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산책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by 무당벌레

#부모자녀 사이 #피해의식 #유대감, 동질감 #성숙

#감독, 각본 김세인, 2022.





‘좋은 부모’란 ‘나쁜’ 부모를 정해둔 말이다. ‘착한 자녀’ 역시 ‘못된’ 자녀를 구분하는 말이다. 가끔 그게 누구 입장에 선 구분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부모를 위한 자녀는 착한 자녀고, 자녀 보기에 좋으면 좋은 부모일까.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았는데!’는 나쁜 부모의 언어라 하고, ‘엄마(아빠) 때문에 망했어!’는 못된 자녀의 말이라고들 한다. 그럼 두 말이 충돌할 때는?


이번 에피소드에서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속 상처 주고 상처 입는 모녀의 말다툼을 구경할 참이다. 부모의 ‘내가 누구 때문에…!’라는 말에 상처받은 이가 있다면 딸 ‘이정’의 마음을 따라 읽어도 좋다. 자녀의 ‘엄마 때문에…!’가 내내 상처로 남은 이라면 엄마 ‘수경’의 편에서 읽어도 된다.





말다툼 산책 :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말다툼


시간이 갈수록 서로서로 피해의식만 두드러지는 사이가 있다. 버티다 못한 어느 날 마음을 풀고자 상대의 ‘찐사과’를 기대하며 부딪혀 본다. 하지만 대부분 적반하장 간 빅매치로 끝난다. ‘피해자인 나더러 가해자라니!’ 그게 친구나 동료 사이면 의연하게 양보해 버리거나 적당히 관계를 끊어버리기도 한다.


가족 간 피해의식이면 골치 아프다. 의연하기도 끊기도 어렵다. 독립된 개인이기 이전에 가족이면서, 가족이기 전에 한 개인인 사이에서 주고받는 피해의식이다. 내가 걷잡을 수 없이 화를 내거나 창피할 정도로 찌질해질 때는 십중팔구 가족에 대한 상처에 걸려있는 경우다. 그 상처가 지독하게 깊고 질겨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끝판왕은 아무래도 부모-자녀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았는데!’와 ‘엄마 때문에 이렇게 됐잖아!’ 간의 매치가 새기는 상처는 생각보다 깊다. 혹시 자녀가 낼모레 서른인 다 큰 딸이면 좀 다를까.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서로를 향한 지독한 피해의식에 붙들린 모녀 이야기다. 엄마 수경(양말복)과 딸 이정(임지호)은 함께 지낸다. 모녀는 한 사이즈의 팬티를 공유하는데, 이정이 엄마 수경의 사이즈에 맞춘 팬티를 입는다. 둘은 말다툼을 벌이다가도 한 서랍에서 같은 속옷을 꺼내 입는다.


쑥 증기와 열기가 매캐한 좌훈방을 운영하는 엄마 수경은, 아기였던 딸이 20대 후반이 되도록 홀로 키웠다. 딸 이정은 억척스러우면서도 자기중심적인 엄마에게서 종종 욕지거리와 손찌검을 받으며 자랐다. 요즘 들어 수경은 어엿한 성인 몫을 못하는 변변찮은 딸이 미워져 짜증이 심해지고, 이정은 그럴 때마다 엄마 옷을 몰래 가위로 잘라버리곤 한다.


대형마트 주차칸. 운전석의 수경은 조수석에서 씩씩대는 딸을 또 때린다. 이정은 차에서 쾅 내려버린다. 엄마는 전방의 딸을 향해 죽어버리라고 읊조린다. 그 순간 차가 급출발한다. 딸은 범퍼에 치여 넘어진다. 보험사 직원이 도착했을 때, 엄마는 급발진 결함이라고 주장한다. 딸은 담담하게 엄마가 일부러 그런 거라며 부인한다. 딸은 사고 합의서에 사인해 주지 않을뿐더러, 급발진 여부를 가리는 법정에서조차 보험사를 편든다. 기어이 엄마의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거다. 화가 난 엄마는 아파트 도어록을 잠가버린다.


수경과 이정이 노려본다. 일촉즉발. 출처 : 네이버 영화


자신과 재혼하려는 남자친구와 싸운 수경과, 전화를 받지 않는 사무실 후배 때문에 불안해하던 이정이 우연히 고깃집에서 마주친다.


"수경 : 너 태어났을 때 몇 킬로였는지 알아? 4.36이야 4.36. 그때 나는 몇 킬로였는지 알아? 39킬로그램. 니는 욕심이 너무 많아 원래부터. 젖은 또 얼마나 빨아대던지. 니 팔뚝에, 허벅지에 살들 다 니 건 줄 알지? 혼자 컸다고? 니가 뭘 먹고 컸는데? 가게에서 하루 종일 여편네들 밑 데우면서 번 돈이야. 땀구멍으로는 땀, 입으로는 남편 욕, 시부모 욕, 이웃 욕, 욕, 욕, 욕. 다 쏟아버리고 가. 그러고 다들 개운하게 집으로 가는 거야. 가게에, 내 몸에 그것들이 계속 쌓여. 공해야. 그것도 다 공해다? 몇 년을 그 증기며 공해며 버텨가며 번 돈. 그게 다 니 입으로 갔어. 먹여 살린 값을 해야지.

잔소리 좀 듣고 하는 게 뭐 어떻다고. 짜증 좀 받아줄 수도 있는 거지. 나도 적당히 살고 싶었어. 그렇게 억척스럽게 살고 싶지 않았다고. 나는 그깟 잔소리 좀 듣는 대신에 밥 먹여준다고 하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겠다. 어휴, 엄마가 많이 힘들어서 그렇구나. 엄마 그래 그래, 마음이 그렇구나…. 빨아먹을 거 다 빨아먹고 욕먹는 건 입에 쓰다고 뱉어? 너 진짜 의리 없어.


이정 : 엄마, 그럼 나는? 나는 어떡해? 엄마한테 쌓인 거 그거, 다 나한테 쏟아내면 나는 어떡해?


수경 : 너도 딸 낳아."

-- 영화각본집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출판사 클, 2023. 120~122p 편집 인용.


어느 날 수경은 이정의 방에서 그간 갈기갈기 조각난 자기 옷들을 발견한다. 수경이 이정에게 진짜 완전히 돌았다며 정신과 진료를 받으라고 윽박지르자, 이정은 정신병자 밑에서 자라 정신병자가 됐다며 대든다.


"이정 : 이거 다 엄마가 만든 거잖아. 나도 엄마도 지겹게 사는 거 다 엄마 때문이라고!


수경 : 내 탓 좀 하지 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응? 너랑 있다가는 아주 피 말라죽을 것 같아!


이정 : 나 죽이려고 한 건 엄마잖아. 나는 그날 놀랍지도 않았어. 학교에서 엎드려 있을 때, 사람들이랑 얘기 나눌 때, 회사에서 물품 정리할 때, 엄마가 있는 집에서, 아무도 없는 집에서, 언제나 그냥 갑자기 엄마가 나타나서 나 때리고 죽일 것만 같았어. 항상 그랬어!


수경 : 내가 너한테 무슨 뭘 대단한 거 한 줄 알겠다. 가게 오는 다른 엄마들도 자식 말 안 듣는다고 때리고 욕하고 다 그러고 살아. 그때는 힘들어서 다 그렇게 살았어. 다들 잘만 지내는데, 왜 너만 이렇게 유난이야!


이정 : 그래 나만 유난이야. 내가 비정상이야, 비정상. 엄마 나 진짜 정신병자야. 맞아. 그래서 나 친구도 없고 사람들도 다 나 싫어해. 내가 문제인 거 알아. 나도 엄마, 나도 알아. 저렇게 엄마 옷으로 지랄하는 거 나도 소름 끼쳐. 엄마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아. 엄마 미워하고 싶지 않아. 엄마, 근데 이거 다 엄마가 만든 거야. 엄마가 나 이렇게 낳고 이렇게 만든 거야. 다 엄마 때문이잖아. … 엄마 사과 한 번만 해. 엄마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사과 한 번만 해줘.


수경 : 젖 줄까…. 너 왜 자라지를 않아?"

(131~132p 편집 인용)


너도 자식 놔 봐…. 스며드는 맛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대화. 충돌하고 튕겨내기만 하는 딱딱한 감정 알갱이들. 로또 추첨기 안에 갇혀 난무하는 로또볼들. 그러고서 굴러 나오는 결코 원치 않았던 번호…. 이제 모녀에게 귀 기울일 차례다.



딸, 결핍의 피해의식

제발 사과 한 번만 해줘. 출처 : 네이버 영화

이정의 후배가 ‘왜 아직 집에서 독립하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이정은 “통장에 돈이 충분하지 않더라고. 제대로 준비해서 제대로 독립하고 싶었어. … 나 지금 웃기지?”라고 웅얼거린다. 학습지 판매대행사에 버젓하게 근무하는 20대 후반 성인이다. 뭘 더 준비한단 말일까. 독립이란 게 하는 거지 되는 건가.


이정의 스마트폰에는 업무 관련 메시지와 학습지 재고 사진이 고작이다. 이정은 차야 할 칸이 덜 찼고, 준비될 게 준비되지 못했고, 받을 걸 다 받지 못한 느낌에 휩싸여 있다. 사회적 상호관계를 의연하게 팔로우하기엔 막연히 배터리가 모자란 듯하다.


엄마가 이정에게 채워주는 건 짜증이었다. 엄마는 ‘식용유 대신 비싼 올리브유를 사 왔다고, 달걀프라이에 껍질이 씹혔다고, 손톱이 지저분하다고, 땀 냄새가 난다고, 보일러를 틀었다고, 불을 훤히 켜뒀다고, 샤워를 오래 한다고, 대답을 잘 안 한다고, 졸린다고, 덥다고’ 화를 냈다.


“언제나 그냥 갑자기 엄마가 나타나서 나 때리고 죽일 것만 같았어.” 엄마의 손찌검은 예측 불가능할 정도였다. 엄마는 손으로 입으로 이정의 모자람을 토해냈다. 이정의 첫 생리혈이 엄마 손에 묻었던 날에도 엄마의 반응은 짜증이었다. “아이, 더러워.”


“저렇게 엄마 옷으로 지랄하는 거 나도 소름 끼쳐.” 엄마는 자기 일에 바빠 이정의 중·고등학교 졸업식장에도 오지 않았더랬다. 그런 엄마가 남자친구로부터는 코트를 선물 받는다. 엄마 옷을 잘라버리며 이정이 정말 원한 건 엄마가 해주는 옷 선물이었을지 모른다.


“엄마한테 쌓인 거 그거, 다 나한테 쏟아내면 나는 어떡해?” 이정은 엄마가 자기 고통의 장막을 걷고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봐주길 기다렸다. 어릴 때부터 엄마 기분을 살폈다. ‘착한 아이가 못 돼 죄송하지만, 규칙을 정해 때려주면 감사하겠다’는 편지도 써 봤다. 커서도 엄마의 취향과 사이즈에 맞춰 속옷을 입었다. 엄마가 달라질 거라 기대했고, 그 힘으로 배터리가 채워질 거라 여겼다. 이정은 독립 ‘받고’ 싶었다.


부모에게 쓸모없는 년이라는 말을 몇 번 듣고 자라면 정말 그렇게 커버린 듯한 무의식이 작동한다. 성인의 내면에 웅크린 미숙아의 이름표는 대게 ‘부모로부터 결핍된 것에 대한 피해의식’이다. 성인을 순식간에 내면 아이로 급발진시키는 퇴행 방아쇠. 타인을 거쳐 보상받으려 들 때는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정이 유일하게 마음을 기댄 이는 사무실 후배 소희다. 이정이 집을 뛰쳐나온 어느 밤에 소희는 이정을 자기 원룸에 들인다. 그 밤 이후 이정은 소희가 건넨 사소한 호의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소희의 원룸을 드나들며 첫 생리 때 상처를 넋두리하거나 책장, 책상, 노트북, 이력서를 뒤적인다. “여기가 그냥 집 같다. 그냥 다 이해받는 거 같아. 나도 여기서 살까?”


말없이 맥주를 마셔주던 소희는 결국 섣불렀던 호의의 손을 거둔다. 소희는 일찍부터 집을 떠나온 케이스. 간신히 떨쳐낸 가족의 끈적한 그림자를 달고 들어오려는 이정을 받아줄 여유도 없다. 주렁주렁 자기 슬픔만 매단 이정이 부담스러워 소희는 결국 연락을 끊고 퇴사한다.


“나 진짜 정신병자야. 맞아. 그래서 나 친구도 없고 사람들도 다 나 싫어해. … 엄마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사과 한 번만 해줘.” 엄마 탓이다. 흐느끼며 비는 것도, 엄마를 미워하는 죄책감도, 홀로 설 배터리가 모자란 것도, 상처에 붙들린 것도, 소희가 가버린 것도 이정에게는 모두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였다. 엄마 옷을 자르면서, 꽃등심 30만 원 세트를 엄마 앞으로 달아 놓고 혼자 먹어치우면서, 자동차 사고가 엄마의 고의라 증언하면서 ‘가해자’로부터 마땅히 받을 '사과'를 받아내려 했다. 그걸 채워야 독립할 수 있을 듯했다.


“나 사랑해?” 사과를 못 받아낸 이정이 기어이 물었다. 싸우다 지친 엄마의 단념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붙잡을 한 마디가 간절했지만, 엄마는 헛웃음만 한참 동안 터뜨리고 말았다. 이정이 버텨온 자존감의 끝자락과 자기 연민의 마지노선과 기대감의 박스권마저 그렇게 무너졌고, 다음날 이정은 매몰찬 결핍의 피해의식만 매단 슈트케이스를 꾸렸다.



엄마, 결핍의 피해의식

너 왜 자라지를 않아? 출처 : 네이버 영화

“너무 곱지 않니? 나도 이렇게 살고 싶어. 곱고 맑게 낭만적으로….” 친구와 복분자주를 기울이던 수경은 여자이고픈 바람을 늘어놓는다. 이제 딸을 벗어나서 남자친구와 함께 풀빌라에 몸을 담그거나 리코더 연주 취미 하나쯤은 가진 여자로 살고 싶다. 낼모레 서른인 딸의 미적미적한 태도가 싫다.


“넌 왜 내 안 좋은 것만 다 가져갔니?” 딸에게는 심한 생리통뿐 아니라 수경이 떼 내고 싶은 온갖 그림자가 드리운 듯하다. 수경이 딸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것도 수경을 누르는 그 모자람을 밀어내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밀어낼수록 뭔가를 갈구하듯 들러붙은 딸이 생떼 스티커 같아 또 짜증이 난다.


“혼자 컸다고? … 몇 년을 그 증기며 공해며 버텨가며 번 돈. 그게 다 니 입으로 갔어.” 수경은 답답한 게 콱 걸리면 사라지질 않아 입으로 손으로 푸는 법 말고는 모른다. 다 큰 딸이 전기세 한번 안 보태면서 불이란 불은 다 켜놨길래 잔소리며 손찌검 좀 했기로서니 차 사고 가해자로 몰다니, “너 진짜 의리 없어.” 친구가 의리 없으면 치사하고 말지만 다 큰 자녀가 의리 없으면 숨이 멎고 다리가 풀리지 않던가.


“젖 줄까…. 너 왜 자라지를 않아?” 가해자가 수시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대는 세상이다. 제일 만만한 엄마 사과에만 간절히 매달리는 딸이라니…. 원치 않았던 출산이었다. 딸만 없었으면 진작 좋은 데 시집갔을 거란 헛된 원망에 어제가 괴롭다. “짜증 좀 받아줄 수도 있는 거지. … 어휴, 엄마가 많이 힘들어서 그렇구나. 엄마 그래 그래, 마음이 그렇구나….”


수경이 유일하게 위로받는 이는 ‘수경바라기’ 남자친구 종렬이다. 수경을 끔찍이 아끼며 그녀와 재혼하려는 홀아비다. 하지만 종렬은 중학교를 졸업하는 소라를 키우는 딸바보이기도 하다. 수경과 소라가 충돌할 때마다 안절부절이다.


수경이 종열에게 선물 받은 코트가 소라에게도 입혀진 걸 본 어느 날, 수경은 종렬에게 코트를 벗어던져 버리고 란제리 차림으로 거리로 뛰쳐나온다. 종렬도 결국 수경과 소라가 흔쾌히 커플룩을 입는 사이가 돼주길 바라는 남자다.


수경은 이제 같은 옷을 입는 엄마로만 살고 싶지 않았다. 다른 옷을 입을 배려를 받아야 마땅했다. 딸에게서 못 받는 이해를 종렬에게 의지했으나 틀어졌다. 좌훈방 일을 도와주는 친구에게조차 결국 ‘손님들이 니 지랄 맞다고 얼마나 욕하는 줄 알아? 딸이랑 싸우고 남자친구랑 싸우고 남자친구 딸이랑 싸우고 친구랑 싸우고, 알아? 니가 문제야!’라는 악담을 듣는다. 결핍의 피해의식은 수경의 인간관계도 그렇게 뒷걸음질시켰다.


딸이 끝내 던진 물음이 겨우, ‘나 사랑해?’였을 때 허탈해서 웃었다. ‘안 되는구나. 자기 결핍 말고는 못 보는구나. 쟤한테 대체 뭘….’ 헛웃음은 계속 나왔다. 싫다. 딸을 밀어냈다. 홀로 남은 수경은 자기를 여자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프로필인 리코더를 꺼낸다. 틈틈이 연습한 집시들의 춤곡을, 이번에는 끝까지 밀어내는 데 성공한다. 서툴지만 서늘하게.



모녀의 인형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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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미룬 모녀의 찌질한 블랙 코미디 : 진작 헤어졌어야지!’ 서양 사람이 이 영화에 카피를 단다면 이렇게 달 지도 모르겠다. 수경은 딸한테서 벗어나야 살겠다며 딸을 밀쳤는데, 이정은 엄마가 밀어낼수록 독립하기가 더 힘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모녀의 전쟁은 단순히 언제 어떻게 독립하느냐의 문제라기엔 뒤끝이 있다.


꽉 끼는 스판 속옷의 불편함마저 감내하는 사이지만, 서로를 향해 내뿜는 내밀한 피해의식에는 끝내 공명하지 못한다. 가장 내밀한 영역을 나누는 사이여도 상처의 사이즈는 제각기 따로였다.


엄마에게 이해와 배려를 주지 않은 딸은 엄마에게 사랑과 사과를 받지 못해 원망스럽다. 딸에게 사랑과 사과를 주지 않은 엄마는 딸에게 이해와 배려를 받지 못해 화가 난다. 엄마도 딸도 마땅히 받을 걸 받지 못한 결핍에 붙들렸다. 받을 걸 못 받은 나는 피해자이기에, 상대는 가해자다. 그런데 상대는 피해자란다. 나는 젠장, 가해자가 된다.


수경과 이정의 진짜 피해의식은 그래서 생긴다. 딸의 피해의식은 엄마가 스스로 피해자라고 주장하기에 생겼다. 마찬가지로 엄마가 피해자 의식을 갖는 것도 딸이 엄마한테서 뭘 못 받았다는 피해의식만 엄마에게 쏟아내기 때문이다. 모녀는 둘 다 ‘니가 더 이상 피해자였다고 우기지 말고 가해자로서 사과하면, 피해자인 내가 치유될 수 있어’라고 한다. 서로가 원인이자 결과인 피해의식이 맞선다.


함께이길 원하면서도 따로이길 원하는 가족 사이라는 조건마저 붙는다. 딜레마가 칼춤을 추는 융합적 킬러 문항. ‘자신과 화해가 먼저’라는 심리코칭 매뉴얼을 들고 자기 내면을 추궁하기도 하지만, 벗으려 하면 벗겨지는 게 피해의식이던가. 벗겨진다 하면 나만 벗으면 되던가. 상대를 추궁해야 해결될 것 같아 수경과 이정은 상대에게 붙들렸다.


솔로 워킹맘이 육아를 책임지기에 장벽이 많은 사회다. 편부모-자녀 간 안정적 애착관계를 뒷받침할 사회 시스템도, 불편한 처지를 안전하게 나누고 내보이며 흔쾌히 받아들일 인식 변화도 필요하다. 30년 가까운 모녀간 상처를 덧나게 한 불가피한 외부 여건들이 어찌 없었을까.


하지만 불가피한 여건보다 상대를 추궁하며 감정적 상실을 겪던 모녀는 결국 선을 긋고 헤어진다. 이별은 분명 필요하지만, 아름다운 이별인가. 헐거운 집게를 밤새 내리던 인형뽑기에서 벗어난 걸까. ‘발끈 버튼’ 앞에 의연해질까.


결핍의 피해의식은 절대 없던 일이 되지 못할 거라는 연민과, 명절만 되면 다시 터질 거라는 불안과, 타인을 경유해 고스란히 삐져나올 거라는 서글픔과, 이별이 아닌 단절일 것 같은 불길함과, 그 단절은 또 다른 붙들림일지 모른다는 예감은 어찌하면 좋을까. 피해의식의 상처만 파인 모녀에게 어떤 유대감이 남을까?



같은 결핍이 짓는 다리


상처의 상처보다 더 끈끈한, 상처의 유대감이 생긴다. 없던 게 생기는 동질감이다.


코미디 영화 《퍼펙트 맨》(용수 감독, 2019)에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일 수밖에 없는 이들 사이의 격한 유대감을 담은 장면을 봤다. 이 영화 속 자동차 사고는 좀 참혹하다. 로펌의 대표 변호사 장수(설경구)는 몇 년 전 자동차 충돌로 아내와 딸을 모두 잃었다. 자신도 전신마비에 빠졌다. 가해 차량 운전자는 석현(윤상화)이었다. 막노동꾼 석현의 어린 딸이 재벌가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는데, 당시 장수가 법 기술을 발휘해 놈의 무죄를 끌어냈다. 눈이 뒤집힌 석현은 장수 가족이 탄 차를 들이박았다. 아내와 딸을 잃은 장수는 침대에서 홀로 시한부 삶의 지옥을 견딘다.


죽음을 앞둔 장수는 사과를 받기 위해 석현을 찾는다. 장수는 석현에게 먼저 사과한 뒤 석현의 딸을 위한 학자금과 전셋값을 건네려 한다. 맡지 말아야 할 변호를 맡았던 마음의 빚을 그렇게라도 던 다음, 석현의 진심 어린 참회를 받아낼 작정이었다. 그게 독립, 아니 생을 마감할 수 있을 솔루션이었다.


석현은 운다. 석현이 투옥된 후 딸이 자살했단다. 딸내미 내 앞에 살려 놓으이소…. 장수도 운다.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되잖아…. 당신도 나한테 잘못했잖아. 당신도 나한테 잘못했다고 빌어야 되잖아…! 근데 이러면, 그러면 내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잖아…. 난 어떤 용서도 받을 수 없잖아…. 석현이 운다. 일이 그리될지 몰랐어예…. 내는요, 일이…, 그리될지 몰랐어예….


둘은 죽어서라도 죗값을 치르겠다며 저녁놀이 지도록 함께 오열한다. 무슨 수로 죗값을 치른단 말일까. 어떻게 없던 일로 한단 말인가. 넉넉한 배상금을 주거나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벌한들, 의학과 주술이 발전해 무덤에서 살려낸들 그간의 상처가 지워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둘에게는 용서하고 용서받을 도리가 없다. 둘만의 탓일 수도 없으니 그런 불행의 재발을 막을 힘도 없다.


그걸 뼈저리게 느끼는 장수와 석현의 흐느낌에는 동질감이 담긴다. 서로에게서 절실히 받아내야 하지만, 내가 줄 수 없고 상대도 줄 수 없다. 서로만이 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나도 못 갖고 있고 상대도 못 갖고 있다는 그 동질한 결핍이야말로 원수 사이인 둘을 오랫동안 같은 저녁놀 앞에 세우는 유일한 다리다.


서로가 원인이요 계기이자 결과이지만 또한 무력하다는 것. 고통을 없앨 솔루션을 상대에게서 간절히 구할 수밖에 없지만 결코 없던 일이 되게 할 도리가 없는 사이라는 것. 그렇게 홀로 또 하루를 견딜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것. 서로 변변찮고 찌질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는 대등한 관계라는 것…. 그런 처지일 수밖에 없는 ‘분노와 슬픔과 간절함과 무력감과 자책감과 외로움의 피해의식’을 절절하게 공감하는 이들 사이의 동질적 유대감이다. 쪽 팔림이나 모멸감이나 삐딱한 시선이나 손실이나 내숭을 신경 쓰지 않고도, 깊숙이 함께 토해낼 수 있다는 ‘안전한’ 신뢰감이다.


얼마 전 전두환 씨의 손자 전우원 씨에게서 그런 유대감을 봤다. 할아버지의 죄를 사죄하고자 광주를 방문했을 때다. 5·18 유족은 전두환 씨 탓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피해의식의 세월을 지냈다. 자신들이 오히려 피해자라는 전씨 일가의 그 뻔뻔함이야말로 유족의 상처가 아물지 못했던 진짜 원인이었다. 하지만 아무 죄 없었던 우원 씨의 삶 역시 광주 유족의 상처에 대한 죄책감과 피해의식이 뒤엉킨 깊은 어둠이었던 듯했다.


우원 씨가 망월동 묘역을 찾는 숭고한 용기를 냈을 때, 서로는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도 상대를 추궁하지도 않고 그냥 울었다.


누구에게는 군홧발의 독재자, 누구에게는 전직 대통령 할아버지라는 불가항력의 상황 탓에 무슨 수를 썼어도 자신의 괴로움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음을 절감했기에, 자기 연민과 타인 연민이 엉켜 스미는 절절함을 알기에, 가해와 피해의 감정이 엉키던 괴로움을 나눌 수 있기에 그들은 부둥켜 울었다. 상대 탓을 해봐야 맺힌 세월 앞에 아무 소용없음이 사무치게 평등했기에 함께 부둥킬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상처와 미움은 무슨 수로도 없던 일이 되지 못한다. 다만 그 위에 더 여물고 안전한 신뢰를 지을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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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기억하는 유대감


맺힌 걸 커억커억 토해내면서 '난생 처음' 치밀어 올라오는 뭔가를 느끼게 될 때 부쩍 성숙한다. 누군가와 지독한 이별을 하거나 한없이 '쪽 팔릴' 때 그제야 드러나는 숨겨진 감정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정서적 성숙이더라. 평소 의미 없다고 무시하던 타인의 사소한 실천 앞에서 문득 부끄럽다고 느끼게 될 때도 작은 성숙은 시작된다. 타자 속도가 분당 200타로 오르고서야 '손이 기억한다’는 말이 말이 됨을 받아들인다. 힘겹게 자라고 나서야 자랐음을 안다.


일본 사상가 우치다 다츠루(內田樹)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됐다’고 깨닫는 과정이 성숙이라 했다.(《곤란한 성숙》, 바다, 2017. 12p)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고 짐작조차 해 본 적 없었지만 실은 그렇더라는 걸 느끼는 과정이며, 내 모자람이라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으나 내 모자람 앞에 무릎 꿇는 과정이다. 엄마를 향한 피해의식만 존재했던 딸이 바로 그 때문에 엄마에게 피해의식이 생긴다는 걸 인정하는 과정이다. 내가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있는 걸 있던 대로만 보는 나는 여전히 아이다. 성숙은 없는 걸 보는 과정이다.


없는 걸 보라는 말은 한 사물이 동시에 두 군데 존재할 수 있다는 양자역학을 받아들이라는 말처럼 난감하다. 그럼에도 그게 가능한 건 괴로움의 절절함 때문이며 결핍의 절실함 덕분이다. 성숙 3주 완성 코스는 없다. 하루하루 인간관계 속에 쌓이는 결핍의 진정성이야말로 성숙을 향한 배터리다.


'내게도 상대에게도 없는 것'을 절실히 바라보려는 결핍의 괴로움. 그 절실한 괴로움이 서로 스며들면서 생기는 유대감은 그 어떤 발끈 버튼 앞에서도 퇴행하지 않는다. 몸이 기억하니까. 수없이 무릎이 까이고 쓸리면서도 두 발 자전거의 중심을 일단 잡고 난 다음에는, 넘어지기가 더 어렵다. 없던 중심을 몸이 기억해 버렸으니까. 모자람의 절실함으로 성숙의 한 계단을 올라 버렸으니까.


개인의 정서적 성숙이 시민적 성숙을 향하는 힘도, 풀뿌리 연대를 통한 변화를 바라볼 힘도 결국 여기서 자라지 않을까. 예를 들어 '공정' 같은 사회적 가치는 나도 너도 여전히 손에 쥐고 있지 못한 희뿌연 가치다. 서로 공정이 모자라기에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괴로움. 그 절실한 동질감을 더 깊게 나눌 수 있게 되고서야 사회의 공정한 성숙은 한발 다가올 것이다.


결핍을 모르는 이들은, 늘 있는 걸 있는 대로만 보는 걸로 완충됐다고 여겨버리는 이들은, 굳이 새롭게 볼 이유가 없다. 볼 수도 없다. 나와, 나와 맞선 너가 서로를 향해 절실히 부족하다는 괴로움을 나누지 못하는 만남은 그래서 약하다. 너가 필요 없으니 유대감의 끈적함도 모르고야 만다. 날 선 박스권에 갇혀 늘 있던 고집과 이해관계를 반복할 뿐인 연결은 그래서 위태롭다. 이해관계의 유통기한은 짧다. 고집 알갱이들은 점으로만 접촉하기에 아슬아슬하다. 열을 조금만 가해도 끊긴다. 모자람의 상처로 스며든 유대감만이 이보다 여물고 안전하다.


장수와 우원 씨 얘기는 좀 먼 사례일까.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수경과 이정이 서로 밀쳐낸 건 각자의 모자람에서 나온 피해의식이 날 선 채로만 남은 탓이지 싶다. 하지만 모자람의 평등함은 밀쳐낼 이유가 아니다. 스며들 이유이자 스며들게 하는 조건이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고 딸도 딸이 처음이기에 서로 밀쳐낼 이유가 수만 가지라는 바로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공평한 사이의 전형을, 기어이 수경과 이정에게서 보게 된다. 이 영화(각본집)은 그걸 보는 묘미가 있다.


오직 한없이 모자란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상처의 동질감만이 사람들을 걸 수 있는 단단한 신뢰 고리임을 ‘이제 볼 수’ 있다. 모녀의 독립은 독립이라기보다 성숙의 문제다. 헤어짐보다는 만남의 이야기다. 그러니 끝이라기보다 시작이다.


“너 왜 자라지를 않아?” 아니, 수경과 이정은 잘 해낼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이정은 주변의 딸들에게 담담히 조언을 들려주는 사람으로 자라 있을지 모른다. 이정이 나아간 그 자리는, 수경을 욕해대던 좌훈방 손님들이 어느 날 수경에게 엄마 역할 경험담을 수강하게 될 자리일 지도 모른다. 우리는 ‘퍼펙트 맨’이라기보다 사는 데까지 사는 삶일 뿐이다. 제각기 달리 칠해진 부족함의 심연은 어둡고 서늘하겠지만, 서로 스며든 부족함의 유대감은 더 밝고 따뜻한 성숙의 아랫목을 봐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시작하는 모녀를 믿어보자. 딱딱한 껍질에 둘러싸여 부딪치면 튕겨나는 로또볼 입자가 아니라 서로 스며들었다가 고스란히 제 에너지로 제 길을 나아가는 물결 파동처럼, 누구를 원망하지도 자책하지도 않고 잠들 수 있을 게다. 믿어보자. 우리가 언젠가 그랬고 또 그러길 희망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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