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그곳으로.

판펜-002.

by 한운후



2024. 10. 28. Mon.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어딘가엔 소설을 쓰고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들은 결말에 다다를 때까지 성실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아무런 활자가 입력되지 않은 빈 페이지들을 '녹음이 짙은, 불확실로 점철된 정글'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또 그들은 목적지까지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과연 무엇에 의지하려고 할까?

소설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

소설은 내가 선택한 경로이고, 나는 거기에서 초목적을 잊지 않으려 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초목적이라는 것 덕에 애초부터 내가 쓰려 했던 이야기를 잊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이 걸 왜 하고 있는 거야?

일단 잡음을 다 거둬들이자.

그러면, 이 결정의 가장 원초적인 목적은 무엇이지?


오래 전, 연기 학원을 다녀본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막상 뚜렷한 목적이 없던 것 같다. 그저 그 공간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준비해온 지문을 읽을때 마치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포탈이 생겨나고, 다신 오지 않을 순간들이 펼쳐지는, 함께 있는 학생들과 선생 모두가 잠시나마 현실을 향한 방패를 내려놓고 서로에게 날것 그대로의 연약한 속살을 드러내는 시간.(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순간들이긴 하다.) 아마도 나는 그 때를 어른으로서 아이처럼 신나게 놀 수 있었던 유일한 기억으로 여긴다.

기억에 남는 역할 '놀이'들: 살인자/ 원치 않는 이별을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남자친구/ 형사/ 아들을 잃은 뉴스 진행자/ 여자와 첫 데이트를 하러 나간 신입생 etc.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그 때는 분명 재밌고, 비싸고, 땀으로 흥건할 수 밖에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가방은 무겁고, 주머니는 가벼운, 겁없는 소년이었다.


'연기'에 대한 나의 간결하고 야트막한 상식으로 이 글의 주제에 대해 논하자면, 초목적은 독백, 2인극은 물론 사람들의 앞에 나선 채 선보이는 모든 '가상의 상황'에서 빠질 수 없다. 물론 즉흥의 경우에, 틈새(기회)를 포착한 연기자가 감독조차 막을 수 없는 창의적인 자주권을 휘두를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조차 그들이 대사 이면에 갖고 있어야 할 태도는 '이 인물이 이 말을 내뱉는 이유'를 잊지 않는 것이다.


'액션'과 '컷'이라는 외침 사이에서 배우들은 자신들 고유의 색깔이 듬뿍 칠해진 연(Kite)을 높이 높이 날리는 것이다.

단,

줄이 끊이지지 않는 선에서만.


연극 배우 문00 선생님이 말했다:

대사 한 줄 속에 담긴 씨앗이 네 연기를 보고 있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 되도록 하라고,

그리고 저 단상에서 너희가 외투처럼 입을 캐릭터가 그 대사, 동작, 어조, 눈짓을 보이는 근본을 잊지 말라고,

또 준비한 극의 길이가 짧든 길든, 화려하든 단조롭든 언제나 역할이 끌고 나아갈 초목적을 잊지 말라고.




글을 쓸때,

특히나 그 것이 소설일 경우에 이어지는 사건이 맨 처음 구상 단계에서 점점 멀어지는 순간이 있다. '이렇게 가도 될까?', '얘가 실은 여기에서 왔구나.', '왠지 이 쪽으로 가야 조금 더 자연스럽겠는데?'같은 스토리 전개에 대한 현실적인 타협의 연속이 이뤄진다. 집필을 하는 데 막힘이 없고, 챕터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술술 짜여지는 한 페이지가 200, 300을 넘어가는 상황은 그리 나쁜 게 아니다. 되려, 강을 건너기 위해 돌다리들을 두들기던중, 가지각색 모양의 돌들을 관찰하는 재미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화점 안내 방송처럼 정해진 대사(모난 구석 없이 정석을 따른 기승전결)를 낭송하는 드라마 단역이 아닌, 오디션중 실수를 재빨리 기회(Serendipity)로 바꿔치는 배우 지망생의 정신이라 할 수 있을까?

(6~7번의 단역 오디션 모두 붙은 적이 없다. 그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그 걸 재밌는 도전이었다 치부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선은 반드시 존중해야 한다. 지켜야 할 선은 바로 울타리 이고, 집필의 과정에서 울타리는 창작자의 동기/Motif이다. 책의 표지부터 시작해, 맨 뒤 책날개로 향하는 연속적인 과정에 있어서 '즉흥'을 남발하는 게 아닌, 스스로의 양심을 납득시킬 최소한의 이유는 갖고 있어야 한다.

책의 맨 앞부터 맨 뒤까지 가는 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던 선택, 시작부터 끝을 전부 꿰뚫는 단 하나의 뾰족한 메세지. 그 걸 패트리 접시에 두고 삶의 렌즈로 확대시키고 싶다. 어쩌면,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은 사명(mission/ vocation)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살면서,

시작이 설레는 이유는 마음이 시킨 적도 없이 내가 걸어갈 경로의 달달한 면(가능성)만 윤색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린 주제와 상관 없는 경험으로 몸소 알고있다;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희망의 빛이 마음에 드리울때 당장의 일을 처리해버릴 수 있을듯 두 손아귀에 힘이 돌고, 시야도 단연 맑아진다. 마치 앞에 우뚝 솟은 산을 고생스럽게 우회 할지언정 굴을 뚫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역시 모두가 알다시피 예측의 욕망은 덜덜 떠는 마음을 아주 잠깐 가라앉힐 진정제일 뿐이고,

일어날 일들은 일어난다. 설사 그 일이 좋든, 나쁘든 우리는 때로 쓴물을 삼키며 그나마 합리적인 대안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도 성인으로서 어느정도 갖추고 있는 자세일테다.

그렇다면,

시작의 단계에서 생생하게 상상했던, 철저하게 준비했던 바로 그 상황이 펼쳐지지 않았다 하여, 고배를 드는 게 자연스러운 판단일까? 그럼에도 태초의 목적을 여전히 속에 품고 있을 수는 없는 걸까?

심술궂게, 또는 억지스럽게라도,

모든 벽(장애물, 의외의 사건)을 초월할 수 있는 아주 뾰족하고, 단단하기에 둘째 저리 가라하는 송곳같은 뭔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와 여정을 함께한다는 믿음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꼭, 한때 우리가 그러곤 했던,

용감한 아이처럼 말이다.




2020년 5월 17일 일요일 오후 7:16, [네이버 메모]

'그냥 마치 책을 위한 에스프레소처럼, 00쌤이 말했던 초목적처럼, 책의 맨 앞부터 맨 뒤까지 관통시키는 하나의 작은 씨앗으로 남겨두기.'


2020년 8월 26일 수요일 오전 11:22, [네이버 메모]

'굵직한 스토리(초목적) 줄기는 건드리지 않고, 그 각각의 사이를 연결할 때에 우연/Serendipity를 염두하기. 그 곳에 미리 구상해 두었던 등장 인물들을 던져놓은 채, "이런 친구는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라는 질문. 그리고, 그 땅에 뿌리내려 피어나게 하기.'


주머니 수첩 맨 앞 면지(창작에 있어서 스스로와 지킬 약속들)

출판의 꿈을 가진 사람이라면,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이 것 만큼은 나의 표현에 항상 녹아들어 있길 바라는 점들을 몇 가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규칙/ 노하우/ Tip들은 곳곳을 누비며 어느새 자석 표면의 철가루처럼 나만의 공간에 모여든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그런 것들이 매 순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피부에 타투를 새기는 건 싫은데, 항상 잊고싶지 않은 것들이 있을때 내가 깨닳은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바지 주머니에 수첩을 넣고 다니는 것이다.(타투와 메모는 결이 상당히 다르지만) 그리고, 툭 하면 펼쳐지기 쉽상인 수첩의 맨 앞 종이에 아끼는 규율들을 적어둔다.

덕분에, 가끔 잊고 살아갈 때도 있지만, 다시 보고 반추할 때도 많다.



잊지 말자.

아니, 당연히 잊을 수야 있지만,

자주 들여다 보자.

알긴 알겠고, 당장 손도 모자라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겠지만,

결국에 다다를 곳은 태초에 마음으로 그렸던 바로 그 장소일 거라는 믿음은

잊지 말자.




그림 제목:

Super-purp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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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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