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서 보낸 2026년 새해

무의미 위에 세운 인위적인 의미

by 김승규

2026년 시작은 봉은사에서 보냈다. 오랜만에 타종을 지켜봤고, 오랜만에 새해라는 관념적인 의미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기념일을 굳이 챙기진 않는다.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25년 12월 31일 11시 59분 59초와 26년은 단지 1초의 차이일 것이다. 고작 1초가 지난다고 무엇이 바뀌는가?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일 것이다. 바뀌는 것은 우리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숫자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1초에, 고작 숫자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며 축하를 보낸다. 이를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는가?

부모님 밑에서 자랄 땐 매년 챙겼다. 엄마는 이런 행사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당시엔 나도 즐겁게 보냈던 걸로 기억한다. 단지 이를 능동적으로 챙길 동기가 나에게 없었을 뿐이다. 독립한 뒤로 한 번도 챙긴 적이 없다. 5년 정도가 되었으려나? 5년간 무의미 속에서 새해를 맞았다.

이번에도 챙길 생각은 없었다. 당일 늦은 저녁때까지는 말이다. 늦은 시간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고, 봉은사에서 같이 타종을 보자는 권유가 왔다. 이런 제안은 예전의 나였으면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최근의 나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는 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동기가 생긴 것이다. 이젠 타종을 볼 이유가 생겼다. 봉은사로 향했다.

불경을 외는 스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교만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건물도 보였다. 여러 불상과 절을 드리는 곳,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지만 고요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성당에서 보냈다. 새해는 절에서 보낸다. 종교가 주는 경건함을 여럿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점이 좋아서 종교를 찾는 것이리라.

불상 앞에서 절을 드리라 하더라. 복을 비는 행위에 역시 나는 무의미함을 느낀다. 소원을 비는 것, 운명에의 장난처럼만 느껴진다. 그들의 유희에 놀아날 믿음은 나에겐 없다. 때문에 ‘복을 믿지는 않습니다. 단지 내년엔 제가 원하는 바를 위해 열심히 살겠습니다’ 따위의 나의 의지를 읊고 지나쳤다.

타종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이 무척 많았다. 나를 괴롭히는 환경이 아닐 수 없다. 날도 무척이나 추웠다. 그러나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어나는 열 덕분에 추위를 버틸 수 있었다. 인류애는 아직 나에겐 없다. 이때만큼은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엄마와 누나랑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한 해를 마무리하기 앞서, 다음 해 목표를 서로 공유했다. 엄마는 건강을, 누나는 결혼을, 나는 취업을. 각자 현실에 처한 문제점들을 읊으면서, 다음 해에 이룰 수 있도록 서로 격려를 했다. 이 과정에서 소박한 행복을 느끼기도 했다. 가족이 주는 안정감일까? 관계에서 오는 연대감일까? 이를 해체하며 분석하는 것은 역시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일 게다.

드디어 시간이 됐다. 슬슬 카운트 다운에 들어선 것이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목청껏 숫자를 셌다. 나 역시 함께했다. 마침내 종이 울렸고 새해가 밝았다. 그 속에서 나는 여전히 무의미함을 느낀다. 고작 1초, 고작 숫자 놀이. 그 무엇이 의미가 있는가?

새해가 밝음과 동시에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적어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불꽃놀이였다. 타종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고, 내레이션은 계속해서 새해를 축하하는 멘트를 읊었다. 불꽃놀이가 오랫동안 지속됐고, 많은 사람들의 감탄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불꽃놀이를 담기 위해 열심히 휴대폰을 들었다. 나는 단지 눈으로만 담았다. 점진적으로 잊힐 기억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귀한 기억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을 온전히 지켜보기만 했다.

무의미하다. 때문에 다들 열심히 의미를 만들어간다 느꼈다. 새해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내가 느낀 감상이다. 절에선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준비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것들을 즐기기 위해 모인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무의미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과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겐 어떠한 의미가 있었다. 나 역시 의미 속에서 이번 새해를 보냈다.

크리스마스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껏 성탄절을 딱히 챙기지 않았다. 이번엔 예외적으로 성당을 찾았고, 나름 즐기려 노력을 해봤다. 결과적으로 기억에 남을 성탄절을 보낼 수 있었다. 무의미하기 때문에 의미를 찾으려(혹은 만드려) 노력했다.

무의미함이 사실 판단일지라도, 그것이 가치 판단의 절대적인 영역까지 침범하지는 못했다. 무의미함을 자각하더라도, 기만 속에서 관념적인 가치를 챙기더라도, 의미의 삶이 절대적으로 무의미함보다 열등한 가치가 되지는 않았다.

이 글은 나의 통찰을 담기 위한 글이 아니다. “모든 것은 무의미하고, 때문에 의미는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 따위의 실존주의적 설교는 이젠 진부하다. 나는 단지 묘사하고 싶었다. 무의미를 자각하지만, 때로는 의미 속에서 지내는 것, 무언가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 또는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것. 무의미를 자각하는 순간 의미가 있다는 말은 기만이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기만적이어도, 인위적인 의미일지라도, 때로는 무의미의 삶을 대체할 수 있는 가치가 되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