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었어? 어제 408호 아저씨가 죽어 봤대.’ 흐음, 이게 구라라는 데 손모가지를 걸 수 있다. 혹시 죽어 본 분?
빛을 쬐어 본 적은 많다. 어둠 가운데 선 적도 있다. 빛은 찬란하며 어둠은 깊다는 걸 알기에 빛의 반대말은 어둠이라 말할 수 있다. 무거운 걸 들어봤고 가벼운 걸 던져봤기에 무거움의 반대가 가벼움임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기지, 그러니까 이미 아는 것끼리 반대 짝을 짓는다.
삶의 반대말이 죽음이라는데, 리얼리? 사후세계를 겪었거나 심장이 골로 갔다가 돌아온 적 있는 분? 죽음의 밝기를, 맛을, 냄새를, 색감을, 중량을, 주소를, 인스타 계정을, 그중 하나라도 아는 분? 죽음을 아는 이 없건만 삶의 반대말이 죽음이라고들 자신한다. 갸웃한다. 죽음을 말한다는 매 순간 실은 삶을 말할 뿐이던데? 죽음을 내놓는 모든 순간 우리는 절대 미지의 구라를 베팅하는 거던데?
알면서 속는 얘기다. 경험칙이 알려준다. 빛의 바깥에는 어둠이 있지만 삶의 바깥이란 없다고. 척 봐도 안다. 무궁화 꽃이 피기 전에는 목숨 건 뜀박질이 가득하듯이 실은 삶만이 다일 리 없건만, 무궁화 꽃이 피고 나서야 돌아 보는 술래에게는 삶만이 전체라고. 그 술래가 아는 죽음이란 기껏해야 삶의 사전 안에 담긴 표제어 중 하나일 뿐이다. 삶의 반대가 죽음이라면 부엌의 반대는 도마란 말이냐.
삶 전체의 반대말을 억지로 지어야 한다면 ‘절대 무, 절대 절멸’일까. 그걸 떠올리기라도 하는 순간 더는 그것일 수 없는 절대적 없음 말이다. 그건 어떤 게 아니다. 떠올려 내고 느낄 수 있는 어느 것도 아니다. 그러니 어느 것도 아니라는 말조차 불확실하다. 진공의 시공간을 떠올릴 순 있어도 시공간조차 없는 상태를 떠올리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란 걸 떠올리고 앉은 내 활동성(生)이 숨 쉬는 한, 더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일 수 없게 된다. 그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살고 있을 뿐이다. 생만 있을 뿐 생의 바깥은 없다. 결국 절대 무로서의 죽음 역시 악무한의 허상일 뿐이다. 죽음은 결코 떠올려지지도 말해지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말해야 한다. 경험칙에 반해서 어쩌면 입각해서, 마침내 삶 바깥의 죽음을 말해야 한다. 절대 미지는 못 만나도 그 두려움과 슬픔의 효능과는 만나야 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으나 생을 멈추지 않게 하는 공기임을 느끼는지라.. 한 노시인은 돌아가시면서 ‘좋은 시 많이 남기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 하셨으므로.
죽음을 말하고서야, 살겠다는 목마름과 삶의 의미도 준엄해졌다. 삶의 바깥을 두려워하고야 그날 밥벌이와 밥짓기가 엄중해졌다. 삶의 너머를 슬퍼하고야 도움 받고 격려하고 눈 흘기며 꿈꾸듯 춤추듯 사랑할 수 있었다. 고통스러운 삶의 관계 모든 국면에서도 삶을 살 것임을 다짐할 수 있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열띠게 죽음을 말하는 모지리인 덕분에, 만날 수 있으며 미워하고 이해하고 용서됐다. 삶은 그렇게 죽음에 빚지며 단단해졌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로마의 한 공동묘지 입구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라고 한동일 님이 말했다. 먼저 산 이가 나중을 사는 이를 위해 쓴 격언이다. 주어가 '죽음이'일지 '삶이'일지 궁금해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어느 쪽이든 같은 뜻의 문장인지라.
삶과 죽음은 다른 말이 아니지 싶다. 삶이 자신의 사전에 올린 죽음을 풀어 쓰면 삶의 의미를 구하려는 노력이자 삶을 견디려는 사랑이니 삶을 향한 절대 갈망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격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죽음을 말하는 매 순간은 오직 삶을 말하는 가장 열띤 순간이니, 삶을 말하려는 자 애도와 작별한다면 앙꼬 없는 찐빵이다.
그리고 삶은 기어이 만남이니 우리의 이야기는 거기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