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 기자로 산다는 것
사실 난 육아휴직을 간절히 바랐다. 기자가 되어 쉼 없이 달려온 인생이었고, 육아휴직이 하나의 '쉼표'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완벽한 '착각'이었다.
가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후배들이 "얼른 아기 가져서 육아휴직 가고싶어요"라고 말하곤 하는데, 겉으로는 그래그래 하면서 속으로는 '출근하고 싶을텐데'라고 읊조린다.
옛날(불과 10년도 채 안 된 일이지만) 선배들은 아기를 낳기 몇 시간 전까지도 기사를 쓰고 데스킹을 받다가 진통이 와서 병원에 실려가곤 했다고 한다. 병원으로 실려가면서도 그동안 해 왔던 취재 내용과 취재원 정보를 정리해서 후배에게 메일을 보낸 한 선배의 이야기는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치부에서 막달까지 기자생활을 해야했던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다. 만삭의 배를 끌어안고 급하게 잡힌 브리핑 일정을 챙기러 뛰어다녀야 했고, 뱃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마감에 허덕인 날이 비일비재했다. 그 날 기사가 마무리되고 나서야 "아! 나 임신했지!"하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결국 난 출산 예정일보다 '한 달' 먼저 휴직에 들어갔다. 몇몇 여자 선배들은 왜 이렇게 빨리 휴직을 들어가냐며, 아기와 보내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조언'해 주시곤 했는데, 아기를 낳고나서 생각했다.
'한 달이 아니라, 두 달 전에 휴직했어야 했어.'
우선, 만삭의 몸으로 한 달의 자유시간을 허락받았지만 사실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었다. 멀리 여행을 갈 수도, 그렇다고 밤새 술을 마실수도 없었다. 고작 한다는 건 서점에 가서 읽고 싶던 책을 마음껏 읽고, 보고싶던 영화와 드라마를 실컷 보고(이 마저도 나의 '최애' 공포영화는 보지 못했다), 카페에 앉아 인터넷 서칭을 하며 아기용품을 구매하는 정도의 행동들 뿐이었다.
그리고 출산을 맞이했다. 아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작았고, 난 생각했던 것보다 전혀 '엄마'가 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기가 2~3시간 마다 젖을 문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걸까. 유축기를 가슴에 대고 새벽에 눈도 뜨지 못한 채 젖을 짜내다보면 안 그래도 바닥을 친 내 자존감은 땅을 뚫고 지구 핵을 향해 내리 꽂힌다는 사실 역시 난 전혀 몰랐다.
첫째를 낳고 100일 가까운 시간을 난 친정에 있었다. 친정엄마 곁에서 도움을 받으며 아기를 키우면서도 난 한없이 우울했고, 온몸이 아팠다. 정신은 혼탁해졌고, 친정엄마에게 새벽녘 "엄마, 나 그냥 **이가 없어졌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난 기억에 전혀 남아있지 않은 순간이다.
'산후 우울증'은 남편도 좀먹어갔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폐인이 된 아내가 그를 기다렸다. 아기는 칼같이 깨어나 맘마를 달라 보챘고, 모유수유에 집착하는 아내 때문에 분유를 타 먹이지도 못한 남편은 그저 침통한 표정으로 젖을 물리고 있는 아내를 마주앉아 바라볼 수밖엔 없었다.
결코 육아휴직은 '쉼'이 아니다. 또 다른 '전쟁'이다. 아니, 어쩌면 더 험난한 '세계대전쟁'이다. 아기가 돌을 지나 사람답게 직립보행을 할 때까지 사실상 엄마는 엄마 혼자의 몸이 아니다. 아기와 늘 한 몸이다. '돌끝맘'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게 아닐 터.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은 그 시기가 지나고, 복직을 하고, 둘째를 낳았다. 내 생에 두 번째 찾아온 육아휴직은 '코로나'라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대환장 전염병과 함께 말아먹어야 했다.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한 채 두 아이를 끌어안고 외출 한 번 못한 채 보냈던 '집콕' 3개월은 다시 생각해도 처참하고, 또 처참하다.
육아휴직, 이제 다시 내 인생에 없을 그 시간. 난 후회 없다. 그래서 내 인생에 셋째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