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매쉐프가 말아주는 국제정세 스파게티 : 일본편
1859년, 요시다 쇼인이 참수당한다.
(아베 총리가 존경한다던 그 쇼인 맞습니다.)
죄명은 불경죄(국체위협) + 노중(老中: 막부 최고위 관직) 마나베 아키카츠 암살 음모
이른바, 안세이 대옥(安政の大獄) 이었다.
학자였던 쇼인은 왜 암살음모를 꾸몄을까?
당시 막부 시스템에는 ‘반대 의견’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나라를 위해 조약을 수정해야 한다”는 상소는 묵살됐고, “서구를 배우겠다”는 밀항 시도는 범죄가 됐다.
합법적인 반대의 통로가 모두 봉쇄된 사회에서, 반대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별로 없다.
대부분이 선택하는건 ‘과격화(Radicalization)’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찌른다.”
쇼인이 암살을 기획한 건 그가 원래 살인광이어서가 아니다.
시스템이 그의 입을 막자, 그가 할 수 있는 ‘반대’의 수단이 많이 없었다.
막부는 그를 죽임으로써 질서를 지켰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그 처형이 막부의 수명을 끊는 신호탄이 됐다.
이 죽음은 일본 역사에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반대를 제도로 수용하지 못하면, 반대는 칼이 되어 돌아온다.
그는 막부 말기의 사상가였다.
그런 그가 죽은 이유는 사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스템 때문이기도하다.
당시 막부 시스템에서 ‘반대’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치안 사건이었다.
쇼인은 막부가 서구 열강 앞에서 우왕좌왕하며 권위를 잃고 있다고 봤고,
“나라가 살려면 통치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떠들었다.
막부의 논리는 단순했다. “안정이 국시다.”
안정된 질서(막번 체제) 안에서 체제를 건드리는 반대 의견은 ‘논쟁’이 아니라 ‘체제 위협’으로 분류된다.
쇼인의 죽음이 보여주는 것은 일본 사회의 ‘기본값(Default)’이다.
이 나라에서 반대 의견은 원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쇼인이 죽고 10년 뒤,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시대가 열린다.
그리고 아주 잠깐,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반대가 생존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이 글은 그 짧았던 유연함이 어떻게 태어났고,
왜 다시 쇼인이 살았던 시대로 (반대가 죽는 시대로) 회귀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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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이 대옥의 시작은 쇼군 후계 구도에서의 세력싸움과
미일 수호 통상조약을 이이 나오스케가 천황의 허가 없이 무단으로 체결한 사건에서 기인했다.
다시 말하면, 쇼인의 암살 모의 혐의로 시작된게 아니었다.
안세이 대옥 수사가 시작되었을 때, 쇼인은 원래 다른 혐의(도망자를 숨겨준 혐의 정도)로 에도로 압송되었다.
그런데 조사관이 묻지도 않은 암살 계획을 갑자기 술술 자백해 버렸다.
왜냐고?
쇼인의 생각:"나의 이 충정(나라를 걱정해서 노중을 죽이려 했다)을 말하면 막부도 감동해서 정신을 차리겠지?" (지성감천의 논리)
막부의 생각:"이놈 진짜 위험한 테러리스트네? 죽여."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늘이 감동해서 쇼인을 아주 데리고 가버렸네)
전쟁이 무서운 이유는 총알 때문이 아니다. 총알은 정직하다. 맞으면 죽고, 빗나가면 산다.
전쟁에서 진짜 무서운 건 회의실이다. 회의실에서는 사람이 죽지 않는다.
대신 책임감이 죽는다. 책임감이 죽으면 선택지가 죽어나간다.
이 글의 질문은 단순하다. 일본은 왜 스스로를 멈추지 못했나?
일본의 패망은 “미국이 너무 강해서”였다.
생산력, 항모, 자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결과다.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
일본은 졌기 때문에 망한 게 아니라, 멈추지 못해서 망했다.
멈추려면 반대의견이 살아있어야 했다.
반대의견은 유연함에서 나온다.
즉, 유연함은 반대가 살아남는 시스템이고, 경직성은 반대가 죽는 시스템이다.
반대가 죽는 방식은 현실적이다.
대개 네 가지로 작동한다.
인사: 틀렸다고 인정하는/인정되는 순간 커리어가 끝난다.
군축조약 지지자 공격, 군비 축소 인사 암살.
예산: 위협과 확장이 돈(예산)이 된다.
1912년 군비 증강 갈등·군부 예산 증액을 위한 내각 흔들기.
명예: 후퇴는 전략이 아니라 굴욕이 된다.
조약을 ‘굴욕’, 반대를 ‘매국’으로 낙인.
책임: 결과가 아니라 “절차대로 했다”가 면죄부가 된다.
만주사변·현장 독단에 중앙이 숟가락 얹는 구조.
이제부터는 이 네 가지가 실제로 어떻게 사람을 침묵시키고, 전쟁을 확대시키는지 알아보자.
막부와 메이지의 차이는 지도자의 성격이 아니다. 운영 규칙이 달랐다.
막부의 목표는 ‘안정’이었기 때문에 외부 충격을 차단하고 내부 반대를 눌렀다.
반면, 메이지 초반의 목표는 ‘생존’이었다.
서구 열강에 먹히지 않으려면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공포가 정권의 연료였다.
생존이 급하면 자존심보다 실용이 앞선다.
“저쪽이 낫다면 갈아타자.”
“반대가 타당하면 멈추자.”
쇼인의 처형으로 상징되던 ‘경직된 일본’에서, 메이지의 유연함은 생존을 위해 강제된 돌연변이였다.
1870년대 초, 일본은 청년 이토 히로부미가 포함된 이와쿠라 사절단을 서구로 보내 서구를 뜯어본다.
법, 교육, 산업, 군제.
중요한 건 “견학”이 아니라 "갈아 끼움"이다.
“저쪽이 더 낫다면, 우리 걸 버리자.”
아직 군국주의화 되기 전의 일본,
이때까지는 군대도 국가를 위한 부품이었다. 부품은 주인이 바꾸라면 바뀐다.
정치가 군사 위에 있었기 때문에 수정이 가능했다.
1873년, 정한론 논쟁. 핵심은 전쟁파가 옳았냐가 아니다.
"전쟁하자"는 군사적 열망을 "아직 이르다"는 소수의 정치적 판단이 눌렀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 내각은 군부의 폭주를 제어할 힘이 있었다.
전쟁 추진 핵심 세력을 물러나게 하고, 일본은 "멈춤"을 선택했다.
막부 시절이었다면 반대파가 숙청당했겠지만, 메이지는 반대 의견을 정책 수정(내치 우선)의 재료로 썼다.
유연함은 가속 페달을 밟을 때가 아니라, 브레이크를 밟을 때 증명된다.
소수지만 반대의견을 말하는 레드팀을 살려두고 정책의 워게임(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동력으로 쓴 거다.
이때까지의 워게임은 '진짜' 워게임이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워게임은..)
지방 권력을 해체하고 중앙집권으로 갈아 끼운다.
지금이야 당연한 행정개혁일 수 있지만
당시의 일본에서 이런 식의 행정개혁은
기존의 질서를 뒤흔드는 개혁이었다.
이 폐번치현은 일본을 유지해 온 봉건제를 하루아침에 삭제했다.
당시 일본은 '번'이라는 지방 세력들의 연합체 성격이 짙었고
다이묘(영주)는 자기 영토에서 사실상의 왕이었다.(조세, 사법, 군사)
근데 그런 '번'을 메이지 시대 들어와
"오늘부터 너희 땅 다 뺏고, 세금도 우리가 걷고, 너네 부하(사무라이)도 다 해고야"라고 선언한 것이다.
거기다, 수백만의 기득권층인 무사계급의 사무라이를 해고한다는 것은
그들의 밥줄을 끊고 정체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내전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을 만든 것이다.
그야말로 '자살'에 가까운 '도박'행위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무라이 불만을 해외로 돌리려고 임진왜란 일으켰다는 썰이 괜히 학계 내의 '강력한 설'이 된 게 아니다.)
만약 유연한 사고가 없었다면, 이런 위험성을 굳이 담보하려 하지 않고
기존의 것을 유지하려고 했겠지만
이 시기 특유의 유연한 사고가 강력한 중앙집권 + 집행력을 담보할 수 있는
폐번치현의 개혁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위험한 씨앗을 심기도 했다.
"중앙이 결정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이 효율성은 리더가 똑똑할 때는 축복이지만,
수뇌부/리더가 멍청해지거나 경직적으로 변하면 재앙이 된다.
다시 말해서,
유연함이 살아있을 때는 강력한 무기가 되지만
유연함이 사라지면 내 발 앞에 떨어진 수류탄이 되기도 한다.
교육 체계를 깔고, 세원을 안정시키고, 징병으로 동원 시스템을 완성한다.
이건 유연함이면서 성공의 토대였다.
그리고 폐번치현과 마찬가지로 훗날 독이 되기는 한다.
동원 엔진이 강할수록, 브레이크 고장은 더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며 이 균형이 깨진다는 점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는 역설적으로 ‘생존의 공포’를 지워버렸다.
성공신화가 사람을 마취시켰다.
마취된 사람은 외부의 자극에 빠른 대처를 할 수 없다.
인간의 신경이 왜 고통을, 공포를 느끼도록 진화했겠는가?
공포가 사라지니 유연함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다시 막부 시절의 유령이 돌아온다.
다이쇼 시대(1912~)를 거쳐 쇼와 시대(1926~)로 넘어가며,
일본은 다시 요시다 쇼인이 죽던 시절의 문법으로 회귀한다.
‘제도’와 ‘암살’이 반대를 죽여버린다.
효율적인 군사 행정을 위해 만든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가 도리어 일본의 목을 겨눴다.
원래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는 1900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만들었다.
당시 성장하던 정당 정치인들이 군사 기밀에 접근하는 걸 막겠다는 '보안용 방화벽'이었다.
하지만 1912년, 군부는 깨달았다.
이 법을 이용하면 내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사이온지 내각이 군비 증강을 거절하자, 육군대신이 사임한다.
그리고 군부는 후임을 보내지 않는다.
법적으로 현역 장성만 장관이 될 수 있으니,
군이 보이콧하면 내각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내각을 무너뜨리려 한 거다.
(우린 이걸 시건방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이것은 단순한 파업이 아니다. 군부가 정부의 생사여탈권을 쥔 것이다.
"우리 예산 안 올려줘? 그럼 내각 깨버린다."
이때부터 정치는 군의 눈치를 보게 된다. 반대는 곧 내각의 붕괴를 의미했다.
"재정이 부족합니다"라는 반대에 군은 논쟁하지 않는다.
정권이 무너지는 걸 본 관료들은 학습한다. "군을 거스르면 정치는 불가능하다."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워싱턴 군축 조약/런던 해군 군축 조약은 예산을 아끼려는 합리적 계산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통제 불능이 된 군부는 이를 "통수권 침해"라고 공격한다.
숫자의 문제(예산)가 신성한 권리(통수권)의 문제로 둔갑한다.
이 프레임 안에서 반대자는 '매국노'가 된다.
(이런 식의 프레임을 어느 조직에서나, 어느 나라에서나 항상 본다.)
총리대신을 역임한 하마구치 오사치는 군을 문민통제하려 시도했으며,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수용했다는 이유로 1930년 도쿄역에서 우익 청년에게 저격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1년 뒤 사망한다.
뒤이어 1932년에는
중국과의 충돌을 협상으로 봉합하려 했으며 그것을 위해 군을 통제하려던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가 암살당하고, (5·15)
1936년에는 총리를 지냈던 재무상 다카하시 고레키요도 군의 예산을 줄이려던 과정에서 살해당한다.(2·26)
이제 시스템은 완전히 경직된다. 반대는 커리어의 끝이 아니라 생명의 끝이다.
회의실에서 "신중하자"는 말이 사라진다.
살아남은 건 "강경하게 나가자"는 앵무새들뿐이다.
(문관 총리 그만 죽이고 그냥 니네가 총리 하지 그러냐?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대본영은 전쟁을 지휘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현장의 인질이 되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장의 도박에 편승하는 공범'이었다.
*대본영 : 일본 군사 지휘의 중추. 전쟁을 굴리는 일종의 ‘뇌’. 한국의 합동참모본부와 유사.
1) 1931 만주사변: 대본영의 ‘이기면 내 공, 지면 네 탓’
관동군은 정부의 방침을 무시하고 전쟁을 일으켰다(독단전행).
대본영은 이를 묵인했다.
왜일까?
그들에겐 ‘손해 볼 것 없는 도박’이었기 때문이다.
관동군이 지면?"현장의 독단이었다"며 꼬리 자르고 처벌하면 된다.
관동군이 이기면?"제국의 영토를 넓혔다"며 숟가락을 얹고 추인(사후 승인)하면 된다.
결국 관동군은 이겼고, 대본영은 승인했다. 이 순간 치명적인 학습이 일어난다.
"허락받고 하는 건 하수다. 저질러 놓고 이기면 영웅이다.“
현장은 폭주하고, 중앙은 전리품만 챙기는 하청 구조가 완성된다.
2) 1937 루거우차오: 소수의견(반대의견,레드팀)의 죽음
중일전쟁의 시작으로 불리는 이 사건,
사실 국지전으로 끝낼 수 있었다.
실제로 "확전 반대(전면전 반대)" 파가 있었다.
하지만 회의실 공기는 이미 "약한 소리 하면 밀려난다"는 공포에 지배당했다.
소수의 확전 반대파는 "준비가 안 됐다"고 논리적으로 말했지만,
확대 찬성파는 "한 번만 세게 때리면 중국은 무너진다"는 희망을 팔았다.
책임을 지기 싫은 관료주의는 언제나 '소수의 비관적 현실'보다 '다수의 낙관적 희망'을 선택한다.
다수의 뒤에 숨는 것이, 소수의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
(삼국지가 일본제국군 장교들 필독서 맞아? 조조도 서촉은 함락 못 시켰어 바보들아)
3) 난징대학살과 남진: 매몰 비용의 덫
상하이와 난징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이제 전쟁은 전략이 아니라 "보상 심리"가 된다.
"여기서 그만두면 죽은 병사들은 개죽음인가?"이 감정적 호소가 전략적 판단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대학살로 너무 많은 죄를 지어버렸다.
멈추기보다 완벽하게 승리해서 합리화하는 게 싸게 먹힌다고 착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군대를 뺄 수 없으니, 자원이 더 필요하다.
자원이 필요하니 동남아(남진)로 가야 한다.
동남아로 가려니 미국과 부딪친다.이건 계획한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도 멈추지 않는다.
멈추라고 하는 사람은, 그럴 용기를 가진 사람은 이미 회의실에 없다.
좌천당했던지 전역당했던지.
하나의 거짓말을 덮기 위해 더 큰 거짓말을 하듯,
하나의 실패를 덮기 위해 전선을 넓힌 결과는 미국과의 전면전이었다.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도 너네보단 빨리 멈추겠다)
4) 1941 진주만: 답을 정해놓고 돌린 ‘내가 옳은’ 시뮬레이션
1941년 여름, 일본 내각 직속 '총력전 연구소'는 모의전(워게임)을 실시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개전 시 일본 필패(必敗)."자원 부족과 국력 차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조 히데키와 지도부는 이 결과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건 책상 위의 이론이다. 전쟁은 계산 밖의 요소(정신력)가 있다.“
(아니 이 양반아 이럴거면 워게임 왜 하는 거야? 그냥 이겼다 ‘치고’ 하지)
심지어 해군 워게임에서는 미군 항모에게 격침당한 일본 함정을 "아직 안 죽었다 치고 진행하자"며
억지로 부활시키기까지 했다.
그들은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짠 게 아니라, 개전을 정당화하기 위해 데이터를 조작했다.
("했다‘치고’가...." 진짜로 일어나 버렸습니다. / 역시 육군보다 앞서가는 일본 엘리트 해군..)
데이터는 "진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
하지만 회의실은 "해야 한다"고 윽박지른다.
그들은 데이터를 버리고 망상을 택했다.
패망은 미군 폭격기가 오기 전, 조작된 워게임 테이블 위에서 확정됐다.
(이거 어디서 너무 많이 본 그림인데....)
생각해보면,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라고 했던 ‘어둠의 독립군’ 무다구치 렌야도 그렇고
일본제국이 패망을 향해 갈수록 제정신인 놈이 별로 없었다.
마치 전염성있는 단체 PTSD라도 앓는 것처럼.
(feat. 일본 3대 오물 - 검색 추천)
*무다구치 렌야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라며
버마 방면 정글에 보급 없이 일본군을 밀어 넣어
일본 육군의 엄청난 손실을 유발,
괴멸적인 파괴를 입힘.
광복군보다 무다구치렌야가 죽인 일본군이 더 많을 정도.
오죽하면 전투에 들어가기에 앞서 작전을 보고받은 천황 히로히토가
"이게 정말 가능한 작전인가?"라고 되물었을까
(근데 그랬으면 니가 조서내려서 작전 취소 시켰어야지)
그리고..
서비스 가니쉬로 그가 남긴 어록 중 일부를 소개한다.
(오늘 서비스 풍년입니다. 여러분)
버마는 주변 산들이 이처럼 푸르다. 일본인은 원래부터 초식동물이다.
이렇게나 푸른 산에 둘러 싸여 있으니, 식량이 부족하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길가에 있는 풀을 뜯어먹으며 전진하라.
-임팔에서 패배하기 전, 보급문제를 거론하며 작전을 우려하는 참모에게 한 말-
-무다구치 렌야의 유언-
일본은 처음부터 무능했던 게 아니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학습했고, 조정했고, 집행했다.
이 시기,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모습 중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메이지 시대가 도덕적으로 완벽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잔혹했지만, 적어도 '현실 인식'에 있어서만큼은 완벽하게 냉정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성공의 기억이 만든 '통수권 독립'과 '군부 우위의 구조'가 스스로의 목을 졸랐다.
마취제가 든 주사기를 스스로의 목에 꽂아 넣고, 통증과 공포를 잊은 채
그저 앞으로 돌격해 나갔다.
(아~ 그래서 너네가 장갑차 상대로 착검 반자이돌격 했구나! AKA. 노몬한전투)
인사: 반대하면 잘린다.
책임: 저지르면 영웅, 멈추면 역적.
구조: 현장이 저지르고 중앙은 전리품만 챙긴다.
이 시스템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건 너무나 쉽다.
하지만 전쟁을 끝내는 건 불가능하다.
끝내는 건 '내가 틀렸다'며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본제국의 중요 선택마다 매 순간 일본제국을 지배한 생각은
‘내가 옳다’였다.
그래서 일본의 패망은 진주만 공습 때문이 아니다.
대본영의 회의실에서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마지막 한 사람이 사라진 순간, 제국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물론,
다수의 찬성목소리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목소리도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수의 반대목소리가 쓸모없는 것도 아니다.
그 목소리 역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소수일 때 필연적으로 위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낸다는 건
사실은 다수의 상황일 때보다 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런 용기를 가지고 반대의 목소리를 낸다는 건
지금 진행하고 있는 어떤 일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을 수 있다는 시그널이다.
당장 나에게 반대하는 목소리가 들리면
기분이 나쁘다.
나보다 지위가 낮거나,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껴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옳다’는 증명서가 되지는 못한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나도 틀릴 수 있음’을 마음 한켠에 두어야 한다.
군국주의화 된 일본에는
‘나도 틀릴 수 있음’이 없었다.
그게 역사적인 성공을 만든 메이지유신을 뒤로하고
1945년 일본의 패망을 만들었다.
당신은 성공하고 있는가, 아니면 패망하고 있는가?
당신의 마음속에는
‘나도 틀릴 수 있음’이 있는가?
야매쉐프가 말아주는 국제정세 스파게티 : 일본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