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딜레마를 드러내는 불편한 진실이다. 로마 제국의 쇠락, 명나라의 몰락, 20세기 파시즘의 등장과 몰락까지,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어떤 필연적 패턴의 반복이다. 그렇다면 이 반복의 메커니즘은 무엇이며, 더 중요하게는 이것이 우리 삶의 의미에 대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역사의 반복은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한다.
첫째, 인간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다. 권력은 필연적으로 집중되고, 집중된 권력은 부패를 낳는다. 경제적 번영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불평등은 사회적 긴장을 고조시킨다. 2008년 금융위기가 보여준 것처럼, '대마불사'라 믿었던 금융기관들의 탐욕이 글로벌 경제를 마비시켰고, 이는 1929년 대공황의 메커니즘과 본질적으로 동일했다. 이는 개인의 선악과 무관한 시스템의 논리다.
둘째, 인간 본성의 한계다. 권력자의 교만, 성공에 대한 안주, 위기 상황에서의 근시안적 판단은 시공간을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과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보여주듯, 절정기의 권력자들은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고 같은 함정에 빠진다. 더 치명적인 것은 세대 교체와 함께 과거의 교훈이 망각된다는 점이다. 직접 겪지 않은 고통은 추상적 교훈에 불과하며, 새로운 세대는 같은 실수를 '처음' 저지른다고 믿는다.
셋째, 외부 환경의 제약이다. 자원의 한계, 환경 변화, 지정학적 갈등은 문명에 지속적으로 동일한 압력을 가한다. 마야 문명의 몰락과 현대의 기후 변화 위기는 천 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환경적 압력이라는 동일한 구조를 보여준다. 기술이 발달해도 이런 근본적 제약 조건들은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위험을 창출한다.
근대 이후 우리는 '진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 기술이 발달하고 지식이 축적되면 인류는 자연스럽게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이는 위험한 착각일 수 있다.
진보 신화의 첫 번째 허점은 기술 발전이 인간의 행복이나 사회 안정과 직접적 상관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핵무기, 생화학 무기, 인공지능 등 현대 기술은 인류를 더 정교하고 효율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기술은 중립적이며,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기술 발전은 양날의 검이다.
두 번째 허점은 누적되는 리스크다. 각 시대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다음 사이클로 전이되면서, 역사의 각 반복은 더 복잡하고 위험한 조건에서 시작된다. 환경 파괴, 핵 확산,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성 등은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차원의 위험이다.
세 번째 허점은 현대 사회의 극도의 복잡성과 연결성이다. 과거에는 한 문명의 몰락이 지역적 현상이었다면, 오늘날은 작은 실수 하나가 글로벌 시스템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나 코로나19 팬데믹이 보여준 것처럼, 현대의 위기는 전염성과 파괴력에서 과거와 차원이 다르다.
일부는 역사가 단순 반복이 아닌 '나선형 발전'을 한다고 주장한다. 비슷한 패턴이지만 더 높은 차원에서 반복되므로, 결국은 발전적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검증되지 않은 희망적 추측에 불과하다.
나선형의 끝이 해피엔딩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각 사이클에서 축적되는 복잡성과 위험성을 고려할 때, 나선형이 파멸로 향하는 소용돌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진보에 대한 믿음 자체가 근대 서구 문명이 만든 하나의 신화일 뿐, 역사적 필연은 아니다.
진보라는 거대한 서사가 무너지자, 남은 것은 그저 피상적인 도덕적 명령뿐이다. 이런 절망적 현실 인식 앞에서 흔히 등장하는 반응이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이다. 하지만 이는 인간을 단순한 기계로 전락시키는 위험한 사고다.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저 '최선'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기계의 작동 방식이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며,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 없이는 진정한 삶을 살 수 없다.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종종 사고의 정지를 의미한다. 현실의 근본적 모순과 허무함을 직시하지 않고, 관성적으로 기존의 행동 패턴을 반복하라는 것이다. 이는 도피이지 해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역사의 반복성과 진보 신화의 붕괴를 인정한다면, 인간 존재는 본질적으로 허무한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에 직면한다. 하나는 절대적 허무주의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허무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인간은 객관적 무의미함을 인식하면서도 주관적 의미를 계속 창조한다. 사랑하고, 창조하고, 희망을 품는다. 이는 논리적 모순일 수 있지만, 동시에 인간다움의 핵심이기도 하다.
어쩌면 의미는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가 어디로 향하든, 지금 이 순간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무언가를 창조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 행위 자체가 의미일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위안이나 자기기만이 아니다. 인간이 의미를 창조하는 존재라는 것은 생물학적, 철학적 사실이다. 우리는 언어를 만들고, 예술을 창조하고, 사상을 발전시키며, 사랑의 형태를 다양화시킨다. 이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는 우주의 먼지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주관적으로는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
결국 우리는 역사의 반복성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해야 하는 존재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허무함을 직시하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 절망을 품으면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고도의 정신적 성숙을 요구한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자 특권이다. 우리는 기계처럼 맹목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의미함 속에서도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역사가 반복되고 문명이 흥망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랑과 예술과 사상은 그 자체로 완결된 가치를 가진다.
역사의 반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체념도 맹목적 낙관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굴복하지 않는 창조적 반항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다움이 아닐까.