 한번 제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느 날 밤, 잠이 오지 않던 저는 몇 번 고민을 하다가 밖으로 나갔습니다. 남자인 나에게 별일이야 있겠느냐 생각하면서, 밤늦게 산책을 택했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한 아시아 여성 하나가 저를 붙잡았습니다. 그녀는 중국 사람이었는데 저를 보고는 정말 반갑게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마치 저를 아는 사람처럼 대하는 그녀였지만 우리 사이엔 도무지 어떠한 공통점도 있지 않았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 더욱 친근한 척 말을 걸어오는 그녀가 불편해진 터라 저는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녀가 울먹이듯이 제 소매를 잡고는 핸드폰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습니다.



한복 입은 남자의 사진. 바로 저였습니다. 그러니깐 제가 델리에서 한복을 입고 다녔을 때, 우리는 같은 숙소에 머물렀던 모양입니다. 서로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지만 우리는 이미 만난 사이인 셈이죠. 울먹거리는 그녀로부터 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습니다. 일단 그녀를 제가 머무는 허름한 숙소의 로비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잠시 기다리라 설명하고는 숙소에 있는 모든 중국인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녀는 콜카타로 오는 기차가 이렇게 늦게 도착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몇 번이고 연착을 반복하는 기차 덕에 정말 늦은 시간에 콜카타에 도착했고, 도착해서 숙소를 구해보겠다는 그녀의 생각은 이미 한참이나 빗나갔습니다. 그 와중에 어둠에 가린 낯선 풍경은 그녀가 감당하기엔 공포스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같은 아시아계 남성인 저를 보았고, 가만 보니 델리에서 한복을 입고 있던 사람이었답니다.


다음 날 점심. 중국인들은 저를 식사 자리에 초대했습니다. 어제 그 중국 여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찾았더군요. 제 앞으로 여러 번 접시를 밀어 음식을 권했습니다. 문득 그녀의 웃음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다행이라고, 참 다행이라고. 이 모든 게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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