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남한산성》
볕 좋은 날엔 부끄러움도 낮잠을 자지만 마침내 숨지는 못한다. ‘흑역사’.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 하나 없는 이는 없다. 창피는 마음이 헝클어져 풀어 헤쳐진다는 뜻의 한자어다. 그러니 결국 자신이나 타인에게, 그도 아니면 이불킥으로 쏟아낸다.
부끄러움을 안전하게 나누기가 참 어렵다. 신뢰의 위기로 불리는 시절인지라…. 우리 역사에 그런 장면이 많다. 부끄러움들이 외따로 맴돌았다. 소설 《남한산성》을 보자.
여섯 번째 산책 : 《남한산성》
깔보이고 부끄러운 게 치욕이다. 모래사장보다는 바위에 새겨지는 게 보통이다. 우리 역사의 치욕을 말할 때 흔히 서울 송파구의 삼전도비 바위를 떠올리곤 한다. 청나라의 무도한 침탈로 일어난 병자호란 당시, 조선 인조 임금이 청 황제에게 항복하면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창피를 겪은 후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이름으로 세운 비석이다.
삼전도비의 이력은 얄궂다. 구한말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한다며 고종 임금이 비각을 무너뜨리고 비석을 엎어버렸다. 그렇게 논두렁에 널브러졌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근사하게 재건해 보물로 지정했다. 해방되자 다시 뽑혔다. 한강 일부였던 옛 송파강변에 묻어버렸고 터만 남아 사적으로 낮아졌다.
몇 년 뒤 장맛비가 강변을 깎아내리자 삼전도비는 저절로 드러났다. 방치할 순 없으니 석촌동 벌판으로 옮겨 세웠다. 한때 거기를 공원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송파구의회가 계속 이전을 요청하면서 애물단지가 됐다. 누군가 밤중에 ‘철거 병자’라고 낙서하는 바람에 복원 작업도 해야 했다. 지금은 석촌호수 언덕 구석으로 옮겨져, 없는 듯 있다. 문화재 지위도 자꾸 바뀌었고 명칭 논란도 여러 번 일었다.
어찌해도 마뜩잖은 부끄러움이 새겨진 비석이라 그렇다. 50일간의 짧은 병자호란을 두고 지금껏 말들이 엉키는 것도 부끄러운 역사를 어찌 삼켜야 할지 난감해서인 듯하다. 전란 당시에는 오죽했을까.
병자호란 때 최후 보루는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이었다. 김훈의 《남한산성》에 그려진 치욕들을 볼 참이다. 김상헌과 최명길의 말다툼, 그리고 김상헌이 뱃사공과 대장장이와 나눈 대화를 들어보자. 남한산성은 역사지만 《남한산성》은 소설이다. 실존 인물 김상헌과 최명길도 좀 다듬어졌다.
만주 여진족이 갓 세운 청나라는 곧바로 중원의 새로운 중심이 되기를 노렸다. 조선에게 명과의 250년 사대관계를 끊으라고 강요했다. 청 황제를 새로운 군신의 예로 받들어 공물과 군사와 인질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조선은 응하지 않았다. 청은 후방을 굴복시켜 놓겠다는 속내로 약 400년 전(인조 14년) 압록강 얼음길을 건넜다.
조선은 기개만큼 든든하지 못했고, 청군의 기동력은 세찬 겨울바람이었다. 조정은 곧바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청의 기병은 순식간에 한강을 건넜고 삼전나루에 진을 친 채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고립된 겨울 산성은 급하게 말라갔으나 말(言)만은 마르지 않았다. 죽을지언정 화친이나 투항의 역사가 쓰일 수 없다는 척화(斥和)의 말과, 더 이상의 항전은 피해만 키울 뿐이니 일단 청과 군신관계를 맺고 후일을 기약하자는 주화(主和)의 말이 부딪쳤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척화를 웅변했고 이조판서 최명길은 주화를 대변했다. 여기까지는 역사다.
《남한산성》 속에서도 두 인물의 말다툼은 무겁게 이어진다. 적장으로부터 모욕적인 항복 권유를 받았을 때, 그리고 적장이 인조 임금의 설날 하사품을 돌려보내는 무례를 범했을 때 특히 그랬다. 김상헌은 삶을 구걸하려는 치욕, 죽음만도 못한 치욕은 견딜 수 없으니 싸워야 한다고 임금에게 고했다. 최명길은 반대 의견을 고한다.
"최명길 :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 상헌은 말을 중히 여기고 생을 가벼이 여기는 자이옵니다. 갇힌 성 안에서 어찌 말의 길을 따라가오리까.
김상헌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 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2007. 143p
최명길 : 전하,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 군병들이 기한을 견디듯이 전하께서도 견디고 계시니 종사의 힘이옵니다. 전하, 부디 더 큰 것들도 견디어 주소서.
--- 같은 책, 249p. (기한 : 배고픔과 추위)
최명길 : 창의를 불러 모은다고 꼭 화친의 말길을 끊어야 하는 것이겠사옵니까. 군신이 함께 피를 흘리더라도 적게 흘리는 편이 이로울 터인데, 의를 세운다고 이를 버려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김상헌 : 지금 묘당의 일을 성안의 아이들도 알고 있는데, 조정이 화친하려는 기색을 보이면 성첩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옵니다. 화자를 깃발로 내걸고 군병을 격발시키며 창의의 군사를 불러 모을 수 있겠사옵니까. 명길의 말은 의도 아니고 이도 아니옵니다. 명길은 울면서 노래하고 웃으면서 곡하려는 자이옵니다."
--- 같은 책, 146p. (창의 : 의병; 묘당 : 조정)
삶과 죽음, 그리고 의로움과 이로움이 치욕이라는 말 속에 어지러이 엉킨다. 이들을 옭아맨 건 정작 승패 여부가 아니었던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김상헌은 죽음보다 못한 치욕이라 했고 최명길은 죽음보다는 나은 치욕이라 했다. 남한산성에는 저마다 다른 무게의 부끄러움들이 흘렀다.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청에 항복하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 살 수가 없거나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게 김상헌의 말이다. 뜯어 보면 이렇다. 1) ‘명길이 말하는 생’, 즉 항복은 치욕스럽다. 2) 치욕스러운 삶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3) 고로 항복은 죽음이다.
1)부터 들여다보자. 항복은 부끄러운 일인가. 정말? 여태 명나라를 받들어 왔듯 새로운 강국을 따르는 것뿐인데, 와이낫?
부끄럽다는 ‘볼 낯이 없어 떳떳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보여주지 못하고 감추고 싶은 것이다. 일상 속 ‘쪽팔림’은 모두 ‘~에게’ 볼 낯이 없는 부끄러움이다. 항복하면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볼 낯이 없다는 말일까.
'성리학의 의리에게' 볼 낯이 없다는 뜻이다. 성리학에서 의리(義理)는 사람과 사회와 국가와 우주를 관통하는 올바른 이치와 마땅한 도리를 이른다. 항복은 불의(不義)하다. 불의이니 창피하다는 것이다. 왜 명나라를 섬기는 것은 이치와 도리에 맞지만, 청나라를 섬기는 것은 불의인가.
당시 성리학의 의리에는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가 담겨 있었다. 성리학은 한자를 사용하며 살아온 중국 한족이 송나라 때 체계화한 만물의 통합적 원리다. 명은 그 적통이다. 한족의 국가인 데다가, 강대한 몽골족의 원나라부터 한족의 나라를 되찾아 성리학을 부활시킨 국가다. 게다가 성리학적 질서로 조직된 삶을 통해 250년 이상 중원을 지배했던 글로벌 성공 케이스였다. 그러니 성리학을 무기로 역성혁명에 성공한 조선에게는 이상 국가로 받아들여졌다.
명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구원병을 파병하면서 이상국가가 지닌 의리를 드러냈다. 성리학적 질서는 이제 ‘중화(中華)’로 받아들여졌다. 중화란 ‘문명의 빛’이라는 뜻이다. '문명'은 자연 상태와 인간사회의 구분 기준이다. 결국 성리학은 인간 이하의 것과 인간을 가르는 기준이다. 성리학을 모르는 만주족의 청은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자 짐승이었다.
조선은 성리학 신념 체계와 중화 문명의 질서에 스스로 속함으로써 문명국으로 선택되는 선민의식을 누렸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유대인이 누렸던 선민의식 같았다고 할까. 오늘날 기독교 보수단체 집회에 성조기가 나부끼는 것과도 비슷하다. 개신교 기반의 미국을 하나님 왕국의 최고 성공 케이스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개신교 섭리의 대리인이듯 조선에게 명은 문명의 대리인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힌 지 4일째에 “성실히 대국(명)을 섬겨 받은 은혜가 많은데 하루아침에 원수인 오랑캐의 신첩이 되려 하니, 윤리가 사라진 때 절개를 지키고자 반정을 일으켰는데 끝내 견양(犬羊)과 금수와 같은 결과에 처했다”*)고 했다. 청 황제의 신하가 되는 것은 성리학의 올바름이 무너지는 일이자 사람이 개나 양이 되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 인조실록 1636년 12월 17일 2번째 기사)
항복이 왜 부끄러운 일인지 봤으니, 이제 2)의 문제를 보자. 부끄러우면 삶이 아니라 죽음인가? 성리학의 의리가 무너지면 삶이 아닌가. 성경이 부정되면 기독교인은 살 수 없는가 혹은 민주주의 이념이 무너지면 우리는 살 수 없는가와 비슷할까. 김상헌 같은 사대부에게는 그랬다. 단지 명분이라기보다 2가지 실질적인 점에서 그랬다. 성리학 의리는 당면한 국난을 극복하고 살아남는 데 실질적으로 이롭다는 점, 그리고 국난 이후에도 국가와 삶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반이라는 점에서 훼손돼선 안 될 가치였다.
김상헌은 성리학적 의리가 허물어지면 실제로 국난 극복 자체가 어렵다고 여겼다. 민족이나 국민 단위의 근대적 국가 개념이 흐릿했던 당시에 의병의 ‘의(義)’는, 믿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국가의 보전이나 백성의 안위보다는 성리학의 의리와 중화 문명의 수호라는 의미가 더 컸다. 중화 문명의 수호를 포기하면 의를 내세운 병사를 일으키는 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화(和)자를 깃발로 내걸고서야 군병을 격발시키며 창의(唱義)의 군사를 불러 모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 지방의 병력을 부르는 인조의 격문에도 명의 은혜가 명분으로 내걸렸다. “너희 사대부와 백성들은 천조(天朝·명)의 은택을 똑같이 받았으니 … 이때야말로 바로 충성스런 신하들과 의로운 선비들이 몸 바쳐 나라에 보답할 때일러라.”*)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명을 치려고 하니 길을 내달라’는 명분으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자, 의병을 부르는 국가 공식 격문에 “중화가 바뀌어 오랑캐가 되고 인류가 변해 금수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라고 쓰였다.**)
(* 박기상, 이덕양, 《湖南丙子倡義錄》, 1762. 신해진 역주, 《호남병자창의록 : 병자년 호남창의 기록》, 태학사, 2013. 31~32p. ** 계승범,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역사의 아침, 2011. 60p. 이 격문은 학봉 김성일이 썼다.)
김상헌이 직접 쓴 항전일기 《남한기략》에 이런 기록도 나온다. “우리 조정이 나라를 세운 것은 명분이 올바르고 당당하였사온데, 지금 만약 머리를 수그리고 오랑캐의 신하가 되어, … 그리하여 초야에 있던 의로운 뜻을 지닌 사람들이 통분하여 죽고자 하면, 말하기조차 어려운 변고가 있을까 더욱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분이란 조선 건국 이념인 성리학의 의리다. 의리가 틀어지는 부끄러움으로는 전란을 넘길 수도 없거니와 나라를 지탱할 수 없다. “명길의 말은 의도 아니고 이(利)도 아니옵니다. 명길은 울면서 노래하고 웃으면서 곡하려는 자이옵니다.” (* 김상헌, 《南漢紀略》, 신해진 역주, 《남한기략》, 박이정, 2012. 40p)
잘 짜인 소설의 한 마디 대사에 인물의 전체가 깃들고 세상을 덮는 신록의 눈부신 연둣빛도 4월의 잎새 한 장에서 배어 나오듯, 만약 일상 행위 하나하나에 단일한 원리가 스며 있어야 한다면 어떨까. 파스타 메뉴를 정하고 와인을 음미하는 매너에, 혹은 옷을 입거나 문안 인사를 드릴 때, 또 데이트 상대, 버스 노선, 작업장 근로 시간, 직업의 귀천, 국가의 정책을 정할 때, 심지어 적과 싸울 때의 병력 배치에조차 하나의 원리가 스며 있어야 한다면 어떨까?
조선 시대 삶의 질서가 그런 것이었다. 엄밀히 말해 개국 150여 년이 흐른 1500년대 후반부터 정치와 사회를 주도한 사림(士林), 흔히 사대부라 불린 이들이 추구한 삶의 질서가 그런 것이었다. 그게 성리학(性理學)이다. 우주와 사회와 사물과 인간 전체를 하나로 꿰는 본성(性)적 이치(理)가 있다. 그 이치란 만물이 음양의 꼬리를 물고 하나로 순환하는 태극의 조화이자 하늘의 질서다. 저절로 있지는 않다. 제각기 달리 있는 개체들에 깃들어 머물러 있다. 제각기 달리 있는 것들은 이치에 참여해 북돋고 실현해야 의롭다.
그 의로움을 실현하는 방안이 《대학》의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다. 요약하면 만물의 원리를 바르게 탐구하여 올바른 뜻을 세우고, 그 뜻으로 제 한 몸을 흠결 없이 갈고 닦은 후에 사회와 정치로 퍼트린다는 것이다. 만물의 이치가 개인 수양의 도리로 내면화되었다가 정치·사회 윤리로 외면화해 다시 만물의 이치로 순환된다는 생각이다. 외따로 있는 의로움은 없었으며 하나가 훼손되면 다른 것도 훼손됐다. 세상 이치, 개인 윤리, 정치 윤리의 삼위일체가 유일한 의리이자 명분이고 질서이자 문명이었다.
개인의 도덕적 품성 향상이 정치와 한시라도 분리되면 ‘니나 잘 하세요’가 된다 여겼다. 정치는 절충과 조정보다는 단일한 도덕 이념의 실현 수단이었다. 국가도 그 이념의 파수꾼이어야 했다. 의리는 바뀔 수 없지만 파수꾼은 바뀔 수 있다. 고려를 무너뜨린 명분이었고, 명·청 중립외교를 펼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정권을 잡은 정당성이었다. 인조반정 직후 인조는 “짐승의 땅이 다시 사람의 세상이 되었으니 뭐라 형언할 수 없다” 했다. (* 인조실록 1623년 3월 17일 7번째 기사)
나라와 임금은 다시 세울 수 있어도 성리학적 의리가 넘실대지 못하면 끝이었다. 청에 항복하는 것은 불의하며, 불의는 개나 양이 되는 일이니 부끄러우며, 부끄러우면 삶의 질서가 아니라 죽음이었던 것이다. “전하, 명길을 멀리 내치시고 근본에 기대어 살 길을 열어 나가소서.”(314p)
“전하,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최명길이 말하고 있는 치욕은 청에게 항복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항복이 견딜 만하단다. 죽을 만큼 부끄럽지는 않다는 것이다. 성리학적 의리에 어긋나면 사람이 개나 양으로 떨어지는 일인데, 어째서 부끄럽지 않단 말인가?
“싸울 자리에서 싸우고, 지킬 자리에서 지키고, 물러설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이 사리(事理)일진대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이겠습니까.”(142p) 청에 항복하는 게 불의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임기응변도 성리학의 이치와 도리 속에 포함돼 있으니 '성리학의 의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명길이 병자호란 전에 올린 상소문을 보자. 청의 침입을 막으려면 다양한 외교 정책이 필요함을 밝힌 상소다. “대체로 일을 수행하는 방도에는 정상적인 것(正道)과 임기응변적인 것(權道)이 있으며, 일에는 급히 처리해야 하는 것과 늦게 해야 할 것이 있으니, 어떤 때이든 의(義)도 때에 따라 달라집니다.”(* 최명길, 《丙子封事》, 신해진 역주, 《병자봉사》, 역락, 2012. 87~88p)
물론 최명길이 당시 성리학적 의리의 경계선을 정할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고 하긴 좀 그렇다. 병자호란 전부터 성리학의 윤리가 때로 정치의 발목을 잡는다고 여기며 의문을 제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부국강병과 민생 안정의 시급함, 중원의 세력 판도 변화, 실용을 강조하는 양명학과 상수학의 영향, 그리고 명분 다툼을 둘러싼 정파의 분열 등에 주목하면서 정통 성리학에서 한발 물러섰던 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긴 해도 성리학적 의리로 무장해 광해군을 몰아낸 1등공신 이조판서 최명길을 성리학 '잘알못'이라 할 순 없다. 항복 역시 의리에 닿은 것이라고 넓게 해석했을 뿐이었다. 당장 이길 수 없는 싸움은 모면하는 것이 국가를 보존하는 의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므로 치욕(항복)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
성리학 의리의 기준에서 죽을 만큼 창피한 게 아니니, 항복은 죽음이 아니라 또 하나의 삶이다. 최명길을 비롯한 몇몇 주화론자들은 병자호란 전부터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고 주민등록을 정비해 공평한 납세와 군역을 통한 부국강병을 추진하려던 이들이었다. 잠깐 항복하는 게 비록 성리학에 무지한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이긴 하나, 장차 부국강병과 민생 안정에 힘쓴다면 저들에게 다시 문명의 의리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군신이 함께 피를 흘리더라도 적게 흘리는 편이 이로울 터인데, 의를 세운다고 이를 버려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여전히 의로움의 바탕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이로움을 말해도 무방했다. 성안은 말라 갔고 바깥 구원병은 잇달아 패전했다. 이미 진 싸움이었다. 강토와 백성은 밟히고 있었다. 당면해도 모면할 것은 있어 다르게 당면할 수 있을 테니 국가와 강토를 보존하고 청의 약세를 기다렸다가 의를 세우는 것이 이로운 방편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말라가는 성에서 삶과 죽음, 긍지와 치욕, 항전과 항복의 미학이 저울질됐다. 척화파와 주화파는 항복의 무게를 달리 쟀다. 성리학의 의리에 어긋나니 부끄럽다는 입장과 크게 어긋나지도 않으니 괜찮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저울의 기준은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의리에 어긋나면 부끄러워 살 수 없다'는 기준 말이다. 부끄러운 삶은 삶이라 받아들일 수 없었는가. 말했듯이 김상헌은 그렇다고 했다. 최명길은 어땠나.
살아 움직이는 마음이 한곳에 오래 머물면 병이 되곤 한다. 병이 커지면 감당할 환부도 깊어진다. 제 몸을 갈고 닦는 데 오래 머문 사람일수록 실수가 인정되기 어렵다. 부끄러움도 덩달아 무거워진다. 갈고 닦은 마음으로 사람에게 나아갈 때 그 병폐가 사람에게 미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자칫 적대를 부른다.
개인 윤리 수양을 과신한 사대부들은 그 윤리를 사회를 대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로까지 확장했다. 도덕군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권력을 쥐면 정치적 견해는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이거나로만 갈린다. 유용성 다툼과 달라서 도덕성 다툼은 피를 부른다. 도덕적이냐의 기준은 성리학의 의리에 달렸고 그 판단 권한은 사대부에게 있었다. 도덕적 견해인가는 사대부의 생사를 가를 사안이었다. 견해가 다른 이는 의리 없는 무도한 이며 짐승이어야만 했다.
지금 우리 세대가 도전 중인 겨우 수십 년의 실험 그러니까 도덕성 판단 권한을 각자 다른 국민 눈높이에 맡겨보는 민주정치체제와 달리, 사대부 집단이 그 권한을 지닌 한 삶의 길은 그렇게 그들의 말길(言路)을 따라서만 흘렀다.
최명길도 기본적으로 다를 수 없었다. 정치를 이끄는 바른 윤리는 성리학적 도학이었다. 대명 의리도 장차 복원돼야 마땅했다.
초지일관의 원칙이냐 사정에 따른 임시방편이냐의 차이였을 뿐, 성리학적 의리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이었던 것은 다르지 않았다. 부모님 안부 인사를 게을리한 게 알려진 사대부는 목이 날아가거나 귀향을 가는 게 원칙인 세상이었다. 부끄러움은 받아들일 수 없고 창피하면 살 수가 없었다. 받아들여 본 적 없었으니 치욕을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버거웠을지 짐작 안 되는 건 아니다. 다만, 백성의 부끄러움은 좀 달랐다.
《남한산성》 초반부. 김상헌은 임금이 있는 산성을 찾아가다가 송파나루에서 얼어붙은 한강에 닿는다. 김상헌은 뱃사공의 안내를 받아 얼음길을 건널 수 있었지만, 도강 직후 사공을 벤다. 미처 죽음을 예감하지 못했던 사공이 김상헌과 나눈 대화가 이렇게 그려졌다.
김상헌 :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너는 왜 강가에 있느냐?
사공 : 갈 곳이 없고, 갈 수도 없기로….
김상헌 : 여기서 부지할 수 있겠느냐?
사공 :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까 해서….
김상헌 : 너는 어제 어가를 얼음 위로 인도하지 않았느냐?
사공 : 어가는 강을 건너갔고 소인은 다시 빈 마을로 돌아왔는데, 좁쌀 한 줌 받지 못했소이다.
김상헌 : 내 말(馬)을 주마. 오늘 나를 건네 다오.
사공 : 고마우신 말씀이나, 천한 사공이 배를 타지 어찌 말을 타리까. 더구나 눈이 쌓여 말먹이 풀을 구할 길이 없으니….
(강을 건넌 후)
김상헌 : 나는 남한산성으로 간다. 나를 따르겠느냐?
사공 : 아니오. 빈집에 어린 딸이 있으니…. 소인은 살던 자리로 돌아가겠소이다.
김상헌 : 알았다. 말은 주려서 마르기 전에 잡아먹어라.
사공 : 소인은 큰 짐승을 잡아 본 적이 없고, 백정들도 마을을 떠났소이다.
김상헌 : 나를 따르지 않겠느냐? 궁색해도 너를 거두어주마.
사공 : 아니오. 소인은 살던 자리로 돌아가겠소.
--- 같은 책, 43~46p. 편집 인용
대장장이 서날쇠와 나눈 대화도 잠시 듣자. 의병을 부르는 임금의 격서가 삼엄한 포위를 뚫고 성 밖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상헌은 서날쇠에게 임무를 맡기려 한다. 팔도의 지리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날쇠가 답한다.
서날쇠 : 조정의 막중대사를 대장장이에게 맡기시렵니까?
김상헌 : 민망한 일이다. 하지만 성이 위태로우니 충절에 귀천이 있겠느냐?
서날쇠 : 먹고 살며 가두고 때리는 일에는 귀천이 있었소이다.
김상헌 : 이러지 마라. 네 말을 내가 안다. 나중에 네가 사대부들의 죄를 묻더라도 지금은 내 뜻을 따라 다오.
서날쇠 : 나라에서 하라 시니, 천한 백성이 어쩌겠습니까?
김상헌 : 나라 얘긴 하지 마라. 그런 말이 아니다. 나를 도와다오.
서날쇠 : 하기사, 포위가 풀려서 조정이 돌아가야 성 안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저도 대장간을 굴려서 먹고살 수 있을 터이니….
--- 같은 책, 227~230p. 편집 인용
고립된 산성에 어가가 들어오니 추운 성곽 마을에 기댈 이가 1만 3,000을 넘었다. 좁쌀 한 줌 없이 들어온 조정은 식량과 사람을 징발했다. 기둥과 서까래를 장작으로, 초가지붕을 말먹이풀로 헐어 갔다. 조정이 나가야 백성이 살 수 있었기에 조정 대신 대장장이가 위험천만한 포위 속으로 나갔다. 뱃사공은, 살던 자리로 돌아가서 딸의 먹을거리를 구하려 했으니 눈치 없는 죄로 칼을 맞았다.
김경징이라는 이가 있었다. 병자호란 때 왕비와 왕자 일행은 강화도로 따로 피난 갔는데, 당시 강화도 방어책임자로 임명돼 같이 간 이다. 다급했던 한겨울 피난길에서 김경징이 자기 계집과 재산만 챙기려고 하인들을 팼다는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다.
“김경징은 제 어머니와 아내를 각기 가마에 태우고 계집종에게는 털모자를 씌워서 말에 태웠다. 늘어선 말이 50마리나 되었으니 서울과 경기도의 마부와 말이 거의 없다고 하였을 정도였다. 계집종 하나가 탄 말이 발을 절어 뒤로 처지자, 그 계집종과 말을 보호하여 가는 길을 돕지 않는다며 뒤따르던 각 고을의 관리와 하인들을 길에서 매질하였다.” (나만갑, 《丙子錄》, 서동인 역주, 한글번역본명《남한산성 항전일기》, 주류성, 2017. 157p)
“먹고 살며 가두고 때리는 일에는 귀천이 있었소이다.” 사대부의 말(言)은 제아무리 다투어도 사대부를 위한 말이었다. 말라가는 성안에도 유린 당하는 성밖에도 의리가 말해준 나라는 없었다. 백성은 제게 이로운 말길을 내지 못하니 말을 버리고 삶을 살았다. 말라서 열리든 깨져서 열리든 열릴 성문을 감당할 이들에게 삶은 먹고 살 쇠망치질과 풀무질과 뱃일이었다.
부끄러움은, 사대부들이 말하는 의리의 붕괴가 아니었다. 굶고 맞고 뺏기고 밟히고 헤어지고 끌려가고 겁탈당하기였다. 치욕스러우면 살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치욕이 삶이요 삶이 치욕이었다. 또렷하게 기록되거나 저울질 되는 치욕은 아니었다. 역사는 기록될 치욕과 스며든 치욕 사이로 흘러왔다.
의리를 다투는 삶은 얼마나 완전한가를 추구한다. 깻잎 밭 일궈 사는 이는 잘 자란 잎은 잘 자란 잎대로, 대충 자란 잎은 대충 자란 잎대로의 구실에 족한다. 의리를 놓치면 무너지는 삶도 필요하고 민들레 피면 살아지는 삶도 엄연하다. 하지만 척화와 주화가 부끄러움을 다투는 미학에 갇힌 사이 '살아지는 삶'은 도륙 났다. 도륙 난 삶들은 또 그것대로 '와닿지 않는 미학' 따위에 신경 끄고 빨리 성문이 열려버려 살 자리로 돌아가기만을 바랐다.
김훈은 거대한 치욕이 서로 외따로 쪼개져 간 시간을 붙잡으려 한 듯하다. - 자기 눈높이에 어긋나는 치욕(항복)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가 있었다. 그거 사실 막 그렇게 치욕 아니니 다독이자는 이도 있었다. 치욕인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한 채 이미 치욕에 적셔진 이들도 있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절대 건너다닐 수 없고, 문명과 야만은 결코 뒤섞여선 안 되며, 귀와 천을 가르는 벽이 높기만 했던 그 시절, 각자의 부끄러움들은 자기 안만을 맴돌고 상대의 부끄러움을 손가락질했다.
전란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명이 망해도 조선은 여전히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다. 떠올려 보면 백성을 길러야 한다는 목민관의 높은 말이 정작 백성을 향해 건너 가기까지는 참 더딘 세월이 흐른 듯하다. 정말 부끄러운 건 어쩌면 그 더뎠던 속도일지 모르겠다. 애물단지 같았던 삼전도 비석의 얄궂은 이력도 그런 창피함을 어떻게든 외면하고 싶어서일지 모르겠다.
남몰래 제 부끄러움을 감추려다 홀로 괴로운 이가 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헛된 부끄러움의 미학에 갇혀 혼자 용쓰는 이도 있다. 자기 부끄러움은 못 보고 남의 부끄러움만 들춰내 손가락질하는 이도 많다. 우리는 그렇다.
그렇긴 해도 그 시절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바란다. 떳떳하지 못한 일 안 겪고 사는 이 몇이나 될까. 그러니 자기만 홀로 겪는 부끄러움이 어디 있을 것이며, 이 밝은 시절에 나누지 못할 치욕이 또 뭐가 있을까.
부끄러움은 모래사장보다는 비석돌에 새겨지는 기억이라 기어이 숨질 못한다. 그러니 지금의 내 맴돌이를 극복하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또렷한 표식이다. 다른 이의 부끄러움을 담게 해주는 단단한 그릇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부끄러움을 안전하게 드러내고 평등하게 나눌 수 있다는 세상 아닌가. 부끄러움들이, 맞대서 기대면 주춤주춤 일어설 수 있게 내주는 서로의 등이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