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에 대한 사적인 회의

진실됨과 사회성, 관계의 이분법

by 김승규

대화할 때, 리액션이 좋은 사람들은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들과의 대화가 재밌다는 것을 구태여 증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약간의 큰 회의가 담겨있을 뿐이다.

리액션이 좋다는 것, 누군가에겐 선천적인 기질일지도 모른다. 내 생각을 표명하기 전에 이를 엄밀하게 나누는 것이 좋아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지적이 그들에게까지 향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내가 지적하는 대상은, 사회적 가면을 쓴 자들을 향하는 것이다.

그들과 대화하다 보면 그들은 나를 위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다지 재미가 없어도 내가 무안해지지 않도록 웃어준다. 나를 위한 근거 없는 긍정도, 나를 위한 질문도 적극적으로 해준다. 그들은 나를 위한 대화를 해준다. 그들은 완벽하다. 내가 그런 것들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만 뺀다면 말이다.

그들은 사회적 가면을 두껍게 착용했다. 두꺼운 가면을 지나는 목소리를 나는 느낀다. 목소리는 가식과 섞여 혼탁해졌다. 그들의 문장엔 진심이 결코 느껴지지 않는다. 가면은 웃고 있다. 그 속에서는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표정이 자명하게 보이는데, 내가 어떻게 이것을 긍정할 수 있겠는가?

세상엔 가식적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사람들은 이를 [사회성]이란 단어로 합리화를 할 것이다. 이러한 합리화를 통해 얻어낸 이 가치가 얼마나 뛰어난지, 나는 모르겠다. 이 가식적인 문장을 통해 기쁨을 얻는 존재들도, 나는 모르겠다. 그들은 진실을 보는 눈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눈을 지그시 감는 것일까?

잔잔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리액션이 좋은 사람들에 비해 사회성이 떨어질 것이다. 그들은 리액션에 능하지 못하다. 때문에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때문에 그들의 리액션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들은 리액션을 못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가면을 쓸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매사에 진심이다. 그들의 리액션엔 가식이란 없다. 그들의 값진 리액션은, 가식적인 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못한다. 그들에겐 진심만이 보인다. 가식적인 사람들이 결코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가식적인 사람은 반응에 집중한 나머지 감정에 소홀해진다. 잔잔한 사람은 끌어 오르는 감정에 반응이 저절로 따라온다. 이러한 반응만이 나를 열망케 한다. 나는 이러한 반응만을 좇으며, 이러한 반응만을 진심으로 평가한다.

나는 진심의 가치를 너무나 높게 평가한다. 감정에 기술이 담겨 있다면, 또 그것을 내가 포착하게 된다면, 씁쓸한 맛이 입 안을 맴돌게 된다. 기술적인 감정 표현에, 온갖 재료가 첨가된 표현 속에서, 순수함의 투명성을 나는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단전에서 끌어 오르는 이 순순한 투명성만이 나를 울린다.

이 글은 최근 참여한 모임을 통해 느낀 바로 적은 것이다. 같은 테이블에서 나와 함께한 인물들에게서 긁어온 특징들이다. 그들은 반응에 집중하느라 감정을 담지 못했다. 둔한 사람들은 속아 넘어갔겠지만, 나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이런 나와 같은 자리에 앉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들은 사회에서 환영받는 존재들이다. 나에게만은 아니다. 나는 자리에서 그들의 반응 하나하나를 해체하면서 그들을 부정했다. 그 결과 이 글이 쓰인 것이다. ㅋㅋ 참으로 음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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