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도 무섭지만 현실도 무섭다.

by 하루진

3차 항암치료는 순탄하게 마무리되었다. 퇴원날 새벽에 쟀던 피검사 수치도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와 퇴원에도 문제가 없었다. 입원해 있을 동안 밥을 제대로 못먹어서 기운없는것 빼고는 컨디션도 비교적 괜찮았다. 이번이 무균실까지 포함해서 4번째의 퇴원인데 항상 집에 가는 퇴원길은 기분이 좋았다.


항암치료를 무사히 받았다는 것과 앞으로 남은 계단이 하나 줄었다는 것이 컸다. 물론 8차까지 항암치료를 다 받았을때 완치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8차까지 가기 전에 상태가 좋아질수도 있고, 8차까지 다 받고도 좋아지지 않거나 더 나빠질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부작용 없이 항암치료를 받고 나니 앞으로도 이렇게 몇 번만 더 받으면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지금은 그 동안 받았던 항암치료의 영향인지 비정상적으로 커졌던 비장도 정상으로 돌아와서 옆구리가 아프지도 않았고, 밤에 식은땀을 흘리는 경우도 없었다.


항암치료의 여파로 손끝이 저리고 체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지만 , 그걸 제외하고는 아프거나 통증이 느껴지는 곳은 없었다. 일단 퇴원만 하면 밥도 잘 먹었다. 여전히 살은 정상일때보다 10kg 정도 빠진 상태였고 강도가 센 운동을 하지 못해 체력도 정말 약한 상태였다.


그래도 지금의 상태는 처음 암 진단을 받고 혈액암으로 판명된뒤 느꼈던 공포와 절망감에 휩싸여 있던때보다 많이 좋았다. 장거리 운전이나 힘든 일은 아직 엄두가 안나지만 가까운 곳으로 산책을 가거나 장을 보고 영화를 보기도 하는 등의 일상은 충분히 누렸다.


입원해서는 항상 새벽부터 깨있다 보니 집에서도 일찍 눈이 떠졌다. 아침은 간단하게 삶은 계란 두 개, 그릭요거트, 견과류, 두유등으로 먹었다. 아침을 먹고는 집에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맨손 운동을 했다. 운동이라고는 했지만 유튜브에서 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은 뒤에 그중에서 가장 따라하기 쉬운 걸 하나 정해 반복했다. 떨어진 체력을 빨리 회복하고 싶었다.


간단한 운동뒤에는 노트북을 하거나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드라마를 보기도 했다. 오후에는 아내와 집주위 공원이나 동네 근처를 천천히 걸었다. 하루 하루는 평화롭게 흘러갔다. 딸아이는 인턴으로 들어간 회사에 출근했고, 둘째는 대학 생활을 이어 갔다.


내가 암에 걸린 상황만 아니라면 아주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하지만 아주 잠시간의 평화다. 얼마 후에는 또 항암치료를 받으러 가야 하고 갑자기 나빠질지도 모를 상황에 예의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 아직은 퇴직금등이 남아 있어 넉넉하지는 않지만 당분간 일단은 치료에만 신경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수입이 계속해서 없는 상황이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하기는 한다.


암도 무섭긴 하지만 현실은 잔인하다. 넉넉한 살람살이가 아니었던 탓에 팔자 좋게 그동안 벌어 놓은 돈으로 다 나을때까지 쉴 수는 없었다. 주변에서 부모님이나 친지들, 친구들이 조금씩 도와주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예전에 들어놨었던 보험도 진작에 해약해서 남은 건 실손보험 하나 뿐이었다. 치료비는 무시무시하게 나왔지만 산정특례를 받아 실제 내가 내야 할 돈은 입원할때마다 100~200만원 사이였다. 그리고 그것도 아직까지는 실손에서 지급이 되었다. 적어도 치료비때문에 머리를 싸맬 필요는 아직은 없었다.


새삼 그동안 얼마나 대책없이 살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있던 모든 것들은 내가 언제든지 건강하고 이상없다는 전제하게 세워진 것들이었다. 암에 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서도 막연히 나는 안 걸릴 줄 알았다. 그냥 지금까지 살았던 것처럼 앞으로도 살거라고 생각했다.


나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한 집안의 가장이었는데도 어쩜 이렇게 무책임했을까 반성한다. 물론 그간 가정에 충실했다고 자부하지만, 가장으로서 역할은 가정에 충실해서만은 부족하다. 내가 무슨 일이 있을때 남은 가족들이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난 참 대책없는 가장이었다.


과연 나는 언제쯤 다시 믿음직한 가장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암도 무섭지만 현실도 무섭다. 일단은 빨리 낫는것만 생각하자. 다시 건강해지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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