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만적 현실주의자

"세상은 재능이다"

by 김승규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자기 계발이라는 키워드가 꽤나 유행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 역시 그러한 기조를 탔다. 자기 계발 서적을 많이 읽었고, 자기 계발 모임에도 여럿 참여했다. 나름 열심히 살았던 걸로 기억한다. 젊은 날의 부는 진리였고, 끊임없는 노력만이 성공의 근거가 되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낙천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닐 수 없다.

그에 대한 반동일까? 요새는 냉정한 현실주의자들이 많이 보인다. 유튜브만 보더라도, 노력을 장려하는 영상 댓글에 항상 보이는 부류들이 있다. “세상은 재능이고, 노력도 재능이다”라 외치는 부류가 그것이다. 그들은 냉혹한 현실을 잔인할 정도로 파헤친다. “세상은 재능으로 돌아가고, 재능이 부재한 노력은 무용한 정열일 뿐이다”라고 외친다. 더욱 암울한 것은, 그 노력마저 재능으로 굴러간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통찰은 너무나 잔혹하다. 그러나 현실적이다.

운명론, 혹은 결정론자들도 비슷한 기조를 풍긴다. 성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유전자를 타고났기 때문이다. 열등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열등한 유전자를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너무나 비관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진실된 현실처럼 보인다.

“세상은 재능이다”라는 말은, 최선을 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답을 해주지 않는 세상을 향한 절규다. 본인의 한계까지 밀어붙였지만, 그럼에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이상 속에서 살 수가 없다. 이상은 아무런 답을 내주지 않는다. 때문에 저들은 현실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꿀발린 속삭임이,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이상적인 웅변이, 더 이상 그들의 원동력이 될어줄 수 없다. 이제는 현실만을 바라보고, 그것만을 긍정한다. 아무리 잔혹할지라도, 그것만이 진실이다. 배반당한 이상주의자는 다시는 눈먼 이상과 함께할 수 없다.

“세상은 재능이다.” 이 통찰은 현실적이면서 잔인하다. 이러한 선언은, 그 속에 절망을 품고 있을 것이다. 재능의 부재를 느낀 자들에게 저 문장보다 냉혹할 수 있는 문장이 무엇이 있을까? 타고나지 못했다면 이룰 수 없다고 말해주는데 말이다. 따라서 이 선언은, 절망적이고 암울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하는, 씁쓸한 맛이 맴도는 선언일 수밖에 없다. 배반당한 이상주의자가 끝내 내놓은, 고통스러운 절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변종이 등장한다. 이 변종은 배반당한 이상주의자들에 기대어 본인을 정당화한다. 저들 배반당한 이상주의자들의 무용한 정열의 결과로 얻어낸 “세상은 재능이다”라는 명제에 그들은 기생한다. 배반당한 이상주의자들의 씁쓸한 선언에서 그들은 희열을 느낀다. 그들에게 이것은 씁쓸한 선언이 아닌 안도의 한숨이다. 즉, 이 선언은 그들이 바라본 냉혹한 현실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 현실이다.

이 변종은 무엇일까? 나는 기만적 현실주의자라고 부르겠다. 그들에게 이 명제는 쉼터이다. “재능의 부재”는 그들의 실패를 정당화해준다. 그들은 최선을 다 했다. 물론 노력의 재능마저 없기 때문에, 최선을 다 했다는 절대적인 양도 평균 이하일 것이다. 노력도 재능인데 어떡하나? 이것이 냉혹한 현실 아닌가? 세상은 재능 아닌가? 이러한 태도로 그들은 안도감을 느낀다.

그들은 선천적 기질만을 긍정한다. 자신의 재능의 부재를 외치면서, 자기 파괴적 언변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얼핏 들으면 그들은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것처럼만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교묘하게 합리화를 할 뿐이다. 선천적 기질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 구조의 부조리이며, 유전적 결함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세상을 향한 책임 전가를 시도한다. 기만적인 현실주의자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내 주위 친구만 봐도 있다. 학생일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서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군대에 들어가서 허송세월을 보냈다. 군적금마저 넣질 않았다(꾸준히 넣으면 2,000만 원 정도를 모을 수 있는데 말이다). 담배를 뻑뻑 피며 술을 즐긴다. 그러면서 대화할 때마다 사회 구조의 부조리와 재능의 부재를 논한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노력을 안 하는 사람은 없다.”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즉, 모두가 노력을 하는데, 각자가 타고난 기질만큼만 노력한다는 말이다. 노력의 재능이 넘치는 사람과 재능이 없는 사람, 그들에겐 차이가 없으며, 각자 본인의 한계만큼 노력했다는 말이다. 그 둘을 가르는 것은 단지 선천적 기질일 뿐이다.

노력도 재능이라며, 이것을 증명하는 논문도 있다며 기만적 현실주의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노력의 의지도 후천적으로 기를 수 있다는 논문이 있다는 것을 도외시한다. 논문의 권위에 기대면서, 그들을 부정하는 논문에는 눈길조차 보내질 않는다. 이 역시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들에겐 “세상은 재능”이어야만 한다. 그들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노력도 재능이라는 논문이 절대적이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야지만 그들의 열등함에 당위성이 생긴다. 그래야지만 책임을 전가할 수가 있다. “세상은 재능이다”라는 문장은 그들에겐 구원이며, 그들의 종교이자 진리다.

“세상은 재능이다”라는 말은, 진실로 씁쓸한 선언이 되어야만 한다. 진실된 노력으로 전력을 다 했으며, 본인의 불꽃을 전부 태운 사람만이 뱉을 수 있는 아름답고 처연한 선언이다. 절망감을 품고 뱉는 이 문장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이 문장을 더럽히는 기만적 현실주의자들을 나는 결코 긍정할 수가 없다. 본인의 열등함을 감추기 위해 쓰이는 이 문장은 그 권위를 잃어버린다. 빛이 바랜 다이아몬드다. 그들은 다이아몬드에 뭍은 얼룩 언저리일 뿐이다. 때문에 기만적 현실주의자들의 외침에 기울일 나의 관심은 결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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