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단편소설 <판타즈마고리아>

나를 꿈처럼 들어 올려 현실처럼 떨어트린

by 한운후


나를 꿈처럼 들어 올려 현실처럼 떨어트린

<판타즈마고리아>

Phantasmagoria


소개:

코로나 시기 거대 바이오기업의 비리를 폭로한 후 세상으로부터 숨어 살아야만 했던 한 남자. 오랜만에 아내와 놀이공원을 방문한 그는 'Phantasmagoria'라는 이름의 유령의 집 안에서 길을 잃고, 아내와 떨어지게 된다. 내부고발자로서 늘 생명의 위협을 염두하고 살아온 그는 난데없이 나타난 무자비한 손에 이끌려 죽음과 삶의 경계를 걷는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 동안 그는 과거와 기억들을 되돌아보며 끊임없이 그 손에 이끌려 나아가는 걸 멈출 수 없다. 무엇이 그를 죽였고, 또 살렸을까?




나는 이 손을 뿌리칠 힘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추운 겨울날의 서리 낀 쇠 문처럼 내 손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하지만 이 존재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아주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사실, 오늘 아침 아내와 함께 아홉 달 만에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알고 있었다.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곳은 그저 어둠이다. 그러니까, 폴리카보네이트처럼 발바닥을 통통 밀어내는 발판이 깔린 복도라 해야 할까? 보이진 않지만 무대 연출용 수증기의 차가운 촉감이 나의 얼굴과 귓불을 만지고 스치는 걸 느낀다. 새벽의 풀길에서 길 잃은 것처럼 가슴 가득 불쾌한 공기를 채우고, 다시 뱉는다. 코 끝에 가장 마지막으로 걸리는 건 그저 곰팡이, 혹은 오래된 차의 콘솔 냄새뿐이다. 가끔씩 천장에 은은한 옥색에 비슷한 빛의 흔적들이 나타나는데 메스껍고, 어지러운 와중 나의 판단을 신뢰해도 괜찮을까? 아마도 이곳의 직원들이 아닌 이상 알아차리기 어려운 일종의 스티커 일테다. 야광, 그렇지. 맞을까? 들어본 적 없는 소리도 들리는데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할까.

이런 생각도 차분히 가져본다. 내가 저 빛들을 따라간다면, 언젠가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가 공식적으로 살아있었던 시기, 그러니까 주민등록표에 등록되어 있고, 친구의 미움을 사지 않고, '세상을 구한 내부고발자'라 불리기 전, 사망 신고가 되지 않았던 바로 그때로. 큰일이다. 원래대로 되돌려 놓아야 할 것들이 참 많다. 더 이상 그들의 원한으로부터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애써 피해온 증오도 다시 마주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저 야광 스티커를 진짜 별들의 수만큼 세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건 후회가 아니다. 눈물 없이, 후회도 없다는 말처럼.

이제 보니 저 스티커들은 별 모양이 맞나 보다.



이 억센 손의 정체가 뭔지 다시 생각해 본다. 자연 다큐 채널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조개들 중에 가장 힘이 센 종으로 삿갓조개를 뽑았던 게 기억난다. 내 손을 마치 값진 몇 킬로그램의 진주 덩어리로 만들기라도 하려는 걸까? 쉽지 않을 텐데. 꽉 잡고 앞에서 끌고 가길 멈추지 않을 모양이다. 그리고 이 손은 조금 전엔 커피처럼 뜨거웠고, 지금은 빈 컵처럼 차갑다. 어쩌면 까끌한 고무 같고, 또한 옻칠된 나무같기도 하다. 진짜 사람 손이라 할 수는 없다. 바다 바람의 방향보다 변덕스러운 내 기분도 이렇게 쉽사리 뒤바뀐다. 감정도 참으로 가짜일 수 있다고 이 손이 대신 내게 말해준다.

정말, X같이 고맙다.

멀쩡한 나머지 한 손으로도 다시는 아내의 손을 잡을 기회가 보이지 않는다. 조막만 한 서랍을 뒤적이며 읽을 수도 없는 카드 하나를 잡기 위해 어둠 속에서 미하의 손을 뿌리친 건 바로 나 이니까.



다른 놀이공원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유령의 집들이 그러하듯,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건 빛이다. 그것도 한순간에 눈을 멀게 하는 강한 빛. 마냥 환한 게 좋은 줄 알고, 길고양이들처럼 양지에만 머무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깨알만 한 어둠에도 불안에 떠는 게 꼭 염소 떼 같다. 나는 이제 막 마음을 진정시킨다. 턱 아래 바닷물처럼 찰랑이던 어둠이 정수리 높이를 훨씬 웃돌고 있다. 뱀처럼 벽을 부드럽게 타고 지나가는 유령을 올려다본다. '저주받은 영혼들이 설치는 저택'이란 문구답게 천장의 3D 홀로그램 영사기는 뿌연 허공에 한 번에 하나씩 유령을 던져 보낸다. 나를 향한 기계의 렌즈가 누군가의 눈동자를 닮았다. 마치 내게 지금 죽음을 피해 도망쳐야 하는 방문객 역할을 종용하듯 가만히 바라본다. 다리가 칼에 찔린듯한 통증 속에서 내가 잠시라도 걸음을 멈출 수 있다면, 맹세코 저 망할 유령들을 영광스러운 천사로 추앙할 테다.



죽음의 침대에 드러눕기 전 피로를 풀기 위해 신음을 내며 온몸을 뻗는 멍청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걷는 것도 더는 피곤하지 않다. 아내에 대한 걱정도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져 간다. 내가 순응해야 할 유일한 건 나를 휴가철 짐짝처럼 앞으로 끌고 나아가는 이 손이 전부일테다.

천천히 생각을 되짚어보면 이건 말도 안 되게 웃기는 상황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얼굴의 절반을 마스크로 가려져 있던 시기에 그 일이 터졌으니, 오늘은 내가 5년 만에 처음으로 외출을 한 날이었다. 서울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주말에 찾는 평범한 놀이공원으로 아내와 함께한 평범한 데이트.

다시 앞을 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두꺼운 연기가 얼굴 위로 쏟아지는 걸 검은 곰의 털로 여겨도 무리가 없는 시간이다.





이런 부드러운 적막은 언제부터 이어졌을까. 아마도 어둠이 편안하고, 더는 숨어야 할 필요가 없어서겠지.

그래서 손에 익숙한 자동차 키처럼 뾰족하고 둥그스름한 시간의 모퉁이들을 잠자코 맛볼 수 있었나 보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아내와 줄을 서서 올려다본 빨간색 커다란 네온 간판을 기억한다.

Phantasmagoria

어린 소년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계속 뒤와 옆을 살피려 눈을 굴렸다. 군중 속에서 듣는 십 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심장을 쪼그라들게 만들 만큼 날카로울 수 있는 걸 모르고 있었다. 말발굽처럼 웅성이는 소리에 내 온 신경은 깨진 유리 파편들처럼 진동했다. '세계 최초 3D 홀로그램 호러 체험'이란 광고 문구를 서른 번을 족히 넘게 듣던 중 하늘에서 처절한 비명이 날아들었다. 알록달록한 스키틀즈를 닮은 롤러코스터 열차가 가장 높은 굽이에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곡선 위를 물처럼 흐르는 유연한 무쇠 열차만큼 그 위에 올라탄 사람들도 나를 매료시켰다. 몇 차례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반드시 어떤 순간에 취해야 할 몸짓을 똑같이 교육받은 것처럼,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오른 팔만 하늘로 뻗고 있었다. 똑같은 동작, 똑같은 표정, 똑같은 크기의 입구멍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똑같은 양의 공기. 그들의 단조로운 고성은 3~4초간 하늘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특별했다.

흥미로운 쪽은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판타즈마고리아 입구에 줄을 선 수 백 명의 사람들은 책 없는 도서관에 온 것처럼 숨을 죽인 채 야단스럽게 진동하는 롤러코스터 레일만 바라보고 있었다. 열차가 비명과 함께 성탑 뒤로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그들은 다시 전원이 켜진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락을 받은 것처럼 말을 하고, 웃기 시작했다. 그 장소가 고요했던 적이 한 번도 없던 것처럼 단어와 단어 사이에 스스로를 파묻었다.

"괜찮을 거야, 여보."

미하의 손이 따듯했다. 내 귀와 목 뒤를 어루만졌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게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어. 그냥 주변만 걸어 다닐까?"

"걱정하지 마. 여기도, 저기에도 당신처럼 검은 모자 눌러쓴 사람들이 많잖아. 그리고 조금 더 있으면 우리 차례야.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같이 가자."

그녀는 내가 더는 모자챙을 만지작댈 수 없이 두 손을 잡았다. 사회로부터 은둔하는 남편이 남들에게 짓밟혀 질식하지 않도록. 그녀에게 그런 힘들은 어디서 났을까. 하얀 유령 가면을 쓰고 하늘거리는 반투명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신이 초승달 모양의 커다란 낫으로 사람들의 머리 위 허공을 천천히 가르자, 비명과 환호가 이어졌다. 사신이 내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화가 유령. 깊고 차가운 해류를 타고 나타난 흰 형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쁜 표정과 울상을 번갈아 보인다. 최근에 해고당한 유원지의 피에로처럼 짧은 복도를 배회한다. 그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자화상이 내 눈길을 끈다. 그림 속 스스로는 그가 짓는 표정과 반대되는 것을 얼굴 위에 비친다. 웃음엔 슬픔을, 두려움엔 평안을. 화가가 낯익어서 주변이 다시 어둠에 둘러싸여도 기억을 더듬고, 또 더듬는다. 나를 어딘가로 부지런히 데려가고 있는 이 손, 아니, 이 존재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한 사람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바이오톡스-K의 연구 결과 조작을 언론에 제보한 이후로 나는 형진이라는 친구를 잃었다. 내가 그를 내버렸다 하는 게 더 정확할까. 지금 돌아보면 그에게서 온 이메일을 애초부터 열어보지도 말았어야 했다는 미련이 남는다. 삶 전체를 걸고 정성을 들여 만든 쿠키 상자를 상대가 뜯기만 하고, 입술조차 데지 않는 걸 바라보는 기분이란. 특히나 그 재료가 대부분 변명이나 자책이라면.



형진이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해본다. 그에게 모욕된 신호탄에 불을 붙인 사람은 바로 나다. 또 그가 넘지 못하게 높은 울타리를 세운 것도 나다. 이야기를 들어볼 여지를 언론에 접촉했던 순간부터 내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즈음 진작에 아내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의 주차장을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글쎄, 이런 무의미한 상상은 후회만 깊어지게 하는데. 더는 분노를 수렴할 의지조차 바닥이 난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을 반복해 봐도 내게 벌어진 일들은 결국에야 전부 타버릴 도화선들로 얽혀있었다. 그저 내가 고이 쥔 이 차가운 손만 뒤따른다.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땅에 털썩 주저앉거나, 팔을 부러뜨릴 각오로 거칠게 흔들고, 당신은 지금 사람을 잘못 봤다며 못난 비명을 지르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이대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을 맞이하려니 가슴에 쇠공이 떨어져 시퍼런 멍이 든 느낌이다. 아직 일들을 되돌리기에 늦지 않았다고 누군가 얘기해 준다면 좋겠다. 이 손아귀를 풀어헤칠 힘이 주어진다면 분에 넘치게 기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내 아내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 딸이 아빠의 긴 여행이 시작되어 오랫동안 집에 모습을 비추지 않는 걸 이해해 주길 기도한다. 자비를 구하는 기도에 반드시 두 손이 다 필요할까.






죽음을 수용하는 단계는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치는 것과 꽤나 비슷하다.

1. 문을 닫은 버스가 곧 떠나갈 사실을 부정하는 것.

2. 욕설을 뱉으며 얄궂은 빨간 후미등을 노려보는 것.

3. 정거장을 나와서 차도 위를 달리며 운전기사의 눈에 띄기 위해 손을 허공에 거칠게 흔드는 것.

4. 급한 성미의 기대에 못 미친 비싼 구두의 둔한 밑창 때문에 점점 다리에 힘이 빠져가는 것.

5. 이내 차선을 바꾸고 힘 있게 나아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걸음을 서서히 멈추는 것.

나는 과거에 버스를 놓쳤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 되돌아본다.





이 손에 이끌려 가파른 계단을 몇 차례 오른다. 발을 내밀 때마다 턱에 걸리고, 매번 다리에 남아있던 힘마저 풀린다. 하지만 나는 가동 중인 커다란 기계 안에서 쉬지 못하는 제일 작은 톱니바퀴와 같다.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처음엔 내가 본 걸 의심한다. 단순히 또 다른 홀로그램 허상일 거라 지레 판단하지만, 이곳은 유령의 집이란 사실을 또렷이 기억하고 내 눈을 의심한다. 황금색 노을빛이 나의 얼굴에 파도처럼 밀려든다. 벽의 갈라진 틈사이로 얼어붙은 코 끝, 입술, 볼이 한순간에 녹이는 빛이 멈추지 않고 분출한다. 예상치 못한 빛은 내 온몸을 위로하고, 눈 감게 만든다. 머릿속에 껴있는 어둠과 안개 또한 거둬낸다. 이런 단어를 내뱉는 게 부끄럽다.

"제발, 조금만 더."

갑자기 발을 떠받치던 바닥이 바늘에 찔린 비누 거품처럼 사라졌다. 곧바로 뒷머리와 등에 커다랗고 부드러운 뭔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천사의 날개라고 믿고 싶지만, 아무래도 빠르게 추락하며 나의 뒷머리에 맞는 공기의 감촉일 거라 짐작했다.

그 손이 나를 놓아주었다.




철골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폭이 점점 깊고 넓어진다. 나의 활력은 두려움과 구별될 수가 없고, 한 바퀴의 삶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이 난다. 여러 개의 트럼펫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조로운 비명소리가 내 눈을 뜨게 만든다.

주변은 여전히 깜깜했다. 고갤 들어 올리려 목을 움직인 순간 전에 없던 깨질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몸뚱이가 차가운 피자 반죽처럼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릎 위에서 손이 번번이 미끄러졌고, 수산 시장에서나 맡을 수 있는 쇠비린내 냄새로 가득했다. 아까와 똑같은 비명의 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나타나 순식간에 머리 위로 지나갔다. 철골의 잔진동 뒤로 이어진 적막에 주의를 기울였다. 나는 아직 미로 안에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일어설 수 있었지만, 두 걸음도 못 가서 제일 가까운 벽에 등을 기대야 했다. 머리가 점점 멍해지고, 몸의 균형이 정수리로 이동한 느낌이었다. 숨이 빨라지는 게 분명 좋은 신호는 아닐 것이다. 손에 만져지는 주위의 모든 공간을 더듬으려 자세를 낮추고 팔을 폈다. 나 스스로의 두개골 안에 갇혀서 기억을 더듬는 게 가능하다면 가장 먼저 미하와 헤어지기 직전의 순간을 찾을 수 있을 텐데. 그곳은 미끄럼 방지용 고무 패드가 깔린 완만한 내리막이었다. 나는 연기 속에서 홀로그램 유령을 마주칠 때마다 그녀를 진정시켰다.

"여보, 방금 그거 봤어?"

"응."

"그런 게 내내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내 손 절대 놓지 마."

벽을 더듬다 우연히 손에 나무 서랍 손잡이가 만져졌다.

"여기 뭔가가 있어, 잠깐만."

나는 그녀의 손을 잠시 놓고 좁다란 틈새로 손을 밀어 넣었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손등살을 짓눌렀다. 그때 나는 멈출 수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손등 피부가 종이처럼 찢어지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고통스럽지 않았다. 자세를 바꾸자 현기증과 함께 주변이 반짝이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손가락 끝에 닿은 건 작은 카드 한 장. 그리 기쁘지 않았다.

"여보."

뒤를 돌았을 때 그녀가 대답 없이 내 손을 잡았다. 평소와 달리 억세고 차가운 손아귀. 그건 나를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여보! 예바훈! 나를 봐!"

그 손이 무엇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눈을 감은 것처럼 어두우니 머리로 뭔갈 떠올린 동시에 눈앞에도 나타났다. 축축한 뒷머리에 바늘이 꼽힌 것처럼 아팠다. 뒤엔 분명 딱딱한 시멘트 바닥이었다. 누운 상태에서도 술을 마신 것처럼 휘청거리는 느낌은 대학 축구부 동아리 시절에나 겪은 일이었다. 인조 잔디밭에 누워 바라봤던 오후 1시 6월의 파란 하늘. 그때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것처럼 눈앞을 덮는 기묘한 어둠을 기억했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몸이 마음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걸 기필코 잡아야 하는 걸 알지만, 손에 잡히는 건 코앞에 있던 한 줌의 빛이었다. 황금색의, 단 하나밖에 없는 노을의 빛. 주먹을 피면 이제 정말 끝이었다.

"여보!"

내 앞의 검은 커튼을 거두는데 치러야 할 값이 있다면, 지금 무엇을 내밀 수 있을까?

"제발... 여기, 나를 봐!"

글쎄. 아마도 나는 전부 이 커튼 너머에 두고 왔을 것이다. 교도소를 가 본 적이 없지만 이 커튼도 그곳의 외벽만큼이나 무겁고 새카만 색일 텐데.

"제발 일어나..!"

미하의 목소리가 그걸 뚫고 내 귀에 들려온다.

"보호자분, 위험하니 환자에게 손 떼세요! 자, 충전합니다."

사람 눈알이 그리 대단한 걸 볼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렇다.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낯선 색깔의 불꽃들이 마구 피어난다. 무슨 뜻일지 알고 싶다. 여긴 새하얀 방 안이고, 아까 전 그 불꽃들은 각각 고유의 촉감을 가진 여러 다발의 빛줄기들로 바뀌고 있다. 아기들이 대개 그러하듯 나도 손을 꼼지락대며 그걸 만지러 아장아장 걸어간다. 난 이 순간을 무엇으로 갚아야 하는 걸까? 아무것도 두렵지가 않다.

"맥박, 맥박 돌아왔습니다."

"여보!"



벌써 하늘이 보라색으로 물든 저녁이다. 수 천 개의 노란 전구들이 그 아래서 파도처럼 출렁인다. 의외로 응급차 뒤에 걸터앉아서 구조요원들의 어깨너머로 벌어지는 광경을 보는 건 거실에서 가족들과 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포근하다. 무슨 심각한 명령을 받은 것처럼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 검은 옷에 검은 헬멧. 저 사람 등에 메인 기다란 검은색 총은 진짜 M4일까? 커다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총을 멘 사람들에 이끌려 등 뒤로 수갑을 맨 채 경찰차 뒷좌석으로 들어간다. 그 와중에 빨간빛과 파란빛이 야단스럽게 번쩍인다. 경찰차를 생각하면 무의식적으로 보라색 빛이 떠오르는 이유를 이제야 깨닫는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기억에 온 장면을 한 프레임씩 담아낸다.

노란 폴리스 라인 너머에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 백명의 단역들이 서있다. 나는 영화를 보면 꼭 주인공만큼이나 그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곤 했는데, 구경꾼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 없었다. 감독은 무슨 의도를 가졌을지 궁금하다. 이 영화의 구경꾼들은 쉬지도 않고 나만 바라본다.

더 이상 오른쪽 눈썹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뇌에 문제가 생겨서가 아닌, 붕대가 머리를 너무 꽉 조여서라고 믿고 싶다. 앳된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구조요원이 눈을 부릅뜬 채 바들대는 손으로 내 머리를 만지작 거린 지가 십 분이 넘어간 참이었다. 이럴 거면 내가 이 친구를 안심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저기, 선생님... 지금 혹시 어디 불편한 데가 더 있을까요?"

턱을 움직이기 어려워서 눈을 꼭 감고 손을 저었다. 왠지 모르게 그의 표정 한층 더 어두워진다.



미하, 내 아내. 그녀는 지금 도시락 모양의 광택이 흐르는 검은 SUV 앞에서 한밤중에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남자들과 얘기를 나눈다. 검은 양복차림의 그들은 보통 한바탕 소동이 마무리된 후 다시는 똑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믿음직한 언약을 건넨다. 다시 도시락 같은 차에 올라타면, 남아있는 사람들은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지는 멋지고 빨간 후미등을 응시하며 말을 멈춘다. 이 영화도 이제 결말에 이르는 단계에 접어드는 것 같다. 미하가 내게 다가온다. 내 머리의 붕대를 풀고 다시 감아준다. 오른쪽 눈썹도 다시 움직일 수 있다. 이 여자의 손엔 마취제라도 든 것인지 전혀 아프지가 않다. 그녀의 손이 내 귀를 만지면 나는 눈을 감고 손목 냄새를 맡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든다.






며칠 뒤 병원을 방문한 놀이공원의 관계자들은 미하가 돌려보냈다. 오히려 사과해야 할 쪽은 우리라는 게 그녀의 굳은 생각이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들이 내 표정을 이상하게 봤을까 걱정이 든다. 반면에 등산 재킷 차림의 경찰들은 여전히 병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살아남은 사실보다 자신들의 관할 지역에서 보복성 청부살인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는 걸 더욱 믿기 어려운 눈치였다. 이해할 만했다. 내가 애처럼 놀이공원을 가는 건 경솔한 선택이었으니까. 증인 보호를 받는 사람은 그저 집 안에 가구처럼 머물러 있어야만 하니까.

회색 수염이 난 한 형사는 퍼즐 조각 같은 내 진술들을 끼워 맞추느라 애를 먹었다. 혹여나 답이 안 나오는 상황에 그가 울음을 터뜨릴까 걱정이 들어서, 어둠 속에서 나를 가차 없이 끌고 다니던 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도대체 어디로 길을 샌 거야?" 미하 역시 답답함을 참지 않고 물었다.

나는 처음에 들어갔던 방을 떠올렸다.

"내 바지 어디에 있어?"

형사는 화덕에서 뜨거운 피자를 꺼내듯 옷장에 고이 접혀있던 바지를 들고 아내에게 넘겼다.

"단서를 찾으려고 방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서랍에서 이걸." 나는 구겨진 카드를 들었다.

형사는 유심히 살피고는 아래턱을 샐쭉거렸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는 조심스레 미하에게 카드를 건네며 예의 있는 미소를 보였다.

"근데 잠깐만요. 혹시 단서라고 말씀하셨나요?"

"네. 그 방의 벽에 있던, 나무로 된 서랍 안에."

형사는 손바닥만 한 수첩을 펼치더니 엄지를 이용해 재빨리 종이를 넘겼다.

"뭔가 잘못 기억하고 계신 것 같은데, 말씀하신 그 방은 플라스틱 재질로 된 구조물이고 다른 모든 공간들도 마찬가지로 나무로 제작되지 않았습니다. 상자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는 나를 쏘아보았다. "바닥의 카펫, 천장의 홀로그램 영사기가 전부입니다. 사람들은 3D 유령들을 보러 판타즈마고리아를 가는 것이지, 그곳은 서울의 여느 방탈출 카페와 다른 곳이에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의 상처엔 검붉은 딱지가 앉아있었다.

"아무튼, 예바훈씨. 용의자가 공격을 가하기 전 상황에 대해 제게 더 해주실 말씀이 있을까요?"

형사가 펜으로 수첩의 빈 페이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무엇을 더 설명할지 몰라 어둠 속에서 날 놓아주지 않던 그 손의 감촉을 떠올리려 했다. 그 손이 진짜였다고 믿을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예바훈씨?"

그때 창가 앞에 서있던 미하가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읽었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녀는 카드를 손에 쥔 채 긴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 보니, 단서라 굳게 믿었던 카드에 뭐가 적혀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형사는 입술을 깨문 채 날 노려보았고, 나는 손등의 상처만 어루만졌다.

붉은색 아픔은 꿈처럼 황홀하고, 현실보다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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