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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스위트랜드
Apr 23. 2023
남편은 '돕지' 않고 '함께'여야 했다.
워킹맘 기자의 삶.
처음 만난 취재원들과의 식사자리.
이런저런 개인사를 이야기하다
내가 남매를 키우는 워킹맘이라는 얘기를 하면
대부분 "남편분도 기자세요?"를 가장 먼저 묻는다.
"아니요. 남편은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에요."
라고 대답하면 그다음 멘트는 늘
"남편분이 육아랑 살림을 많이 도와주시나 봐요."로 이어진다.
"남편이 육아와 살림을 많이 돕는다."
이 문장에서 '돕는다'는 표현이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난 늘 되짚곤 한다.
"아니요. 우리 남편은 많이 돕지 않아요. '함께' 하죠.
기자 와이프와 아이 둘을 키우며 산다는 건
단순히 도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내 대답에 대부분의 취재원은
'페미니스트 여기자 괜히 잘못 건드렸나 보다, 제길'이라고 생각하는 게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 표정을 짓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그럼요. 요즘은 남자들이 더 열심히 육아하고 살림해야죠."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 문구로 인해 화가 나는 것도 아니다.
정말, 남편이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 부부는 삶의 영위가 어렵기 때문에 팩트를 정정해 줬을 뿐이다.
1. 일이 많아 늦게 퇴근
2. 사건이 터지면 주말이고 밤낮이고 없이 회사로 뛰어가야 함
3. 2주에 한 번은 찾아오는 주말근무
4. 연휴 근무
5. 저녁약속이 많이 늦게 퇴근하는 경우도 다반사
6. 술자리가 많아 새벽 귀가도 잦음
7. 집에서도 일을 해야 할 때가 많음
8. 종종 출장을 가기도 함
9. 학교 행사 등을 잘 챙기지 못함
10. 자유
로운
휴가 사용이 제한됨
모두 내게 해당하는 문구들이다.
아빠가 아니라 엄마인 내게 해당하는.
열심히 활동하는 맘카페에도
위 조건들에 해당하는 남편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엄마들의 글이 종종 올라오곤 한다.
하지만 난 거꾸로 내가 저 조건들에 해당하다 보니
남편의 입장에서 변명 아닌 변명을 댓글로 달고는 한다.
바쁜 아내를 둔 남편은
늘 가사도 육아도 함께해야만 한다.
그래야 집안이 굴러가기 때문에
이는 필수불가결한 우리 집안의 조건이다.
내가 '페미니스트'라서 남편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엄청난 '양성평등론자'라서 그런 것도 아닌,
정말 살기 위해서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집은 아이들 학원비와 각종 공과금 납부,
양가 선물 및 기념일을 모두 남편이 챙긴다.
첫째의 학교 준비물도 남편이 주로 챙긴다.
(가끔 '콩주머니 만들기'처럼 손이 가는 준비물은
남편이 SOS를 요청해 내가 챙기기도 한다.)
최근 있었던 '학부모 총회'도
내가 혹시 가지 못할 가능성을 우려해
남편 역시 미리 휴가를 내고 함께 갔다.
(다행히 큰일이 없어 나도 함께 갈 수 있었다.)
첫째 학교에서 운영되는 '도서관 도우미 학부모 활동'도
엄마인 내가 시간이 안 되다 보니
남편이 주축이 되어 활동에 참여한다.
숙제는 엄빠 중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챙기고,
내가 출근하는 주말이면
아빠가 아이 둘을 데리고 여행을 가곤 한다.
엄마가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아빠는 색종이 접기를 좋아하는 남매와
유튜브로 새로운 색종이 접기 방법을 찾아
함께 종이 접기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한다.
덕분에 겨우 5살인 우리 둘째는
벌써 혼자 딱지 접기, 종이학 접기, 팽이 접기 등
수많은 고난도의 종이접기를 능숙하게 해낸다.
엄마가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아빠와 색종이접기 놀이를 하는 남매.jpg
대신 난 퇴근 후
아무리 늦어도 아이의 다음날 입을 옷을 준비해 놓고
책가방을 잘 쌌는지 점검한다.
엄마들과 단톡방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활발하게 하며
정보를 얻어오고,
주말 근무로 인해 평일에 대휴를 쓰는 날이면
하교 후 친한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베이킹을 하거나
키즈카페를 대관해 노는 등 또래 관계도 최선을 다해 돕는다.
남편은 육아를 돕지 않았다.
함께 했다.
덕분에 나는 회사에서
정말 힘든 직책을 맡아 1년여간 잘 헤쳐 나올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나와 함께 해준
남편 덕분이라고 감히 단언한다.
결코 내 능력이 아닌 것이다.
주변을 보면, 아이를 키우며
여성 기자로 사는 것이 힘들어
손을 들고 메인 부서를 벗어나거나
홍보팀 등 일반 회사로 이직하는 경우가 꽤 많다.
나 역시 이런 삶이 녹록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못할 정도는 아니다.
내가 놓치는 건 남편이 챙기면 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우리 부부는 복이 많아
좋은 이모님을 모실 수 있었고,
또 적절한 시기에 조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첫째가 초등학생이 되고,
둘째가 유치원생이 되고 나니
이제 조금 숨통이 틔인다.
어린아이들과 함께
힘든 맞벌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이 세상 모든 부모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부부가 하나 되어 그 시기를 잘 견뎌내시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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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를 키우는 여기자가 스위스 취리히에서 살아가는 좌충우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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