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혁명가의 절규

순응과 반항

by 김승규

이 글은 분노의 글이다. 철없는 혁명가의 미성숙한 절규다.

나에겐 콤플렉스가 여럿 있다. 그중 나를 심하게 괴롭히는 것은, “아직은 어린 나이”이다. 어딜 가나 나는 막내다. 가족에서도 막내다. 모임에서도 막내다. 근무지에서도 막내다. 빠른 년생이기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막내에 위치하고 있다.

젊음이 좋다고 배웠다. 당최 모르겠다. 늙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젊음을 예찬하는 것은 기만일 것이다. 늙음을 경험했을 때야만이 비로소, 젊음을 진심으로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현재의 나에게 있어서 젊음이란, 높은 가치가 되어주지 못하다.

저번 주 독서 모임에서 있던 일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그 나이 때에는 그럴 수 있지” 혹은, “저도 그 나이일 땐 그랬어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러한 문장들이 나를 미치게 한다.

사회적 관습, 사회적 언어를 따르는 것이 싫다고 말했다. “때로는 순응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거리감이 있어야 욕망의 대상이 된다라고 말했다. “그 나이 땐 저도 그랬어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들은 나를 가르친다. 성숙하지 못한 나의 생각을, 기꺼이 선생님이 되어주어서 나에게 설교를 해준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들의 설교가 탁월했다면 말이다.

이러한 경험은 정말로 많았다. 무슨 말을 해도, 젊은 시절에만 뱉을 수 있는 그 무언가의 문장 따위의 취급. 다들 이러한 시기를 겪었다는 경험담. 그들 지적엔 이러한 뜻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너의 생각은 미성숙한 생각이다. 경험을 더 하다 보면, 좀 더 성숙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가 그것이다. 미성숙한 내가 오답이고, 성숙한 저들이 정답이다. 이게 아니고서야 어찌 나에게 설교를 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저들이 뱉는 문장들은 나에게 충격을 주지 못했다. 저들이 뱉는 말들은 이미 내 머릿속에 들어있던 문장들이었다. 다시 말해, 저들이 하는 생각은 이미 내가 지나쳐온 길이다. 나는 그러한 개념들에 회의를 품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중이다. 때문에 저들의 설교는 나에겐 가당치도 않다.

성숙한 소크라테스들의 설교는 나 역시 긍정할 수 있다. 그들의 문장은 나에게 충격을 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저들이 소크라테스인가? 결코 아니다. 내 눈엔 자동응답기계이자, 습관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노예들이다. 회의를 해본 적이 없으며, 성숙함의 가치에 물음조차 던져보지 못한 자들이다. 이러한 경험을 다 했더라면, 나에게 저따위의 설교를 뱉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저주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나의 사고를 이루는 근간은 “회의주의”이다. 때문에, 저들이 가볍게 던진 말에 나는, 스스로 미칠듯한 회의를 품게 된다. 나는 저들의 지적이 가당찮은 것을 안다. 그러나 의심이 생긴다. “정말로 어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 문장이 나를 괴롭힌다. 나는 이 문장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것은 사고를 통해 증명할 수도 없다. 시간만이 이를 명증 하게 해결해 줄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분노도, 내가 어리숙한 생각을 지녔기 때문에 느껴지는 분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나는 나의 생각에 자신이 더욱 없어지게 되고,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저주스러운 일이다. “아직은 어린 나이”를 싫어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답을 내릴 수가 없다. “어린 나이”
를 지녔기 때문이다.

30대가 됐다. 드디어 나 자신에 어느 정도 확신을 갖게 됐다. 자신 있고 조리 있게, 내 생각들을 양껏 펼친다. 그러나 저들 40대가 지적한다. “역시 젊음이 좋구먼,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너도 나이 먹으면 달라질 거야. 때로는 순응할 줄 알아야 해. 그것이 어른이라는 거야.”

“아직은 어린 나이”를 졸업할 수 있을 순간은 언제일까? 가늠도 안 된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모르겠다. “저들이 반드시 틀렸고, 내가 반드시 맞는다” 수준의 확신을 가져야만이, 나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회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일 텐데, 아직은 공부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느껴진다. 부조리하다. 그래도 부조리함 덕분에 살아간다.

나는 저주스러운 명철한 의식을 지닌 혁명가이다. 나는 사회 체제의 참을 수 없는 부조리함을 느낀다. 때문에 나는 체제의 문제점을 고발한다. 그러나 저들 프롤레타리안들은 도무지 듣지를 않는다. 오히려 나의 주장을 미성숙함으로 재단해 버린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어. 때로는 맞춰 살아가야 하는 법이야. 그게 어른인 거야.”

저들 노예들의 핑곗거리는 한치 예상을 빗나가질 않는다. 참신한 변명을 냈더라면, 적어도 나는 납득할 여지를 남겨뒀을 것이다. 저들에겐 남아있는 불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짧디 짧은 심지가, 그마저도 다 타버려서, 더 이상 태울 수 있는 열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습관처럼 살아가며, 습관이 깨지기를 두려워한다. 때문에 혁명마저 두려워하는 것이다. 때문에 순응이, 저들의 종교가 된 것이다.

나에겐 정열이 있다. 아직은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다. 나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잔혹하게 느낀다. 저들은 순응함으로써, 부조리에서 도망친다. 나는 반항함으로써, 부조리를 끌어안는다. 부조리는 나의 동력이다. 이것만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때문에 순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끝까지 부조리를 떠안을 것이다.

나의 정열이 전부 태워질 날이 나는 두렵다.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저들 노예와 다를 것 없는 얼굴을 하고, 다를 것 없는 말과 행동을 하며, 습관처럼 살아갈 것이다. 내 젊은 시절에 했던 혁명을 떠올리면서, “그땐 철이 없었지..” 따위의 입에 담기도 싫은 말을 뱉으면서.. 너무나 두렵다. 이 정열이 죽을 때까지 남아있었으면 한다.

결국 나 역시 노예가 되어버렸다. 하루하루 사회에 순응하며, 체제에 의심을 품지도 못하며, 그렇게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내 앞에 젊은 혁명가가 나타난다. 그는 사회 체제의 문제점을 고발한다. 마치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조소를 보낸다. 다들 그의 어리숙한 모습을 지적한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어, 그런데 때로는 순응해야 할 순간도 필요해. 그게 어른이라는 거야.”라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떠올린다. 젊은 시절, 내가 느꼈던 부조리한 감정이 느껴진다. 나는 결코 저따위의 문장을 입에 담을 수가 없다. 나는 명철한 의식을 가진 혁명가였다. 내 앞에, 내 과거의 분신이 존재한다. 아니, 그는 나와 다르다. 나와는 달라야만 한다. 나는 실패한 혁명가다. 때문에 그의 성공을 간절히 원한다. 나는 그를 응원한다. 그의 불꽃이 찬란하게 타오르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반항이다. 늙어버린 혁명가의 마지막 발악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끝까지 노예이길 거부한다. 나는 끝까지 빅브라더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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