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금수론 : 약한 '깡패'의 외교술

야매쉐프가 말아주는 국제정세 스파게티 : 고려편

by 야매쉐프

프롤로그|이 시대의 외교, 고려(高麗)에게 길을 묻다

서쪽엔 중국, 동쪽엔 일본, 북쪽엔 러시아, 태평양 건너엔 미국. 한반도는 늘 “4강 사이”라는 말로 정리된다.

우리는 종종 “자주”를 로망처럼 외치지만,

동아시아의 전통 국제질서에서 약소국이 살아남는 방식은 대개 프로토콜(조공–책봉 같은 형식)안에서

실리를 뽑아내는 것이었다.


고려도 그 규칙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았고, 그래서 더 오래 버텼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함정이 있다.
“외교를 잘했다”를 “전쟁이 안 났다”로 해석하면, 오해가 생긴다.

요(거란)는 세 번 쳐들어왔고, 금(여진)도 쳐들어왔고, 원(몽골)은 30년을 두들겼다.

그러니 고려 외교의 채점 기준은 이렇게 바꿔야 한다.


외교를 잘한다는 건 전쟁을 0으로 만드는 마법이 아니다.


약소국 외교의 진짜 목적은 전쟁이 나도 판을 키우지 않고, 손실을 통제하고, 국체를 지키고, 다시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의 엔진은 딱 하나다.

국제 정세를 읽는 눈.


누가 강자인지, 강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강자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걸 읽는 순간, 약소국도 “센 척” 대신 “비싸게” 굴 수 있다.



0장|체급표부터 깔고 가자: 고려가 상대했던 놈들은

‘동네 깡패’가 아니었다. 전국구 마피아였다.


고려가 상대했던 요·금·원은 “북방 오랑캐”로 뭉개서 바라보면 고려의 외교를 이해하기 어렵다.
고려는 단순히 ‘센 나라’와 싸운 게 아니라, 당대 세계 최상위권의 군사 시스템과 맞붙었다.


① 요(거란): 송과 어깨를 나란히 한 ‘황제국’

요는 기병 기반 군사력과 북방 지배체제를 완성한 제국이었다.
송이 문화적으로는 화려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요를 함부로 못 했다.

송이 요에게 돈(세폐) 주고 평화를 산 시대가 길었다는 사실 자체가 요의 체급을 설명한다.

즉, 고려가 맞붙은 요나라는 송과 장기전으로 맞먹던 황제국이다.


② 금(여진): 요를 무너뜨리고, 송의 수도와 황제를 잡아간 놈들

여진은 ‘변방 세력’에서 출발했지만, 금을 세우고 요를 밀어버린다.
그리고 송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황제를 포로로 잡는 수준의 파괴력을 보여준다.
“강하다”가 아니라, 나라를 반쪽내는 방식으로 강하다.


③ 원(몽골): 강대국이 아니라 세계제국

몽골은 한 지역의 패자가 아니라 유라시아를 관통한 시스템이었다.
기동력(말), 화력(복합궁), 조직력(십진제), 공포의 연출까지.
고려가 몽골을 상대했다는 건 “센 나라와 싸움”이 아니라, 세계사급 쓰나미를 맞은 것에 가깝다.


이 체급표를 깔고 들어가면, 고려의 “사대-교린”, “협상”, “버티기”, “굴복”, “부마국” 같은 선택들이 훨씬 빨리 이해된다.


그건 비겁함의 역사라기보다, 생존 프로토콜의 역사다.


그리고 지금 요,금,원 모두 유럽까지 위협한 당대 최고의 군사력을 가진 국가였다.

고려가 군사적으로 상대해서 이기는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나라들이었던 것.




1장|“중원은 단순하지 않았다” : 난장판 속에서 캐스팅보트를 쥔 고려


고려가 태어난 10세기 초중반, 중원은 깔끔한 “중국=한 덩어리”가 아니었다.
당이 무너진 뒤 오대십국의 난장판이 펼쳐졌고, 송의 통일은 단계적으로 진행됐다.


즉, 이 시기 국제질서는 ‘한 강대국 vs 약소국’ 같은 단순 구도가 아니라, 여러 강자·준강자들이 서로 견제하며 판을 뒤엉킨 구조였다.


그리고 판이 재편되며 동아시아의 두 축이 생긴다. 남쪽엔 송, 북쪽엔 요(거란).
이 둘이 서로를 물어뜯는 순간, 고려는 단순한 ‘힘’(군사력)이 아니라 ‘자리’(지정학)로써 중요해졌다.


송은 고려를 끌어들여 요를 견제하고 싶고

요는 “송과 친한 고려”가 뒤통수 칠까 전전긍긍한다


이게 고려의 지옥이면서 동시에 기회다.




1) 송이 먼저 손을 내민다: “우리랑 같이 거란 치자”

기록에는 송이 고려에 거란 협공을 제안하며 “좋은 때는 두 번 오지 않으니 왕이 도모하라”고 설득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고려는 즉답하지 않는다. 망설이며 시간을 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고려가 결단을 상품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송과 손잡으면? 거란이 ‘배후 안정’을 명분으로 압록강을 넘는다

거란과 손잡으면? 송이 교역·문물·관계로 조여온다


그래서 고려는 ‘올인’ 대신, 양쪽 모두가 고려를 의식하게 만드는 위치를 유지한다


한마디로: 간을 본다.


이 “간보기”는 약소국이 할 수 있는 최고급 외교다.

좀 고급(?)지게 말하면, 세력의 균형추와 같은 역할을 했다.




2) 고려 사신을 보고 송 조정이 속이 터진 이유 : 고려금수론


고려는 자신들이 송나라에 필요한 존재라는걸 너무 잘알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알 길은 없지만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면 소위 ‘깽판’을 하도 쳐서

송나라가 매우매우 부담스러워했다.


송의 대문호 소동파가 고려 사신 접대를 두고 “접대 비용이 10만 관이 넘는다”는 식으로 부담을 지적하며,

고려와의 교류가 낳는 해악을 조목조목 비판한 상소가 전해진다.


심지어 사신의 행태가 거칠었다는 묘사도 있다. 이른바 ‘고려금수(禽獸)론’

(지어낸거 아님. 진짜임. 대만영화에는 고려 태자가 송나라 지방관들 싸대기 올려치는 장면도 있음.)


약소국 주제에 이렇게 굴었는데, 강대국이 그걸 참고만 있었다.
왜냐면 고려가 돌아서면 송의 북방 전략이 흔들린다.


다시 말해 고려는 약소국이 아니라,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외교의 공간’이고 ‘균형자’다.


고려는 송과 요를 군사적으로 이길 나라는 아니었다.
하지만 고려가 어느 쪽에 붙느냐에 따라, 송도 요도 골치 아픈 구조였다.
고려는 그걸 너무 잘 알았고, 너무 잘 이용했다.



1장 결론

약소국의 힘은 병력 수가 아니라 위치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위치를 실리로 바꾸는 것이 ‘정세를 읽는 눈’이다.




2장|서희: “예(禮)로 판을 깔고, 실리로 거둬온다” (993, 거란 1차 침입)


993년, 거란의 소손녕이 요의 기병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는다.

기록은 그 위세를 ‘80만’ 같은 숫자로 표현하기도 한다.
숫자가 정확히 얼마였냐는 논쟁거리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공포의 연출이다.

“우리가 이 정도다. 너희는 결단해라.”


조정은 흔들린다. “땅 떼주고 막자”는 할지론이 고개를 든다.
그때 서희가 조정 대신들에게 일갈한다.


“니들 미쳤냐?”


서희는 직접 가서 해결하고 오겠다고 말한뒤 거란 진영으로 출발한다.




1) 서희의 첫 번째 기술: 기선제압(의전 싸움)

외교는 보통 세 단계로 굴러간다.

의전(서열)을 잡고

프레임(정당성)을 뒤집고

교환(실리)을 완성한다

소손녕이 말한다. “나는 대조의 귀인이니 뜰에서 절해라.”
서희는 거부한다. “니가 군주도 아니고 내가 신하도 아닌데 왜?”


결론이 안 나자 서희는 돌아가 관사에 드러눕는다.

(돌아가서는 전전긍긍했다는 야사도 있지만, 어쨌든 강심장이다. 저 상황에서 잘못하면 죽는다.)


소손녕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결국 마루로 올라 예를 갖추는 방식을 허락한다.


그리고 동과 서로 앉아 맞절한다.

왜 ‘동과 서’냐?


한쪽이 북쪽에 앉으면 당시 세계관에서 윗사람 포지션이 되니까.
동등하다는 의미로 동과 서로 앉는 거다.


그렇다면 이 장면이 왜 명장면이냐?
외교는 말싸움 이전에 급(級)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뜰에서 절하는 순간, 협상은 이미 “위아래의 프레임”으로 시작해야 하니까.




2) 서희의 두 번째 기술: 상대의 욕구를 정확히 찌른다

소손녕은 명분을 던진다.

“너희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것인데 침범했다.”

“바다를 넘어 송을 섬기니, 오늘 출병했다. 땅 떼어 바치고 조빙하면 무사하다.”

서희의 답은 감정이 아니라 ‘구조’다.


서희는 질문을 바꾼다.

“저들이 진짜 원하는 건 뭔가?”

거란이 원하는 건 “땅”이 아니라

송-고려 연계 차단(명분)

배후 안전(실익)

거란은 점령하러 온 게 아니라, 후방 안전과 세계질서 속에서 상국으로 인정받는 걸 원했다.


그래서 서희는 이렇게 교환한다.

“우리 국호가 고려인데? 고구려의 후예는 우리지(프레임 전환).”

(지금은 구분을 위해 고구려라고 하지만 실제 고구려는 고려라는 국호을 썼고, 고려도 그 국호를 그대로 쓴거다. 국호가 같다는 소리)


“근데 우리도 너네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여진이 길을 막아서 못 간 거다(명분 제공).”

“그 길(강동 6주) 우리가 관리하게 해주면, 너네랑 잘 지낼게(실리 회수).”

그래서 서희는 명분(관계 정리)을 주고, 대신 고려는 강동 6주라는 실리를 얻는다.
강동 6주는 이후 서북방 전진기지가 되고 압록강 하류 일대 확보의 기반이 된다.


외교는 “주고받기”다.
문제는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을지 그걸 결정하는 게 정세를 읽는 눈이다.

소배압은 가서 혼났을까 칭찬받았을까?

칭찬받았다.

이것이 바로 윈-윈.

…여기까지 보면 사람들이 말한다.

“그렇게 외교를 잘했는데 왜 또 쳐들어오냐?”


이 질문이 다음 장이다.





3장|2차 침입: 외교로 빌미를 해결 못 한 이유 : 정세는 ‘명분’이 아니라 ‘기회’를 먹는다 (1009~1010)

1010년 2차 침입은 고려 내부의 ‘강조의 정변’이 결정적 계기였다. 목종이 시해되고 현종이 옹립된다.

여기서 반박이 나온다.

“정변 하나로 전쟁이 나냐? 거란이 원래 치고 싶어서 빌미만 보고 있었던 거 아니냐?”

맞다. 그리고 그게 핵심이다.


그리고, 외교를 아무리 잘해도 국내 정치적인 상황이 어려워지면

외교에 대응할 능력이 약해지는것도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아무튼, 다시 돌아가서.


국제정세에서 “명분”은 보통 핑계고, 기회가 진짜다.

왜 외교로 그 빌미를 지우기 어려웠던걸까?

우선 정통성(신용)이 박살났다.

목종은 거란에게 정식 ‘책봉’을 받은 왕이었다.
거란이 송을 치기 전에 후방 안전을 도모해야 하는 타이밍에, 자기가 책봉한 왕이 허가 없이 시해되고 새 왕이 세워졌다?


이건 단순 내정이 아니라, 거란 입장에선 관계의 계약서가 찢어진 사건이다.

거란이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통제”였다.


정변 이후 거란은 “반역자를 처단한다”는 명분을 들고 내려오는데, 그 명분의 속살은 뻔하다.
‘질서 회복’이 아니라 ‘질서 확정’.
즉, 고려를 더 깊게 묶을 기회다.

(조공-책봉관계로만 후방안정을 도모하다가, 잠시 숨돌릴 틈이 생겼고, 이 틈에 무력으로 후방을 강제로 정리하려던 것.)


약소국의 혼란은 강대국에겐 ‘시간표’다
강대국은 약소국이 흔들릴 때 친절해지지 않는다. 빨라진다.


“지금 치면 싸게 친다.”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계산이다.


그래서 2차 침입은 이렇게 정리된다.

외교가 못해서 전쟁이 난 게 아니라,
전쟁이 싸게 보이는 순간이 와서 전쟁이 난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거란은 후방을 안정시켜야 했는데, 이전에 비해 좀 더 확실한 안정을 필요로했고

그건 정벌을 통한 안정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책봉한 왕이 말도없이 폐위되었다는건

자신들에게 반기를 들 가능성이 높아졌다는걸 의미한다.


어차피 정리하러 가야되는데 명분까지 주어진거다.

국외적으로 겨우 안정되어있더라도,

국내적인 문제가 생기면 강대국에 의해 역사의 소용돌이로 멱살잡혀 끌려가는 것.


이건 약소국의 운명이다.


외교는 이런 순간을 영원히 막지는 못한다. 다만 그 이후를 관리한다.




4장|3차 침입: 왜 또 못 막았나 — 외교 ‘공백’이 아니라, 딜이 성립 불가능한 8년이 누적된 것이다 (1010~1018)


그런데 2차침입을 막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3차 침입이 다시 시작된다.

그럼 외교를 못해서 그런거네~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3차 침입은 “2차 이후 외교를 못 했다”의 결과가 아니라,
2차 이후 ‘딜이 성립 불가능한 상태(준전쟁)’가 누적되어 1018년에 폭발한 결과다.

조금 더 살을 붙여 말하자면, 거란은 무력을 통해 고려를 정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아직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 강력한 국방력이 필요하다.)

2차 침입 이후 거란이 원하는 후방 안정은 “좋게 지내자”가 아니었다.
거란이 원하는 안정은 상하관계 확정이었다. 그걸 상징하는 요구가 있다.

국왕 친조(親朝): “직접 와서 머리 박고 관계를 확정해라”

그리고 강동 6주 반환 요구: “서희가 빼간 그 완충지, 다시 토해내라”

이 두 개는 고려가 “외교로 잘 맞춰주면” 줄 수 있는 카드가 아니었다.


주면 끝이 없다. 이건 실리의 문제였으니까. 고려는 어쨌든 실리를 얻어내는 외교를 하는 국가였지

비굴하게 전쟁만을 피하기위한 외교를 하는 국가가 아니었다.

그게 3차침입의 빌미가 된거다.


그리고 특히, 강동 6주를 내놓는 순간, 1차 담판의 성과(완충지·전진기지)를 스스로 해체한다.

그래서 1010 이후의 시간은 평화가 아니다.
협상 결렬 상태의 충돌이 이어지는 기간이다. 국지전이 반복되고, 거란은 계속 ‘확정’을 요구한다.


거란 입장에서 “후방 안정”은 약속 한 줄이 아니다.

특히 황제가 직접 왔다가 고려에게 결정타를 맞지않고 돌아간 뒤라서 그랬을까?

계속해서 고려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더 노골적인 복속 확인을 요구했던 것.


즉, 거란의 목표가 ‘후방 안정’이어도 방식은 “친구 사이 안정”이 아니라 “굴복을 통한 안정”이었던 거다.


게다가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는 모습은 거란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거란 눈에는 “말로는 정리한다 해놓고 다시 송 쪽으로 기우는 나라”로 보였을 거다.

사신도 계속 주고받고, 문물도 계속 들여오고 했으니까.


그게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렇게 보이면 충분히 위험해진다.

외교는 ‘진심’만이 아니라 ‘해석’까지 먹고 산다.

그래서 1018년, 거란은 “이번엔 크게 한 번 눌러서 확정”하려고 3차 침입을 감행한다.



3차 침입(1018~1019): 국방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평소에 국방을 위한 준비를 하는 이유는, 아까도 설명했지만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한 방편이다.

"날 죽이려면 넌 팔다리정돈 잘려야돼" 라는 메세지를 주면

섣불리 전쟁을 일으키기 힘들어진다.


상대가 이 신호를 읽지 못하고 전쟁을 일으켰을때는

진짜로 팔다리를 잘라버려야한다.




고려가 3차전쟁에서 한 일은 “외교로 막기”가 아닌

요나라의 팔다리를 잘라버리는 일이었다.


이 전쟁 이후엔 두 번다시 고려를 상대로 전쟁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
여기서 중요한 건 “이겼다”가 아니다.
이 승리 이후 거란은 끈질기게 요구하던 친조와 강동 6주 반환 요구를 더 이상 못 꺼내게 된다.

이게 바로 고려 외교의 완성이다.


고려가 3차를 ‘못 막은’ 게 아니라,
3차가 마지막이 되게 만든 것이다.
약소국 외교의 성적표는 “전쟁이 없었다”가 아니라
전쟁이 더 이상 싸지 않게 만든 순간이다.


고려는 이 전쟁 이후 100여년의 평화와 태평성대 시기를 맞이한다.



5장|금(여진): 외교를 잘했다면서 왜 또 맞는거야?


거란이 잠잠해지면 끝일까? 아니다. 판은 또 바뀐다.
여진이 성장하면서 동북면이 흔들리고, 침입도 실제로 늘어난다.


이야기에 앞서

대(對)여진 외교에서 이전과 달라진점을 기본으로 깔고 가야한다.


이 시기 고려는 내부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이자겸이 정권을 잡은 뒤 고려를 입맛대로 쥐고 흔드는 시기였다.

이들에게 있어 전쟁이란 권력을 잃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이 시기 고려의(or 이자겸)선택이 베스트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여진이 원하는것이 과거 거란에 비해 한정적이었다.

칭신사대정도 하면,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고 평화와 국체를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한 고려는

그 길을 간다.


여기까지가 고려의 외교가 이전과 달라진 지점이자 여진과의 스토리를 이해하는 기본 베이스다.



1) 별무반·윤관·동북 9성: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유지”가 더 어렵다

고려는 별무반을 편성하고 윤관을 중심으로 여진 정벌에 나선다. 그리고 동북 9성을 쌓는다.
그런데 문제는 전투가 아니라 유지였다.

멀고, 보급이 어렵고, 인력과 비용이 터진다. 여진은 계속 압박한다.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고려는 결국 9성을 돌려준다.

여진족이 중간에서 거란과 고려의 충격흡수재 역할을 할거라고 생각했던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것은

거란이 요구했던 것은 서경이북이다.

고려 방어의 가장 핵심이며 이것을 내주면 개경까지는 '이럇샤이마세'다.


반면, 여진에게 돌려준 9성은 고려가 개척한 신개척지였다.

당장 돌려준다고 해서 고려의 방어에 엄청나게 위협적인것은 아니었다.


거란은 '내 팔'을 잘라가길 원했지만

여진은 내가 어제 산 '물건'을 가져가길 원했던 거다.



그럼 이게 굴욕이냐?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약소국의 현실이다.


전쟁은 “이겼다”로 끝나지 않으니까.

물건을 팔때마다 손해가 누적된다면 팔지 않는게 장사의 근본이치다.

동북9성은 물건을 팔때마다 손해가 누적되는 마이너스 상품이었다.



이 모습이 거란(요)을 대하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만

이것 또한 고려가 취한 외교술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2) 금 등장: 사대를 받아들이는 결단(그리고 이자겸)


여진은 금을 세우고, 요를 멸망시키고, 송까지 반쪽 낸다.

체급이 바뀌었다.


고려에서는 이자겸이 정권을 잡고 권력자가 된다.


금은 고려에게 요구한다.

“이제 우리가 형님이다. 칭신사대 하라.”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 “송과 연합해서 치자.”


전 국민 자존심이 들끓는다.

(어제까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하더니 이제와서 군신관계를 맺자고?)


그때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에서 ‘간신’으로 기록된 이자겸 현실론을 꺼낸다.

(동북9성 내줄때는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윤관을 그렇게 까더니 이제와서..)


“금의 기세는 요와 송을 삼킬 정도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겨서라도 백성을 전쟁터로 내몰지 않는 게 보국이다.”

결국 고려는 사대를 수용한다.

(뭐 송나라에도하고 요나라에도 했는데 금이라고 못할까?)

비겁해 보였을까? 하지만 금과 싸운 다른나라의 결과는 잔인하다.

자존심 세우며 금을 얕본 송은 황제가 끌려가고 나라가 반쪽 난다(정강의 변).


반면 고려는 무릎을 굽혀 전쟁을 피하고, 체력을 남겨 문화를 키울 시간을 번다.

이 장면을 고려 외교의 성공이라며 미화할 필요는 없을것같다.

다만, 고려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변명은 있다.

거란이 요나라를 세워 고려를 위협하던 시기에는

송이 그래도 버티고있던 시기였다.

고려가 송의 손을 잡으면 거란이 실제로 위험해지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여진의 금나라는 달랐다.

송나라는 남쪽으로 쫓겨갔고 고려가 송의 손을 잡는다고 해도

거란의 요나라 시절처럼 확실한 균형추의 역할을 할수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거기에 거란은 계속해서 고려 방어의 핵심적인 지역을 내놓으라며 협박했지만(그래서 전쟁도 났고)


여진은 거란을 보며 학습을 해서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저 칭신사대하기만 하면, 자신들의 배후를 위협하지만 않는다면 그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았다.


여진이 과거에는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부르다가, 강성해지고 금을 세우자

이제 '너희들 내 신하가 되라'고 나오니 고려의 자존심이 더 상했을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자존심 내려놓고 원하는대로 해주면 전쟁도 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이자겸은 정권도 지킬 수 있는 '싸게 먹히는' 장사였던 것이다.


이렇게 외교의 진짜 얼굴은 원래 깔끔하지 않다.


진짜 용기는 칼을 드는 것만이 아니다.
욕을 먹더라도 전쟁을 막는 결단(?)도 외교다.


(싸웠어도 괜찮았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건 결과론이다.)


자기가 살기위한 간신의 외교가 역설적으로 고려를 살렸다.



6장|원(元)이라는 ‘초월적 강자’ 앞에서: 굴복이 아니라 “호랑이 등에 올라타기”

13세기 몽골은 차원이 다르다. 강대국이 아니라 세계제국이다.
칭기즈칸의 말발굽이 닿는 곳마다 다리가 달린 모든 것이 죽고 사라질 때, 고려는 30년을 버틴다.

하지만 제국은 더 강해지고, 고려는 판단한다.


전쟁을 계속하는 것보다, 국가의 장기 생존 관점에서 전쟁을 끝내는 게 낫다.
(무신정권을 무너뜨리려는 고려 고종의 큰 그림도 있었지만, 핵심 줄기는 생존 판단이다.)


다만, 전쟁을 어떻게 끝내느냐 하는건 이후 형세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고려 왕 고종은 태자(훗날 원종)를 보낸다.
메시지는 이거다.


“나 항복할게. 우리 나라 멸망시키지 마.”

(유라시아 대륙에는 이미 멸망당한 나라가 수십개인 상황)



1) 원종(태자)의 선택: 쿠빌라이를 만나다 : ‘정답 맞히기’가 아니라 ‘문이 열릴 때 들어가기’

원종은 태자로서 몽골로 가던 중, 몽케 칸 사망과 함께 쿠빌라이-아릭부케 내전이라는 격변을 맞는다.
그 혼란 속에서 태자는 국운을 걸고 도박을 한다.

중요한 건, 쿠빌라이가 표면적으로는 약세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도박’이다.

하지만 고려는 아무 정보 없이 찍은 게 아니라, 나름의 정보망과 판단을 통해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쿠빌라이는 이걸 이용했다.

“30년을 버틴 고려가 내게 왔다 = 하늘이 나를 택했다.”

쿠빌라이는 이 사건을 정통성/천명 PR로 써먹고, 고려는 그 틈에서 ‘살 길’을 만든다.

그리고 쿠빌라이는 황제가 됐다.

약소국의 외교는 “정답”이 아니라, 순간의 선택이 역사를 바꾼다.


정세를 읽는 눈이 없으면 그 순간은 운으로 지나가고,
정세를 읽는 눈이 있으면 그 순간은 출구가 된다.


그리고 이 선택은 단순 면담이 아니라 패키지로 이어진다.


원나라가 세계에서 어떤 위치인지 보고 항복을 결정한 것

원나라는 항복하면 일단 살려주는 경향이 있다는 계산(하지만 다음 전투에서 최전선에 세우는 건 함정)

쿠빌라이 내전에서 누가 이길지 판단하기 위한 정보전

그걸 바탕으로 “과감한 선택”을 한 것


즉, 고려는 계속 정세에 안테나를 세우고 있었다.

그 안테나가 고려의 미래를 결정했다.





2) 불개토풍(不改土風): 굴복 속에서도 국체를 남기는 장치

원 간섭기 고려는 분명 약해졌다.

하지만 “몽골식으로 완전 동화”되어 지도에서 지워지진 않았다.


왜 그랬냐고?

쿠빌라이는 고려 태자의 귀부를 명분으로 크게 써먹었고,

그 덕에 고려에게 “항복의 값”을 어느 정도 쳐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고려는 원이 복속국에 강요하던 풍속 개조를 일정 부분 피하는 특권을 얻는다.

일명 불개토풍.

전쟁에 지는 나라가 풍속을 지킨다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건 국체 유지의 최소 조건이다.
나라가 살아남는 건 나라 모양이 남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는 원나라 황실과의 결혼도 요구한다.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가, 승리한 나라에게 결혼을 요구한 셈이다(쿠빌라이에게 약속받았었음).


한반도 역사상 중원을 장악한 국가와 전쟁 직후 사돈이 되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것도 패배한 나라가 승리한 나라에게,
“세계 패권국” 원나라에게.

쿠빌라이가 처음엔 약속해놓고도 신하 반대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는 장면이 있는 것도,

이 요구가 “원 제국내 정상적 서열”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딜이라는 방증이다.

부마국이 되면, 솔직히 이득은 고려가 더 보니까.

2.5) 고려풍이 원나라에서 유행했다(K-컬쳐 원조)

재밌는 부분은 한류가 세계에서 유행하듯이 고려풍이 원에서 유행했다는 점이다.

원 간섭기엔 고려가 원풍을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원나라에서 고려풍이 유행했다.


전쟁에 패배하고 항복했는데, 나라 모양은 보존했고, ‘불개토풍’으로 내부 체제도 어느 정도 남겼는데,

심지어 고려 것이 원에서 고급으로 소비된다?


이것이 외교의 또 다른 얼굴이다.
군사력으로 못 이기면, 문화적 매력이 ‘의외의 안전장치’로 작동하기도 한다.

세계의 다른 나라들은 다 망했는데, 고려는 국체도 보존하고 문화를 수출해서 원나라에 고려풍을 유행시켜 버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문화승리인가?)



3) 부마국: 백년손님이 아니라 ‘사외이사’다

고려와 사돈 맺는 걸 원 내부에서는 탐탁지 않게 봤다. 내부 반대가 너무 극심했다.
특히 몽골에게 “사위”는 단순 백년손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의 요리에서 조금 과식하게 될 수도 있지만 TMI를 좀 풀어보자면


고려왕실과 원 황실이 사돈을 맺을 때 충렬왕 부인이 제국대장공주였다.

제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의 막내딸이다.

몽골의 황족은 황금씨족이라고해서 자기들끼리 결혼을 하는 부족이 정해져있었다.

(약간 고구려랑 유사하다. 계루부에서 왕이나오고 절노부에서 왕비가 나왔듯이)


몽골 내에서도 칭기즈칸과 특별하게 ‘의리’로 묶인 가문들과 통혼을 했지

외부하고는 절대 통혼하지 않았는데

이런 황금씨족 딸을 고려왕하고 혼인을 시킨거다.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한 후 원나라에서 조문을 와 제문을 썼는데

“황제에게 자식이 수도 없이 많지만 그래도 막내딸은 특별히 귀여운 법이다.

이 딸을 고려 왕과 결혼시켰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이 이후 고려가 계속 몽골황실과 결혼하기는 했지만

황금씨족과는 결혼하지는 못했다.

쿠빌라이가 고려를 어떻게 봤는지, 고려의 외교가 당시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추가하자면

몽골 사회에서 사위는 처갓집의 대소사 결정에도 참여한다.

즉, 사위는 백년손님이 아니라 사외이사에 가깝다.

(아까 무릎꿇고 있던 애가 왜 여기 임원이 되어있지?)

고려는 ‘정복지’이면서도 동시에 황실 혼인 관계(부마국)라는 특수 지위를 확보한다.

몽골 세계에서 황실 사위(구레겐, guregen)라는 지위는 단순 친척 놀이가 아니라,
권력·군사·정치 네트워크에 연결되는 표식이다.

그리고 그 대소사를 결정하는 무대인 쿠릴타이에서 그 표식(구레겐, 부마국)의 진짜 진가가 드러난다.

(너네 황제, 패배자인 내가 만든다!)




4) 쿠릴타이: “제국의 정치”에 발을 담그는 상상력

쿠릴타이는 대칸 선출과 중대 사안을 논하는 제국의 최고급 의결 무대다.
고려가 부마국 지위로 얻은 건 “체면”만이 아니다.
제국의 질서 속에서 스스로를 ‘완전 피정복국’으로만 고정시키지 않는 여지였다.


그리고 이 여지는 충선왕 때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충선왕은 원에서 황실 정치에 공을 세우고, 심양왕(심왕)으로 분봉되어

제국 서열표에서 고려 국왕보다 높은 존재가 된다.

(원의 전성기를 이끈 쿠빌라이의 외손자가 충선왕이니까, 대충 감이 오시나?)


지도에서 지워질 뻔한 나라가, 제국의 서열표 안에서 윗줄에 이름을 올려버린다.


유사하지는 않지만,

영국이 인도를 지배했는데 오늘날 영국 총리에 인도계가 올라간 느낌?

(물론 같은 건 아니지만, “정복-피정복 관계가 시간이 지나며 권력구조 안에서 비틀리는 장면”의 감각은 비슷하다.)



여기서의 결론

고려는 호랑이에게 먹히지 않으려고 울부짖지 않았다.
호랑이의 규칙을 읽고, 등에 올라탈 자리를 계산했다.
굴복이 아니라 ‘생존 설계’였다.



에필로그|21세기, 고려에게서 배워야 할 단 하나


고려는 늘 정의롭지 않았다. 늘 멋있지도 않았다.

항상 최고의 선택만 했던것도 아니다.


하지만 늘 계산은 있었다.


정세를 읽어야한다: 판이 어디로 기우는지, 누가 지금 강자인지


상대의 욕구를 읽어야 한다: 거란이 땅이 아니라 ‘배후 안전’을 원한다는 것


내부를 지켜야 한다: 내부가 무너지면 외교도 무너진다


형식을 활용했다: 조공-책봉 같은 프로토콜은 굴욕이 아니라 ‘통로’였다


필요하면 무릎도 꿇었다: 싸움이 아니라 “국체 유지”가 목표였을 때


그래서 결론은 하나다.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는 길은 “센 척”이 아니라,

국제 정세를 항상 주시하고 읽는 눈으로

상대가 원하는 것을 내어주고, 내가 원하는 생존과 번영을 챙겨오는 것이다.



외교에도, 역사에도 정답은 없다.

지나고 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와 끼워맞추기식 논리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1000년이 지난 지금,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서

약소국으로 살아가는 대한민국에게

우리의 조상 고려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살아남는 방식을 가장 영리하게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야매쉐프가 알려주는 국제정세 스파게티 : 고려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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