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겨진 시간

1. 그래서 써야 했다.

by 국콩

누군가 그것이 곧 올 거라고 말했다. 멀지 않은 과거의 나는 손사래를 치며 비웃었다. 나와는 거리가 먼, 아니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점 같은 이야기라고 치부했다. 삶에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될만한 수많은 점들 중 하나. 그래도 백번 양보하여 그것이 나에게 온다면 누구보다 화려하고 자유롭게 내 삶을 수놓을 거라고 생각했다. 멋진 해외의 야경처럼 내 삶을 반짝이게 만드는 영화 같은 한 장면이 될 거라 생각했다. 아니 착각했다.

어느 날부터 현관문은 빈번하게 여닫혔다. 나는 그 현관 앞에서 배웅하고 또 맞이했다. 세탁기는 매일 돌아가는 날이 많았다. 내 옷은 점점 줄었고 아이들의 옷은 커가는 키만큼 더 많아졌다. 퇴근하고 들어오면 집은 어둡고 조용했다. 가라앉은 공기에 스위치를 켜는 것부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변화들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나 혼자만의 시간과 적막 속에서 이불을 걷어차며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어느 날은 이것이 곧 사라져 버릴까 봐 숨도 안 쉬고 쇼핑을 즐기기도 하고 밀린 숙제를 하듯 핸드폰 이곳저곳을 기웃대다 오래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케케묵은 수다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자주, 그것은 나를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됐을 때도 먼저 와서 나를 기다렸다. 올 때마다 몸집이 커져 더 깊게, 더 길게 나와 함께하려 했다. 충동적인 쇼핑도 삶의 흐름이 끊긴 친구와의 대화도 그것을 영원히 내 삶과 연결 지어주진 못했다. 어느 날은 만사가 귀찮고 온몸이 무거워 침대에서 그것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의미 없는 영상과 관심 없는 뉴스들에 뇌를 마비시키면서 그것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것은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지고 나를 더 지치게 했다.

나도 이제는 서서히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과 함께하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한 게 아니라는 것을. 일상의 나로 돌아와야 했다. 이내 냉장고의 오래된 반찬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점점이 하얗게 곰팡이가 뒤 앉은 오래된 김치도 언제 제 역할을 다할지 모르는 온갖 소스들도 싱크대에 버려졌다. 냉장고는 조금씩 빈 공간이 생겼다. 어질러진 집안의 물건을 정리했다. 정전기포를 밀대에 끼워 집안을 한 바퀴 돌았다. 정전기포에 걸린 회색빛 먼지덩어리와 머리카락들이 나와 함께 집안 이곳저곳을 살폈다. 두 바퀴쯤 집을 돌고 난 후 정전기포를 몰래 피한 머리카락들을 돌돌이 스티커로 가둬 두었다. 생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문틈도 살펴보았다. 어디서 이런 먼지들이 들어왔나 싶을 시커먼 먼지가 흰 걸레를 금세 검게 만들었다. 저녁 반찬도 만들어 보았다. 인터넷 레시피를 보고 한 두 가지 만들면서 '사 먹는 게 이득이네' 생각했다. 요리 실력이 영 시원치 않아 삼십 분 밥을 먹기 위해 한 시간 동안 준비 해야 했다. 그래도 건강밥상이라는 뿌듯함에 나 자신을 칭찬하는 의미로 식탁 위에서 차려놓은 반찬들을 찍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바닥에는 늘 자잘한 장난감이나 만화책이 늘어져있었다. 하지만 집은 더 이상 시간을 오래 들여 치우지 않아도 될 만큼 깔끔했다. 아이들은 스스로 라면을 끓여 먹거나 컵밥을 데워 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때로는 먹고 싶은 것을 스스로 사 오기도 했다. 조금씩 내가 없어도 보낼 수 있는 시간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것이 온 것이다.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집에 홀로 남겨진 시간.

그래서 나는 써야 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나의 시간들을 위해. 아이들이 세상에 나아가는 만큼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나의 시간들을 환영하기 위해.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내 30대를 위로하고 그 누구보다 나의 40대를 내가 제일 사랑해 주기 위해. 그리고 화려하진 않지만 망가지지 않을 나 자신을 위해 쓰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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