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위트랜드 Jun 04. 2023

새벽 출근, 그렇게 잃은 두 번째 아이

워킹맘 기자의 삶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실 난 둘째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다.


당시 난 국가에서 운영하는 '아이돌봄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종일제 선생님께서 15개월 된 아이를 돌봐주셨는데

선생님께서는 가사를 제외한, 온전한 아이 돌봄만 해주셨기 때문에

주 6일 근무를 하며 (주 52시간 근무 체제가 도입되기 전이었다)

하루 쉬는 날 아이의 일주일 치 음식을 준비해놔야 했다.


약속이 있거나 일이 있어 늦은 퇴근을 한 날이면

자정이 넘어서도 다음날 아이가 먹을 음식을 미리 만들어놔야 했다.


(미리 생선을 구워 살을 발라 놓으면 그걸 데워 먹여주시거나,

국을 끓여 얼려 놓으면 녹여 먹여 주시는 방식으로 끼니를 해결해 주셨다.)


남편은 주 5일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주말 근무를 하는 날마다 '독박육아'로 아이를 돌봐야 했고

평일에도 선생님이 오후 8시에 퇴근을 하셔야 했기 때문에

정시 퇴근이 어려운 나보다 늘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정말 어떻게 하루하루가 굴러갔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의문 투성이인 1년 여였던 것 같다.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살아보라고 하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

복직 후 그 1년은 참으로 가혹했다.




 그 시기, 난 회사에서 주말 아침뉴스 진행을 맡게 됐다.

첫 앵커로서의 도전이었다.


다만 앵커를 한다고 해서 내 기존 업무가 줄어들거나 하지 않았다.


새벽 4시까지 출근해 회의를 하고, 아이템을 선정해 원고를 정리하고

아침 9시 뉴스를 진행하고 나면

다시 부서 업무가 시작됐다.


어쩔 때는 아침 진행을 하고 메인뉴스 출연까지 하다 보니

하루 17~18시간 근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 즈음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너무 피곤하고 몸이 좋지 않았다.

이상했다.

곧장 병원으로 가서 증상을 얘기하고 피검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임신'

둘째가 찾아온 것이다.


뜻하지 않았던 임신에 얼떨떨했지만

첫 초음파 사진을 건네받았을 때 기쁨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난 또 한 번, 엄마가 되는 기쁨을 누렸다.




첫째 때는 임신하고도 펄펄 날아다녔던 나는

이상하게 둘째 임신을 하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계속해서 아랫배가 아팠고, 잠도 거의 자지 못했다.


이제 임신 8주에 접어들었다던 의사 선생님의 말에

회사에 사실을 알려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도저히 이 상태로는 주말 진행에 주말 업무를 모두 소화해 낼 수 없다는 판단에

그냥 솔직하게 임신 사실을 회사에 알리기도 마음먹었다.




참고로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정말이지 지금껏

단 한 번도 '남녀 차별'을 경험해 본 적 없는 곳이다.


임신을 했다고 해서 특별히 내 업무에서 배제된 적도 없고,

충분히 내 몫을 하는 만큼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출산휴가를 떠나는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도

부서 내 최고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역으로,  

그만큼 나는 '임신부'로서 특별히 배려받을 수도 없었다.


밤샘 야근에서 제외되는 정도 외에는

모든 근무와 현장 커버 등을 똑같이 소화해야 했다.


일을 하다 보면 너무 바빠서

내가 임신부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먹기도 했다.


첫째를 임신하고 8개월 차에 접어들었는데

폭우가 쏟아지는 빗길에 시민 인터뷰에 나섰던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서러운 한 장면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인터뷰를 받다가 빗물에 미끄러져 넘어질 뻔한 걸

뒤에 서 있던 영상취재 기자가 잡아줘서 살았던 기억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당시 그 지시를 했던 선배의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ㅎ)


걸어서 15분 정도 되는 거리에 위치한 다른 출입처에서

10분 뒤 긴급 브리핑이 잡혔다며 빠르게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고

뙤약볕에 만삭의 배를 안고 뛰었던 기억,

수십 명의 취재진이 몰리는 기자회견 현장에서

인파에 휩쓸리며 싱크를 확보하기 위해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  와이어리스를 들고 취재원에게 달려들었던 기억 등 ㅎ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다양한 경험들이 많았다.

(물론 지금은 회사 사정이 많이 바뀌어서

임신부를 저런 식으로 현장에 내던지지 않는다.)


둘째가 생긴 그때도 업무 환경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주 6, 주 7 근무가 기본이었고

진행이 있는 주말에는 새벽에 나가 저녁 8시에 퇴근하는 삶이 이어졌다.


힘에 부쳤다.

집에는 첫째까지 있었다.

퇴근을 한다고 쉴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회사에 사정을 솔직히 이야기했다.

둘째를 임신했고, 지금 같은 업무 환경에서 버틸 수가 없다고.

그렇게 난 내게 왔던 '앵커'로서의 기회를 내려놓겠다고 회사에 얘기했다.

앵커로서의 삶만큼이나, 우리 부부에게 찾아와 준 둘째가 더 소중했다.


회사는 곧장 차기 앵커를 구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2주만 더 버텨달라고 했다.

난 그러겠다고 말했다.

아쉬운 마음만큼이나 2주라는 시간이 짧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마지막 새벽 출근을 한 다음날,

나는 둘째를 잃었다.





전날 너무 힘들어 퇴근하자마자 첫째를 아빠에게 오롯이 맡겨둔 채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 갔는데 속옷에 피가 묻어 있었다.

깜짝 놀라 곧장 산부인과로 향했다.


늘 다니던 곳이 아닌, 출입처 인근의 산부인과를 찾았다.


낯선 병원에서의 낯선 진료. 그리고 두려움.


초음파 검사를 하고 나서

의사 선생님은 잠시 간의 텀을 두고 내게 말했다.


"태아의 심장이 뛰지 않습니다."


지난주 분명 쿵쾅쿵쾅 힘차게 뛰던 심장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데

둘째의 심장이 멈췄다는 그 말이 전혀 와닿지 않았다.


"중절수술 날짜를 잡으셔야겠어요. 밖으로 나가 대기해 주세요."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명료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진료실 밖으로 나와 대기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냥 눈물이 났다. 주룩주룩.

멈출 수도 없었고,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그 2주간의 유예된 새벽 출근이 독이 된 걸까.

욕심부리지 말고 당장 회사에 못하겠다고 말을 했어야 했나.


모든 게 내 탓만 같았다.

내가 널 지키지 못한 것만 같았다.

이 못난 어미가 모두 잘못한 것만 같았다.


시어머님께 곧장 전화를 했다.

이상하게 친정 엄마도, 남편도 아닌 시어머님이 떠올랐다.


늘 밝게 통화하던 며느리가 전화통화 너머로 서럽게 울어대자

어머님도 깜짝 놀라셨을 것이다.


"어머니... 둘째가 심장이 뛰지 않는데요."

"그래그래. 괜찮다. 다 괜찮다."

"어머니.. 어떻게 해요. 우리 둘째가 죽었대요"

"아니다. 괜찮다. 다 괜찮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뱃속에는 심장이 뛰지 않는 둘째가 품어져 있었다.


남편은 조용히 첫째를 돌봤다.

어린 내 첫 아이는 엄마의 낯선 모습에

엄마를 찾지 않고 아빠와의 시간을 받아들였다.


다음날 나는 원래 다니던 산부인과를 찾았고,

똑같은 진단을 받았다.


"괜찮아요. 이건 엄마 탓이 아니에요.

8주 사이에 심장이 멈추는 건 원래부터 그럴 일이었던 거예요.

바로 수술 잡아줄게요."


첫째를 받아주셨던 선생님께서는 차분하게 날 다독거려 주셨다.




회사에는 2주간 휴가를 냈다.

회사는 내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충분히 쉬고 오라며 배려해 줬다.


친정엄마께 아이를 맡기고

혼자 여기저기 여행을 다녔다.


강원도 산골마을에도 가고,

경상도 어딘지도 모를 곳에 가서 정처 없이 걷기도 했다.


그러면서 난 둘째와의 이별을 받아들였다.




아가야, 잘 있니?


엄마는 아직도 처음 만났던 널 잊지 못한단다.

콩알만 한 네가 엄마 자궁에 딱 붙어 있었지.

쿵쾅거리던 심장 소리도 아직 귓가에 들리는 듯하단다.


엄마는 널 지키지 못했어.

그래서 너무 미안해.

평생을 너에게 죄지은 마음 잊지 않고 살아갈게.


엄마는 종종 예쁘고 고운 걸 보면

너를 생각하곤 한단다.


올해 봄꽃을 보면서도

엄마는 널 생각했단다.


아가야, 엄마는 너의 형제들을 위해

더 열심히 살고, 더 행복하게 살게.


너도 그곳에서

행복하게 지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 그때는

엄마가 널 지켜줄게!

현생에 못다 한 인연 그 이상으로

네 곁에서 엄마로서 살게.


사랑한다, 내 아가 ♥


한 번도 안아보지도, 얼굴을 마주 보지,

네 손가락 발가락을 세어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사랑한다, 내 아가.
















작가의 이전글 남편은 '돕지' 않고 '함께'여야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