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편입생》
#대학입시, 취업, 승진 #공감과 공존의 차이 #공평과 공정의 차이 #더 공정한 공정
#루시 서버, 2022, 미국.
오죽하면 전쟁이라 할까. 대학입시 말이다. 모두가 피해자이자 죄인이 된 듯 괴로운 때.
입학 기준은 개인 사정 봐 가며 달라지는 게 좋을까, 사정없이 적용되는 게 좋을까? 미국 취약 계층 학생의 명문사립대 편입학 이야기를 다룬 연극 《편입생》의 말다툼을 들으려 한다. 데이비드는 달라져야 한다고 하며, 제프리 교수는 위험하다고 한다.
쉽지 않다. 마음 써 가며 마음 안 쓰는 일이라.
이방카 트럼프는 유펜(펜실베이니아대학교) 편입생이었다. 최상위 글로벌 비즈니스 학벌인 와튼스쿨을 보유한 미국 아이비리그 명문사립이다. 이방카가 유펜 경제학 전공에 어렵지 않게 편입한 건 동문 자녀 가산점 특혜제도 덕분이었다. 아버지 도널드 트럼프가 유펜 편입생이자 졸업생이었다.
이방카의 남편 재러드 쿠슈너도 거액의 기부금 덕에 하버드대 학생이 됐다. 미국에는 합격은 시키되 입학만 유예시키는 정원 외 연기입학 같은 특례도 있다. 백인 상류층들은 이런 제도를 활용해 합법적으로 그들만의 명문 사학 리그를 대물림해 왔다.
미국의 ‘열악한 지역’ 학생의 명문 사립대학교 편입학 이야기를 담은 희곡이 있다. 루시 서버(L. Thurber)의 《편입생》이다. 슬럼가 출신 ‘클라런스 매튜’는 지역인재 장학프로그램을 통해 ‘헤럴대학교’ 영문학과 편입생 입학 전형을 치르고 있다. 근데 문학적 감수성과 재능에 비해 입학자격시험(SAT) 점수가 모자라다. 지금 장학프로그램 재단측 담당자가 헤럴대학교 면접 교수에게 대드는 중이다.
“제프리 딘 (면접 교수) : 오마르 차비지는 SAT 점수 1,100점. 티나 소이어는 1,050점. 그래도 두 학생 다 탈락될 겁니다. 둘 다 우수한 학생이고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한 학생들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클라런스는 950점이군요. 1,000점도 못 넘었어요. 게다가 솔직히 경쟁력이 떨어지는 커뮤니티칼리지에서 편입하려는 거고요. 물론 클라런스에게 충분히 호감이 가고 존중하지만 말입니다.
데이비드 데산토스 (장학프로그램 담당자) : 클라런스한테는 이게 유일한 기회잖아요. 오마르와 티나가 훌륭한 학생인 건 누구나 아니까 다른 장학금 기회가 있습니다. 다른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겠죠.
제프리 : 오마르와 티나는 우리 학교의 학습 부담을 잘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 학생들은 ….
데이비드 : 그거랑은 달라요. 같지 않다구요. 정반대예요! 제 말은, 클라런스가 다른 곳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누가, 누가 알겠어요? 저 애를 지금껏 똑바로 자라게 했던 그 지적 능력과 의지를 보자구요. 문밖으로 나가 어떤 학교라도 들어가려 하고, 책을 찾아 읽고 더 높은 배움을 향한 열망과 호기심을 잃지 않았어요. 다르다고요. 똑같이 놓고 보면 안 된다구요. 기껏 희망을 품게 해 놓고서, 여기까지 불러다 놓고서, 이제 와 안 된다는 게….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어요.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우리 책임입니다!
제프리 : 클라런스 매튜에게 벌어질 일은 클라런스 매튜의 책임이죠. 내 책임은 내게 할당된 두 자리에 가장 실력 있는 후보자를 선택하는 거구요. 그래서 휴스턴에서 온 아슬레셔 파텔과 루이스톤 출신 데이비드 정을 선택할 겁니다.
데이비드 : 아, 그렇군요. 그러니까 클라런스가 그냥 혼자 일어나 성공하도록 내버려 두자, 그런 거죠? 세상이 지금껏 그렇게 잘 굴러왔으니까?
제프리 : 이 나라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건 나도 압니다. 날 모욕하지 마세요! 대체 어떻게 내가 그것도 모를 거라 여기십니까! 당신만 클라런스 좋아하는 거 아닙니다. 나도 마음에 들어요. 솔직히 말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면접 본 학생 중 가장 영특하고 매력 있는 학생입니다. 날 감동시켰어요. 정말로 감동시켰어요. 나도 클라런스 뽑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요. 하지만 이 문제는 개인적 사정과 별갭니다. 기준이 있어요.
데이비드 : 아니, 개인적인 겁니다.
제프리 : 아니요. 기준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죠? 당신은 지금 기준을 무너뜨리고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흔들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 그겁니다! 이 장학프로그램의 취지가 바로 그거잖아요!
제프리 : 아니욧! 이건 기준을 넓히고 확장하자는 거지 무너뜨리자는 게 아닙니다!
데이비드 : 바로 거기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르군요. … (자리를 박차며) 제프리 교수님, 당신은 정말 모르시는군요. 누군가 말해주거나 보여주지 않으면 클라런스는 절대 알 수 없다는 걸요. 여기까지 오는 법, 그리고 오기 위해 필요한 것들 말입니다. 클라런스가 어디 출신이던가요? 교수님이 느닷없이 클라런스의 동네에 내던져진다면 과연 그 세계의 생존 방식을 알 수 있을까요? 거리에서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하고 누구를 믿고 뭘 입어야 하는지? 누군가 보여주지 않는 한 교수님은 절대 모를 겁니다.”
(L. Thurber, Transfers, DPS, 2022, 58~59p)
힙합 음악의 탄생지 뉴욕주 브롱스(Bronx) 자치구. 클라런스는 브롱스 출신이다. 높은 빈곤율과 범죄율로 슬럼가의 대명사였던 곳이다. 클라런스가 나고 자란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이 특히 그랬다. 뉴욕주 62개 카운티 중 최악의 취약 지역이자 무법천지였다. 힙합이나 래퍼가 절망적 상황과 백인 주류문화에 대한 반항의 상징이라면, 그 정신적 고향이 브롱스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부족한 기반시설로 거리는 황폐해졌다. 건물값이 떨어졌다. 건물주는 차라리 보험금을 타는 게 낫겠다며 갱단에게 자기 건물을 불 지르게 했다. 상대 조직원을 암살하려고 쏜 총에 심심찮게 행인이 맞았다. 방화, 폭동, 총격전, 폭력갈취, 질병, 가정 붕괴, 뉴욕주 최악의 빈곤율과 고교 미취학률…. 그 시절 브롱스를 보여주는 지표는 차고 넘쳤다.
지난 세기 중반부터 점차 슬럼화하다가, 1990년부터는 할렘에서조차 쫓겨난 빈민 종말처리장으로 변했다. 뉴욕의 예전 빈민촌인 할렘에 대한 정비사업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빈곤한 아프리카계와 라틴계, 히스패닉 등 각국 이주자들이 엉키고 설켰다. 그들 패거리의 생존 영역 다툼장으로 변했다.
《편입생》은 클라런스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패거리와 어울린 친구의 머리통을 백주 대낮에 자기 패거리가 망치로 깨버리는 것을 보며, 그 여동생에게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라는 말밖에 해줄 수 없었던 트라우마를 지닌 한 청년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이 벌레처럼 죽어 나가는 곳’, ‘누군가 바라봐주고 배려받으며 살아온 이들과 전혀 다른 투명인간이 사는 곳’, ‘그냥 걷는다는 게 너무 힘든 거리’, ‘시체를 건너뛰며 걷는 거리’, 출구 없는 그 거리를 걸어 나와 탁월한 문학적 섬세함을 키우며 고교 내신 올 A를 받은 2년제 커뮤니티칼리지 출신 학생의 이야기다. 하지만 명문대까지 걸어가기엔 SAT 점수가 모자란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미국 사립대학의 입학 기준은 돈이 되는 학생에게 맞춰 매우 자율적이다. 한국 사립대학과 달리 100% 자체 재정으로만 운영되니까. 이를테면 각 대학이 SAT 점수를 어느 정도 어떻게 반영하고 누구에게 가산점을 줄지 같은 문제에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그 자율적 기준이 차별적인지 판단하는 건 각 대학의 몫이다.
미국 대입제도에는 장점보다 장벽이 더 많을지 모른다. SAT, ACT, IB 같은 표준화 시험, 내신평점, 에세이라는 기본적 평가 요소 외 대학과목 선이수 성적, 유력 인사의 추천서, 대학 주최 여름 캠프, 국제경시대회 입상 실적, 인턴십 같은 대외활동, 리더십, 예체능 활동 등이 반영된다. 여건이 좋을수록 풍성해지는 주관적 스펙들이다. 한국 학생부종합전형과는 체급이 다르다. 표준화된 교육부 지침이나 통제가 없으며 미국 입시의 주류이기 때문이다.
미국 100여 개 상위 사립대학에는 유력 가정 학생에게 노골적으로 뒷문을 내주는 이중 기준이 일상적이다. 동문자녀 우대(전체의 10~25%), 체육특기생(10~25%), 기부입학자(2~5%), 유력인의 자녀(1~2%), 해당 대학 교수 자녀(1~3%) 같은 특례 전형이다.*) 백인 상류층 학생들은 이런 전형들에서 ‘엄빠 찬스’를 톡톡히 누렸다. 진학 준비에서 소외된 학생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잣대가 적용됐다.
(* 대니엘 골든, 《왜 학벌은 세습되는가》(Price of Admission), 동아일보사, 2010)
표준 기준이라는 SAT 점수마저 실제로는 한국 수능처럼 별도 사적 교육이 절실하다. 내신 준비 외에 SAT를 준비할 여력이 없는 학생은 애초부터 연간 학비 5,000~8,000만 원을 감당하기도 어렵다. 클라런스 같은 학생에게는 지역인재 장학금 같은 프로그램이 상위 대학에 가는 거의 유일한 통로로 여겨진다.
데이비드도 제프리도 할 말이 많다.
“클라런스한테는 이게 유일한 기회잖아요.” 데이비드가 항변한다. 취약한 환경을 극복한 학생을 찾는 특례편입 기회에서 SAT 점수 기준으로 학업 역량을 줄 세워야 하나? 강자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미국 입시제도에서? 유력 자녀에게 이중 잣대를 적용하거나 SAT 가산점을 주는 헤럴대가? 사교육으로 커버하는 SAT 점수를?
기회란 강자한테 허락된 특권의 다른 말일까. 그간 데이비드 스스로 이 물음을 외면해 왔을 게다. 아마 ‘SAT마저 아니면 뭐가 기준이지? MBTI보단 낫잖아?’ 하며 말이다. 그런데도 이날 기어이 저렇게 제프리에게 대든 것은, 기준을 허물자는 게 이 프로그램 취지 아니냐며 대든 것은, 면접 전날 밤 클라런스에게 ‘공감’했기 때문인 듯싶다.
“면접위원들이 뭘 원하는지 뭘 듣고 싶어하는지, 너희들은 아무것도 몰라!” 면접 전날 밤 데이비드는 추천 대상자 두 명을 숙소에 모아놓고 모의 면접을 한다. 클라런스와 그의 히스패닉계 친구 크리스토퍼다. 크리스토퍼도 브롱스 출신이며 체육특기편입 추천학생이다. 데이비드는 이 두 학생이 대학과 면접교수가 원하는 자기소개법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며 윽박지른다.
데이비드는 ‘미트볼 그라인더’(고기 샌드위치)를 격하게 사랑하지만 자기 뱃살을 향한 여친의 눈길 탓에 ‘오가닉 팜 샐러드’를 주문하는 이다. 텍사스의 보수적 기독교 중상위층 가정에서 고교 졸업 후 곧바로 명문대학에 진학했으며, 누군가 쳐다봐 주는 눈길과 관심 속에서 자랐다. 눈길엔 기준이 담긴다. 부유한 여건 덕에 그 기준에 맞출 수 있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맞춰 왔다.
데이비드는 대학생 때 룸메이트의 자살을 겪었다. 훨씬 보수적 가정 출신이었던 룸메이트는 커밍아웃을 한 후 부자간 의절을 견디지 못해 목을 맸다. 존경했던 아버지의 기준에 어울리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과 자존감 상실…. 이후 데이비드는 소수자와 취약계층의 삶에 개입하는 시민단체 장학재단을 택했고, 지금 클라런스와 크리스토퍼를 데리고 특례편입학 모의 면접 중이다.
크리스토퍼가 데이비드에게 외쳤다. “쌤은, ×발 거기 앉아서 날 다 안다고 하겠죠! … 진짜 × 같은 인생에 대해 뭘 아는데요? × 같은 인생은 내가 잘 알아요. 그 동네 인간은, ×발 나니까!” 클라런스는 “그 동네에서 깨끗하게 살았다는 건 스스로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는 건데, 그런 걸 하룻밤에 설명하는 건 불가능해요.”라고 설명했다. ‘데이비드 당신에겐 그저 맷집 좋다는 면접용 에피소드로 보이겠지만 우리한텐 지옥의 링이었고, 브롱스의 삶은 한 신의 드라마가 아니라 전체인 다큐다….’
그렇게 두 학생과 긴 밤을 보낸 데이비드는 마침내 “샐러드? 때려 쳐! 미트볼 그라인더로 바꿔왔어. 소스랑 치즈도 듬뿍 넣었다구!”라고 외치며 모의 면접 매뉴얼을 덮어버린다.
“기껏 희망을 품게 해 놓고 … 이제 와 안 된다는 게….”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 게 무너지는 자존감이다. 시체 같은 무력감과 절망감 덩어리를 건너 여기까지 걸어 나온 두 학생이다. 그 분투에 마음이 가닿은 데이비드는 기준에 맞추라는 요구가 자부심을 짓뭉개는 일임을 느낀다. 모욕하고 환멸을 느끼게 해 성 정체성이 다른 사람을 목매다는 일임을 기억해 낸다.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우리 책임”일지 모른다고 제프리에게 항변한다.
또 다른 면접위원 로지가 크리스토퍼를 면접하면서 뉴욕주 학생레슬링대회에서 2위에 그친 걸 지적했을 때, 크리스토퍼는 제발 모욕하지 말라며 “공정하게, 날 공정하게 대해주세요!”라고 대든다. 2위보다 1위를 높이 평가하는 건 공정한 듯하다. 모두에게 똑같은 순위 기준을 적용하니까. 하지만 같은 기준이란 게 특정한 잣대와 눈길과 이해관계로 일그러진 덩어리가 아니라고 정말 확신하는가. 데이비드는 제프리에게 외친다. “다르다고요! 똑같이 놓고 보면 안 돼요.”
“현존하는 차별을 없애기 위하여 특정한 사람을 잠정적으로 우대하는 행위와 이를 내용으로 하는 법령의 제정·개정 및 정책의 수립·집행은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로 보지 아니한다.” 차별을 없애고자 차별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는 한국 국가인권위원회법 2조 3항이다. 차별해야 차별이 줄어든다.
“개인적(personal)인 겁니다.” 기준의 확장으로는 모자란다. 데이비드에게 이 장학제도의 취지는 기준에 누가 더 잘 부합하는지를 살핀다기보다 기준 접근 기회 자체가 없는 개인들에게 기준의 벽을 어떻게 허물고 내줄 것인가 하는 고려에 가깝다. 새것도 세워지는 순간 헌것이다.
“저 애를 지금껏 똑바로 자라게 했던 그 지적 능력과 의지를 보자구요.” 기준을 허물 때는 허물 기준이 필요하다. 데이비드에게 그건 공감의 동일한 깊이일 수 있겠다. 유력 동문의 물질적·비물질적 기여에 대한 인정의 깊이만큼 취약계층의 생존력에 대한 인정이 깊을 순 없는가. 한 계층을 향한 공감의 심도를 다른 계층으로 확대하는 것은 위험한가?
“솔직히 경쟁력이 떨어지는 커뮤니티칼리지에서 편입하려는 거고요.” 제프리가 보기에 이 장학재단의 일 처리는 그간 매끄럽지 못했다. 단지 어려운 동네 출신이라는 이유로 수학 준비가 덜 된 학생을 추천하기도 했다. 장학재단 이사장 조카가 클라런스가 다닌 칼리지 상담교사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SAT 점수가 더 높은 학생의 자리가 날아가는 위험도 있었다. 쉬운 길을 가려는 이는 내실이 모자랄 위험이 크다. 위험을 피하도록 돕는 게 분명한 기준이다.
“클라런스 매튜에게 벌어질 일은 클라런스 매튜의 책임이죠.” 어설픈 주관적 공감으로 클라런스에게 뭘 책임질 수 있을까. 데이비드는 감정에 치우진 무책임한 정의파이거나 생떼를 쓰는 어린애일지 모른다. 자칫 입시 부정이 될 수도 있다. 공감은 참작 요소일 뿐이지 당락을 책임질 요소가 아니다. 책임을 돕는 장치가 엄정한 기준이다.
“기준(standards)을 넓히고 확장하자는 거지 무너뜨리자는 게 아닙니다!” 기준에 맞추는 게 어렵다고 기준을 허무는 데엔 깊은 고려가 필요하다. 기준에 맞게 기준을 허물었는지 감시하는 기준은 더 깊다. 너무 깊은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옳은 것보다 받아들이기 쉬운 게 상식이 된다. 기준이란 최선은 아니지만 그나마 낫다고 여긴 것이다. 상식적 기준에는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감이 표준화돼 있다. 헌것도 원래는 새것이다.
“기준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죠?” 입학 기준을 허물어 본 제도가 이미 있었다. 소수 인종 적극적 보호조치인 ‘어퍼머티브 액션’이다. 대학 정원에 소외 인종의 학생 수를 할당하라는 케네디 전 대통령의 행정명령이었다. 초기에는 인종 간 교육 불평등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법원과 대학의 도전을 받다가 최근 폐지됐다. 같은 능력의 백인 지원자의 입학 관문을 역으로 좁혀버렸고, 교육열이 높은 아시아계는 심지어 백인보다도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합격했기 때문이다. 차별을 없애는 특혜는 승자의 아량에 기댄다. 아량이 이어지면 또 다른 박탈감, 사회적 비용, 역차별을 부른다.
“나도 클라런스 뽑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요.” 제프리도 사실 클라런스에게 충분히 공감했다. 면접장에서 클라런스가 들려주는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경청하면서 그 문학적 감수성과 열정에 동조됐다. 제프리는 엄격한 관습과 초라한 환경 속에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사랑을 얻어낸 시골 처녀의 로맨스 《오만과 편견》에서 어린 시절 갈망을 배웠기에, 시체가 아닌 담쟁이와 책에 둘러싸인 교정에서 문학적 배움을 바라는 클라런스의 갈망에도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제프리는 클라런스의 어두운 기억과 생존력에는 눈감는다. 제프리에게는 혼자 힘으로 예일과 브라운 학위를 얻었다는 자신감과 기억이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공감이란 선택적이며 개인적일 가능성이 크다. 제 경험과 기억에 맞닿을 때 더 쉽게 반응하니까. 그런 공감이 위험할 때도 많다.
"우크라이나 여자는 성폭행해도 돼, 콘돔만 잘 쓰면." 한 러시아 여성이 우크라이나에서 전투 중인 러시아군 남편과 나눈 통화 내용을 담은 뉴스를 접한 적 있다. 고된 내 남편을 향한 눈먼 공감은 다른 편에 대한 외면, 심지어 혐오까지 부른다. 피해자에게 감정적으로 공감된다는 명분으로 불법적인 ‘사적 복수 혹은 사적 정의'가 집행되기도 한다. 사회적 대형 참사에서 유가족의 단절보다 오히려 연대를 더 우려하는 이들도 봤다. 광화문과 서울역으로 갈라진 전쟁 같은 대규모 집회도 있다.
정물이 세밀할수록 풍경은 좁다. 시선이 오른쪽에 묶일수록 왼쪽은 흐리다. 깊게 공감하면서 넓게 공감하려는 T자형 이해에는 너무 많은 부하가 걸린다. 한 생명체의 감정 마일리지는 유한하지 않던가.
“이 문제는 개인적 사정과 별갭니다.” 공감도 애초 자기 경험과 기억에 갇힌 것이라면 섣부른 공감의 확대는 또 다른 차별을 부른다. 자칫 입시 비리가 될 수도 있다. 다르게 쌓인 경험으로 나아갈 때는 공감의 표준화된 형태인 사회적 기준을 사용할 수밖에. 이불 밖은 위험해.
우리나라에서 이름 높은 샌델(M. Sandel)에게 만약 이 말다툼을 정리해 달라 하면, 아마 ‘정문 입학’, ‘뒷문 입학’, ‘옆문 입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싶다.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 30~35p)
‘정문 입학’은 정식 시험을 거쳐 성적에 따라 입학하는 일반 전형이다. ‘뒷문 입학’은 기부금 입학, 동문 자녀 우대, 해당 대학 교수 자녀 특혜, 체육특기생 제도, 사회적 배려 입학 등의 특례 전형이다.
미국 입시에서 뒷문 입학은 지극히 합법적이며 정당하다. 대표적인 뒷문 입학인 기부금 입학은 기업의 상거래 행위와 같다. 대학이 돈을 받고 신입생 자격을 파는 합법적 시장이다. 당국은 각 대학이 정한 규칙, 즉 대학별 약관에 맞게 신입생 자격 구매자와 거래가 이뤄졌는지만 감독할 뿐이다.
약관이 안 지켜지는 부당거래가 '옆문 입학’이다. 감독관 혹은 대학 관계자에게 뇌물을 건네 답안지 바꿔치기, 시험 성적 부풀리기, 가짜 자격증 만들기 등이 감행되는 부정 입학이다. 대표적 사례가 2019년 3월에 적발된 대형 입시 부정 사태 ‘윌리엄 싱어 스캔들’이다.
데이비드의 말은 헤럴대가 클라런스에게 이왕 뒷문을 열어주기로 했으면서 막상 심사에서는 왜 정문의 기준만을 사용하냐는 것이다. 뒷문 방문자가 유력층일 때는 정문 기준을 적용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말이다. 데이비드의 항변에는 정문 입학이든 뒷문 입학이든 정말 옆문 입학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느냐는 의문으로까지 나아갈 파괴력이 담겨 있다.
제프리는 뒷문 입학에 취약계층의 생존력을 폭넓게 공감해 주는 건 위험하다고 여긴다. 기부금 뒷문 입학의 경우 대학의 장학금 재원 마련과 대학 발전 효과가 크다는 게 입증됐다. 액수 대비 효과는 손에 잡히는 기준이다. 근데 취약계층의 뒷문 입학에 적용하자는 공감이라는 기준은 기준이 못 된다. 목적과 효과도 불분명할뿐더러 자칫 부정으로 간주할 우려마저 있다. 정문의 기준을 끌어 쓸 수밖에.
가만 보면 문 앞에서 자꾸 ‘기준’과 ‘공감’의 키홀더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두 학생이 뒷문을 통과했는지는 무대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혹시 이게 야속하다시는 분 계신다면, 대개 그들의 딱한 사정에 마음이 닿은 분이실 테다. 아무래도 나 역시 그 마음 ‘공감’으로부터 이 기준과 공감의 문제를 말해야 할 듯하다.
부스스하게 이불 밖을 나서려는 공감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말하는 제프리의 우려는 사실 새겨들을 만하다. 기준은 눈 딱 감고 휘두르면 되지만 공감은 막 들이밀 수 없다. 공감도 공감 나름이니까.
공감은 감정적 공감과 이성적 공감으로 나눌 수 있다.(*후주) 감정적 공감은 한 마디로 감정이입이다. 직접 경험한 일 혹은 ‘코드 맞는’ 내 편의 사정에 즉각 깊숙이 반응하는 일차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일종의 정서적 전염이자 반사적 신경 반응이다. 하지만 안으로 굽는 팔이다 보니 얼핏 공감되지 않는 이질적 집단을 향한 배제와 배척을 담고 있기도 한다. 수렵채집기부터 경계 바깥의 것은 일차적으로 멀리 하도록 진화했다. 편을 가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니 양날의 검이다. 상대를 동일화해 내 편을 강화하지만, 자칫 동일화하지 않는 상대를 향한 적대로 자라나기도 하는 공감이다.
반면 이성적 공감은 ‘사려 혹은 배려’다. 자기와 이질적인 타인, 즉각 공감되지 않는 이의 어려운 입장으로 건너가보는 적극적이고 의식적이며 폭넓은 공감이다. 의식적 신경 작동이자 인지적 노력이다. 감정적 공감과 명확히 구분하려면, 공감력이라는 말보다 '공존력'이라는 말이 더 적당할 것 같다.
나와 이질적이거나 무관한 뭔가에 부딪혔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이 뭘까? 말꼬리 잡고 끊는 일은 아님을 알고 있다. 찬찬히 물어보고 들어보는 일이다. 공감이 동일성에 반응하는 감정이라면, 공존은 '이질적이기 때문에' 발휘하는 능력이다. 마음이 가는군, 아니군을 구분하는 게 공감이면, 구분의 유혹을 넘어 무슨 얘기를 왜 하는지 마음 써보는 능력이 공존력이다. 공감력은 동물도 지니지만 공존력은 인간만의 긍지 중 하나다. 나만을 향한 심미적 공감보다 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고단한 공존은 가치 있다.
내 편의 감정과 다르다고 공감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건 조심해야 한다. 사칙연산 속도와 미적분 능력은 쓰임새가 다르니까. 애초 감정이입이 있고서야 사려(공존력)이 가능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저절로 나아가진 못한다. 사려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은 가끔 ‘우리가 남이가’의 감정이입을 사려로 착각하기도 한다. 각기 다른 공감을 공존시키는 능력이 사려다.
분배 상황에서 기준과 함께 고려돼야 할 요소는 감정적 공감이라기보다 의식적 공감, 즉 공존을 향한 사려깊음이다. 사려가 충분히 성숙한 상황이라면 데이비드 말대로 상식적 기준을 법정에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사려의 성숙함’을 누가 확신할까. 편협한 감정적 공감을 정말 벗어났는지 말이다. 그런 불신 탓에 제프리는 취약 계층의 뒷문 입학에서 공감 그 자체를 봉인해 버렸다. 따라서 사려도 정문의 기준 아래 굴복시켰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한다. 반칙왕 천지 아니던가. - 그런데 말이다. 그랬던 제프리에게 곧바로 문제가 생겼다.
“이 나라가 공정(fair)하지 못하다는 건 나도 압니다. … 어떻게 내가 그것도 모를 거라고 여기세요!” 섣부른 공감의 위험을 원천 차단하고자 의식적 사려까지 봉인시킬 정도로, 공평한 기준의 우위를 주장한 제프리였다. 그런 그가 지금 스스로 그게 불공정하다 하지 않는가. 공평한데 불공정하단다. ‘공정’은 정말이지 얄궂다.
어떤 가치의 뜻이 헷갈릴 때는 그 목적을 떠올려 보는 게 좋더라. ‘삶’ 같은 가치는 그 자체가 목적이며, 다른 어떤 것의 도구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 감각, 마음 그리고 습성은 모두 인간이 ‘편하게 살아가고 살아남는다’는 목적을 위해 선택적으로 진화됐다. 질서, 제도, 가치, 이념 같은 사회적 산물도 마찬가지다. 인간 공동체의 생존, 그중에서도 ‘결속’을 통한 생존이라는 목적 아래 고안된 게 대부분이다. 고립보다 통합이 생존에 유리하니까.
우리보다 튼튼하고 머리 좋고 추위에 잘 견뎠던 다른 원시 인류들과 생존 경쟁에서 유독 호모 사피엔스가 승리한 이유는, 역사생물학자들이 알려주듯 어떤 종보다 강한 사회적 결속 능력을 지닌 존재로 선택됐기 때문이었다. 언어, 제도, 종교, 정치 체제, 교역망과 같은 대규모 협력 시스템도 결국 집단의 통합과 질서 추구 과정의 산물이었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2011. 제1부, 제3부)
아이를 키울 때 가장 먼저 공동체의 규칙을 가르친다. 홀로 추위 피하기나 경쟁 이기기보다 가족과 친구 관계 그리고 학교의 질서를 먼저 알려준다. 집단의 질서를 통해 서로 결속할 때 가장 쉽게 생존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 아닐까. '공정'이라는 가치의 목적도 그런 관점에서 보자. 그러면 공정의 뜻도 드러날 테니.
영어에서 공정(fair)은 '균등한, 규칙에 맞는'의 뜻 외에도 페어플레이처럼 '올바른, 타당한, 아름다운, 보기 좋은'의 뜻도 담겨 있다. 라틴어 어원 formosus(forum)이나 라틴어 번역 aequus를 봐도 마찬가지다. 한자도 그렇다. ‘공’평(치우치지 않음)에 ‘정’당(올바름)이 덧붙었다. 결국 '올바르게 + 치우치지 않아야' 집단의 존속이라는 목적에 타당하고 아름답다는 의미로 고안됐다.
집단을 결속시켜 오래 살아남으려면 우선,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특혜를 막아야 희생자를 보듬어 통합한다. 이런 공평을 실현하는 법은 이론적으로는 간단하다. 사정 안 보고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된다. 기준이 강자의 반칙 앞에 느슨해진다면 공평하자고 외쳐야 한다.
공정은 한 발 더 나간다, 그저 치우치지 않는 것보다 ‘올바르게 치우치지 않는가’를 묻는다. 똑같은 점수 기준으로 입시가 진행되기만 하면 올바를까 하는 문제다. 올바름을 실현하는 법은 고민된다.
올바르기 위해서는 ‘사려 깊어야’ 한다. 올바름이란 게 일상의 온갖 상황 속에서 실현될 가치인데, 그 온갖 사정을 보려는 능력이 사려이기 때문이다. 사려는 생각과 염려의 합성어다. 남의 상황과 고통을 딱하게 여기는 생각이며 나도 같은 처지에 빠질 수 있다는 염려다.
계단 오르는 걸 막지 않았다고 신체장애인의 이동권이 보장된 건 아니다. 심지어 왜 열심히 걷기 재활을 하지 않았느냐고 몬다면 침해에 가깝다. 노안은 늦출 순 있지만 막진 못하는 불가피한 제약이다. 도서관은 돋보기를 마련할 책임이 있다. 나쁜 대기질이나 오염된 식수, 부족한 학교와 일자리, 열악한 주거 환경의 피해에 대한 책임은 개인을 넘어 사회가 적극적으로 감당할 일이다. 그런 의식적 고려가 사려다. 그 탓에 잠깐 괜한 손해를 보기도 하는 게 사려다.
편의상, 기준 설정 때 관여하는 사전적 사려와 기준 적용 때 관여하는 사후적 사려로 나눠볼 수도 있다. 사전 사려는 여건을 같게 하는 거다. 일반 학생과 한쪽 팔이 불편한 장애 학생에게 같은 수업 시간 내 ‘과학상자 만들기 수행평가’를 제출하라는 기준은 넌센스다. 방법은 두 가지다. 모두 한쪽 팔만 쓰든지, 장애 학생에게 시간을 더 주거나 보조자를 붙여주는 거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든지 기울어진 기준을 설계하자는 사전 약속이다. 사후 사려는, 이를테면 공적인 사법 판단에서는 ‘징역 선고 후 집행유예’ 같은 것이다. 사적 영역에선 진심어린 사과에 이은 용서와 배상액 감면 같은 것이다.
옳고 그름, 선과 악, 합격과 불합격의 '공평'한 기준 없이 경기를 뛸 수 없다. 하지만 또 한편 능력과 기회로부터 소외되거나 외롭게 상처받은 모든 이의 삶을 최대한 품는 '사려'가 없어도 집단의 지속 가능한 생존은 불가능하다. 약한 이를 쉽게 도태시키면 언젠가는 나와 내 부모, 자녀까지 밀려나고 공동체는 쭈그러든다. 먹이사슬 최상위자라도 집단 자체가 형편 없어지면 다른 집단에게 먹힌다. 천년만년 최상위자도 애당초 없다.
사려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이를 본다. 하지만 사려할 수밖에 없게 진화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매일 사려한다. 내 속에는 대충 82만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함께 살지 싶다. 재수 없는 놈도 천지다. 개인은 근본적으로 집단이다. 우리는 그 인격 모두를 두루 품는다. 때로 밀어내려고 하지만 박멸하진 않는다. 마침내 끼워주고 다독이며 한자리 내준다. 나를 지키듯 집단을 지킨다. 강자의 반칙을 꼬집는 공평조차 사려에 닿아 있다. 반칙을 단죄해 약자인 나를 지키는 건 약자인 타인을 살피는 것과 닮았다.
결국 공정은 기준과 사려의 복합 운용이다. 사정 봐 가며 사정 안 보기다. 여건에 대한 사려, 기준의 공평한 집행, 그리고 수행적 사려의 바퀴를 굴리는 일이다. 기준과 사려라는 수단은 사정에 맞게 서로를 고발할 수 있지만, 판사는 바뀌지 않는다. 집단 내 소외자를 최대한 줄여 통합하자는 목적이 판사석에 앉았다. 발가벗은 채 벌이는 개인의 깨끗하고 고통스러운 싸움이나 '노오오력'은 그 위에서야 나부낄 깃발이다.
기준을 바꾸어 약자의 처우를 개선하는 걸 두고, 내 집단 이익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무임승차’라 하는 건 공정일까. 공정이다. 다만 덜 공정한 공정이다. 기존 기준을 공평하게 적용하며 나와 내 편의 혜택 소외를 염려하고자 하니 공정이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통합의 집단생존이라는 판사 앞에서 덜 공정하다. 판사는 ‘너의 공정보다 우리의 공정’을 소명하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사전 사려 그리고 상대의 소외를 향한 사후 사려에 대한 소명이 부족할 가능성이 크다.
공정 개념을 이렇게 정리하더라도, 사실 별 소용없다. 막상 일상에서 저 바퀴들을 어떤 순서로 어떤 비중으로 굴려야 할지는 힘겹고 힘겹다. 불법적 반칙 탓에 공평한 대우조차 턱없이 부족한 사회다. 공평보다 한 발 나간 공정이 얘기되는 건 어찌 보면 때 이르다 싶을 때도 있다. ‘기준과 사려의 공정한 운용’이 막상 힘든 원인으로 세 가지 정도가 떠오른다.
우선, 기준과 사려는 같은 목적일 뿐 아니라 같은 마음의 싹에서 나왔다. 맹자는 그게 사람 마음속 네 가지 싹 가운데 측은지심(仁)과 수오지심(義)의 반죽에서 태어난 이란성쌍둥이임을 알게 해 줬다. 타인의 고통을 딱하게 여기면 남의 옳지 않음을 미워하는 마음과 자신의 옳지 않음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기 마련이다. 같은 목적과 같은 싹에서 자란 게 부딪히니 어찌 쉬울까.
여건의 사전적 사려가 선행됐다고 전제한다면, 일반적으로 공적 영역에 가까울수록 공평한 기준에 더 비중을 두고, 그다음 올바른 사후 사려가 따라야 한다고 여긴다. 사적 영역에 가깝다면 그 반대겠고…. 근데 공과 사의 회색지대가 더 넓으니 문제다. 어떤 종류의 유·무형의 자원을 나눠야할 지에 따라서도 애매하다. 엄정한 기준과 따뜻한 사려를 어떻게 배분하면 공동체 모두에게 혜택이 가장 클까를 재는 사회인류학적 만능 계량기가 나왔으면 할 때조차 있다.
둘째, 공정이 자기중심적으로 해석되거나 공정을 향한 불신과 두려움이 너무 깊다는 생각도 든다. 내 집단의 피해를 우려해 타 집단의 처우 개선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이들을 그저 이기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자기 이익만 탐한다기보다 자기 이익 앞에 약할 뿐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내 자리를 지키려 할 뿐이다. 내 피해에 대한 두려움과 보상 못 받는 내 노력에 대한 상실감에 자연스럽게 마음이 갈 뿐이다. 약자의 처우 개선에 대항한 ‘역차별’이나 심지어 ‘강자’의 반칙이라는 표현은 그런 감정의 안전망 역할을 하지 싶다.
그 두려움에 이유가 없지 않으나, 어째야 할까, 한쪽의 두려움에 잠식된 공정을 공정이라 할 도리 또한 없으니…. 굳이 이름하자면 ‘자기중심적 공정’이랄까. 근데 이런 말은 없으니, ‘기준에 따라 공평하게 대우받을 권리’ 정도가 적당한 표현이겠다. 현실적이며 소중한 권리다. 다만 '권리'를 내세워 손해 볼 일은 잘 없다. 공정을 내세우는 건 때로 손해를 보는 일이다. 혐오가 권리가 아니듯 공정도 권리가 아니다. 혐오가 본능이듯 공정도 원래는 본능적 가치다. 자기 중심적 권리가 우리의 공정으로 오용되는 건 좀 그렇다.
최근의 공정이 정말 공정인가 하는 삐딱한 시선은, 맥락 있는 의심이다. 우리 몸에는 불공정한 현대사가 공정보다 깊이 새겨졌다. 꾸준히 뭔가 내걸렸지만 번번이 배반당했다. 공정하게 자라본 적이 없는 나는, 바로 지금 당신이 말하는 그것 역시 당신의 혜택만 살피는 불공정과 무임승차의 변종 아닐까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입시제도가 올해 다르고 내년 다른 이유다. 이런 불신도 참 그렇다.
셋째, 공정 개념 자체가 실체 없는 유령일 수도 있다. 법률 조문은 대게 개념 정의부터 시작하던데, 공정을 포함한 이름의 우리나라 9개 법률 어디에도 그 정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공정 행위를 나열하며 단죄한다. 공정은 모든 추상적 가치가 그렇듯 편의적이고 논리적인 테두리로 둘러싸인 자의적 개념이다. 게다가 시간적, 지역적, 문화적 맥락마다 변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현실적으로도 의미 없다는 걸 뜻하진 못한다. 공정이 아무리 의심스러운 유령 같아도 이미 수많은 이해관계를 때리며 일고 있는 현실적 파도다. 어쩌면 나아갈 방향일 뿐이거나 심지어 시선만 묶어두는 맥거핀에 불과할지라도, 이미 실체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귀하게 무대에 오른 공정의 고민이 불신의 벽을 넘고 이어졌으면 좋겠다.
“나이를 막론하고, 여러 가지가 동시에 다 참일 수 있다는 걸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얼마나 드문 일인지 아세요? 진짜 복잡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요.” 데이비드가 클라런스를 ‘강추’하며 한 말이다. ‘사이다’가 아닌 ‘고구마’가 성공하는 일이 드문 시절이다. 공정이 몸에 새겨진 이에게는 공정이 고구마일 리 없다. 그냥 안다. 공정한 사회에서 자란 이는, 손에 잡히는 기준이나 규정이 없으면 당장 큰일 날 것 같은 두려움과 피해의식으로부터 대범하다. 당장 없어도 얼마든지 잘 견딜 것이며 금방 또 함께 만들 힘이 있음을, 그냥 안다. 내가 경쟁이나 혐오의 뜻을 절대 모를 수 없는 것처럼.
물론 ‘공정이 별거냐. 능력에 따른 보상 아냐?’라는 직관적 주장도 자주 듣는다. 출생, 신분, 교육 여건을 베일에 가리고 자기 능력(재능과 노력)만으로 보상을 받는다면 공정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런 입장을 거부하는 석학은 너무 많다.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며 풍자한 영(M. Young)을 비롯해, 롤즈(J. Rawls)는 ‘정의의 조건 위에서 공정성 책무’를, 샌델은 ‘공정을 초월하는 가치’를, 왈저(M. Walzer)는 ‘분배 영역별로 특화된 복합평등’을, 드워킨(R. Dwokin)은 ‘가상적 보험시장이 작동하는 공정’을, 센(A. Sen)은 ‘실질적 역량 평등화로서의 공정’을 말한다.(**후주)
이들의 얘기는 결국 두 가지일 게다. 첫째, 능력제일주의는 사회 구성원의 연대감과 상호 의무감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능력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에 대한 신화적 칭송이 높아질수록 실패는 전적으로 개인의 탓으로 전가되며 패자의 굴욕과 분노도 높아지게 된다. 궁극 목적인 공동체의 결속을 해친다. 자수성가했다는 그 능력조차도 오롯이 당사자의 노력 덕분일 수만은 없으니, 애초 능력을 가질 기회로부터 소외된 이나 다른 종류의 능력을 지닌 이들을 사려할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요는 ‘더 공정한 공정’을 보자는 말이다. 당장 눈앞에는 없으나 어딘가 있을 자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반칙에 저항하는 감수성이 됐든, 내 피해에 예민한 이유 있는 두려움이 됐든, 밀려난 이에 대한 사려이든, 공정의 실체를 향한 맥락 있는 의심의 눈초리든, 결국 눈앞에 공정이 모자란다는 한 가지 감정의 다른 이름들임을 안다. 나도 없고 너도 없다는 공정의 결여 감정 너머에 더 공정한 자리를 함께 마련하자는 얘기일 테다.
‘인싸’와 ‘아싸’로 갈린 청소년 간의 갈등을 담은 성장소설의 한 문구. “(그녀가) 앞마당에서 봤던 저녁놀과 내가 뒷계단에서 봤던 저녁놀이 하나라는 게 기묘하게 느껴졌다. 두 개의 다른 세계는 그리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우리는 같은 저녁놀을 보았으니까.”(S. E. 힌턴, 《아웃사이더》, 문예출판사, 2016. 75p)
공정이 화두인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같은 결핍을 보았으니까. 나는 자녀의 의심스러운 입시 결과에 분통 터지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내 편익 중심으로 매긴 인사 평점 탓에 부하 직원의 손가락질을 받는 상사이기도 하다. 공정 개념의 실체가 흐릿한 이유도 그래서다. 나와 당신에게 공정이 부족하니까.
이게 아니다는 공유하지만 그럼 뭔지는 공유하지 못했다. 같은 결핍이 서로 손가락질거리이기만 할까. 같이 쓸 아픈 지렛대가 될 순 없을까. 우리의 공정이 모자라기에 서로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괴로움이 있다. 그 괴로움이 주는 절실한 동질감과 유대감을 더 깊게 나눌 수 있는 공동체의 성숙과 여건 마련의 지렛대 말이다.
공정의 화두를 이끌 지도자도 그래서 중요하지 싶다. 실체 없는 유령에게 형상을 그려줘야 한다고 해서 중구난방 스케치할 수는 없다. 어떤 형상이어야 할지는 목적이 인도할 게다. 목적을 깊이 새긴 채 수단을 화해시켜 밑그림을 그릴 줄 아는 스케쳐의 자리가 중요해진다.
내 속의 재수 없는 자아들을 화해시킬 때도 그렇다. 싸우는 양쪽을 화해시키려는 이는, 1) 양쪽의 이야기를 이해할 줄 알고 복잡성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2) 싸우는 목적에 비춰 두 이야기의 선후를 가릴 줄 알아야 한다. 3) 결과가 둘의 몫에 대한 적절한 안배를 해쳐서도 안 된다. 결핍의 감정을 지렛대 삼아 사나운 기준과 따뜻한 사려라는 두 수단을 그렇게 화해시킬 줄 아는 이가 더 공정한 공정을 이끌 지도자일 것이다.
사실 떡 써는 한석봉 어머니 품 속에서 자라난 절박함이 새겨진 우리 마음에는, 공정을 말하기 전에 공평이나 능력주의조차 턱없이 모자란다고 느껴질 법하다. 그러니, 어떻게 뒷받침된 능력이건 현재 내 능력만큼 보상받겠다는 요구를 두고 특정 세대나 개인주의 성향만을 탓하는 것도 우리 공동체의 성숙한 결속을 위해서는 아쉬운 태도지 싶다.
공평 너머의 공정은 어쩔 수 없이 오래 열려 있을 자리다. 비관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다양할 거라는 거다 . 능력주의 같은 획일적 기준 하나보다는 다양한 기준이 어우러지는 자리일 거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 개방성을 견뎌낼 수 있다. 서구와 달리 우리는 오랜 세월 한(恨)이라는 공통 정서를 나눠온 사람들이다. 원망스럽고 억울하고 안타까워 응어리진 마음속으로 함께 머물렀던 정서다. 내 피해에만 민감하지 않고 남의 아픔과 사정에 마음 쓰며 견뎌온 유전자다. 걸음마를 떼고 있다. 결여된 공정의 각자 다른 이름표를 매단 이들 모두 ‘더 공정한 공정’과 ‘우리의 공정’을 향한 유대감으로 함께 하면 참 좋겠다.■
[후주]
*) 세계적인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동녘사이언스, 2007) 6~7장 ; 장대익, 《공감의 반경》(바다, 2022) 1~2부 ; 로먼 크르즈나릭, 《공감하는 능력》(더퀘스트, 2018)의 ‘첫 번째 습관’장 등에는 공감의 여러 측면과 한계, 그리고 확장 가능성에 대한 진화심리학·진화생물학·신경학·인류학적 사례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 장대익은 감정적 공감을 감정이입으로, 이성적 공감을 역지사지로 요약한다.
**) 김범수, 《한국 사회에서 공정이란 무엇인가 : 공정한 나를 지켜줄 7가지 정의론》, 아카넷, 2022 ; 서정혁, 《공정하다는 착각의 이유, 원래는 능력의 폭정》, 커뮤니케이션북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